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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유인간 May 13. 2020

없는게 메리트라는 나의 집 연대기

부모님 집을 나와 산 지 꽤 오래다. 고등학교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 올해로 20년을 찍은 셈이다.  

대학교까지 기숙사에서 살다가 일반적으로 독립이라고 부를만한 생활을 시작한 것은 24살 무렵부터이다. 대학원에 진학하며 기숙사를 벗어나 자취를 시작했다.  

 



첫 자취방은 학교 근처 빌라촌의 옥탑이었다. 보증금 100만 원에 25만 원짜리 월세방. 같은 값으로는 작은 원룸밖에 구할 수 없었으므로 선택한 꽤 널찍한 옥탑이었다. 장학금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렵게 방세를 구해서 생활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불법으로 증축한 건물이었던 것 같다. 5층의 주인세대 현관문을 통해 옥상으로 가면 천정이 ㅅ자 모양으로 생긴 내 옥탑방이 나온다.


다른 모든 옥탑방처럼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데, 특히 겨울에 미치도록 춥다. 그렇게 실내외 온도차가 심하면 창문에 결로가, 벽에는 곰팡이가 생긴다. 4면의 벽 중 2면이 곰팡이로 인해 흰 벽지가 검은색이 되었다.


부엌 천장은 경사져서 똑바로 서면 머리가 천장에 닿으므로 고개를 왼쪽으로 45도 정도 삐딱하게 기울이고 설거지를 해야 했다.


옥상 마당은 배수가 잘 안돼서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물이 10cm 정도 차올랐다. 외출할 비를 다 하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연못 같은 마당을 마주하면 한숨이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옛날 집이라 장을 보면 6층까지 계단으로 무겁게 날라야 했다.  


그래도 햇볕 좋은 날이면 마당에 나가 간이 테이블을 펼치고 '이 맛에 옥탑이지'하며 밥을 먹었다. 햇볕이 잘 들어 집안에서 허브를 키웠는데 자라는 속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널찍한 방에는 소파와 식탁, 책상도 두고 커피머신도 두었다.


당시엔 짜장면이 2500원, 스타벅스 커피가 3100원 하던 시절이다. 스타벅스에 가면 된장녀 소리를 들었다. 어쩌다 에스프레소의 시큼 씁쓸한 맛에 눈을 떠서 이리저리 계산해보다 된장녀 소리를 듣느니 한 달치 생활비를 털어 큰 맘먹고 네스프레소 머신을 샀다. 햇볕 좋은 날 옥탑에서 커피를 한 잔 내려마시면 부러울 게 없었다.




두 번째 자취방은 서울 회사에 취직하며 얻은 원룸이었다.  

경기도에 있는 이모 집에 얹혀살다가 취직한 지 3개월 만에 받을 수 있는 대출을 몽땅 받아 낙성대역 근처에 전셋집을 얻었다.


집이라기보단 고시원보다 조금 넓은 정도에 불과했다. 간이부엌과 화장실을 제외하면 침대와 책상, 옷장이 간신히 들어가는 작은 방이었다. 빨래를 널면 밥 먹을 공간이 없어 빨랫대 아래로 다리를 넣고 밥을 먹었다.


그래도 2층이라 계단을 한 층만 오르면 되었다. 옥탑만큼 춥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창문형 에어컨은 어째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듯했다. 에어컨을 켜면 눈이 따가워 여름은 덥게 지냈다.


겨울의 옥탑방 화장실은 난방이 안돼서 샤워를 하려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그래도 새 방에선 따뜻하게 씻을 수 있어 행복했다. 게다가 옥탑은 화장실 천장도 경사져서 샤워할 때 항상 고개를 어떤 방향으로든 45도 기울여야 했는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샤워할 수 있다니, 매번 감회가 새로웠다.


하나 있는 창문은 이 작은 원룸에 걸맞게도 고작 내 얼굴만 했는데 환기는커녕 그나마 북향이라 집에 해가 전혀 들지 않았다. 옥탑만큼 춥지는 않았어도 쿰쿰한 냄새와 곰팡이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다음 집도 원룸이었다. 전세 계약이 종료되는 2년 후 돈을 조금 더 모으고 대출을 추가로 받아 같은 원룸이지만 더 넓은 집으로 옮겼다.


이전 집보다 더 넓은 집일 것 외에 고려한 것은 베란다였다. 빨랫대 아래에 웅크리고 밥 먹은 경험이 너무 서글퍼서 빨래는 꼭 베란다에 널고 싶었다.

2면에 두른 엄청 큰 베란다가 있는 집이었다. 베란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기쁨이었다. 베란다에 세탁기도 놓고 짐도 보관하고 빨래도 널었다. 방안에 그것들이 없으니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예전엔 너무 좁아 집에 들어가기 싫었는데 새 집에선 뒹굴거리는 맛이 났다.


그러나 북향 방이라 여전히 해가 들지 않았다. 창문이 2면이나 나 있었는데도 항상 집안이 어두웠다.


사실 이 집의 가장 큰 문제는 주인아줌마였다. 검정색 벤츠 S클래스를 타고 다니는 무서운 아줌마였는데, 나쁜 집주인의 전형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집주인은 정말이지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이 집에 살면서 결혼을 해서인지 잘 지냈다는 느낌으로 남아있다.




결혼 후 1년 정도를 여전히 같은 집에 살며 남편과 주말부부로 지내다 남편의 학위가 끝나 드디어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신혼집은 역삼동에 구했다. 갓 졸업한 남편은 어차피 모아놓은 돈이 없었으므로 내 전세금에 대출을 더 받아 7층짜리 빌라의 4층 투룸에 전세로 들어갔다. 드디어 내 인생에 원룸이 아닌 방이 구분된 집에 살 날이 온 것이다.

이 집을 구할 때는 이전 집 대비 두 가지를 고려했다. 투룸일 것, 그리고 해가 잘 들 것이다. 주인아줌마는 이전 집보다 더 나쁠 수가 없으므로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좋은 분을 만났다.


창문을 열면 바로 옆집이 보이는 빌라촌의 평범한 투룸이었지만 그곳에서 나만 아는 기쁨을 만끽했다. 옥탑이 아닌 멀쩡한 층의 넓은 방, 베란다, 그리고 옷방으로 쓸 수 있는 방이 하나 더 있고, 곰팡이는 좀 있었지만 남향에 창문이 많아 채광이 좋았다. 그 평범함 하나하나가 몇 년 동안 돌고 돌아 얻은 것들이었다.  이 집은 꽤 마음에 들어서 계약기간을 채우고도 1년을 더 살았다.


그러다 회사가 이전을 하게 되었다. 원래는 걸어서 30분 안쪽으로 출근하다가, 이제 차를 타고 30분을 걸려야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개미, 개미가 문제였다. 집이 조금 낡은 편이었지만 큰 불편 없이 살았는데, 어느 날 가만 보니 개미가 몇 마리 기어가는 것이었다. 개미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눈을 옮겼더니 글쎄 개미떼가 줄을 지어 가는 것이다. 현관문 바로 앞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옛날 집이라 문지방이 나무로 되어있었다. 화장실 문지방에 개미가 보금자리를 튼 것이다. 당시 우리 집에서는 거의 음식을 먹지 않아서 개미들이 어디서 음식을 실어 나르나 했더니 개미 행렬이 앞집과 연결되어 있었다. 앞집에서 음식을 우리 집으로 가져다 나르는 모양이었다. 다음날 당장 세스코를 불러 30여만 원을 주고 약을 놓았다. 며칠 후부터 개미 사체가 군데군데에서 발견되었다.

 



회사도 멀겠다, 개미도 나오겠다, 그냥 회사 근처로 집을 옮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고려하게 됐다. 회사는 강남 한복판에서 서울 변방의 아파트촌으로 이사했는데, 당시에 그 아파트가 서울시내 다른 집값에 비해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대출 금액이 부담되긴 했지만 맞벌이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때가 아니면 언제냐 싶은 생각으로 회사와 도보 5분 거리에 첫 집을 구입했다. 그렇게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롯이 남편과 나의 노력으로 서울의 아파트에 자가로 살게 되었다.  


나처럼 어렸을 때부터 집을 떠나야 했다면,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좋은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이들은 결혼할 때 부모님의 도움으로 번듯한 아파트를 장만해 부모님 집에서 새 집으로 이주할 것이다. 꼭 부모님의 도움 없이도 그저 능력이 되어서 좋은 집에서 독립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럴 형편이 안되어서 이렇게 옥탑과 빌라촌 원룸, 투룸을 돌고 돌아 그 평범한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아마도 나처럼 돌고 돌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평범함의 의미를 나만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원룸도 투룸도 아닌 방이 3개인, 남향이라 해가 잘 들고, 창이 많아 환기도 잘 되고, 번듯한 베란다가 있고, 새시에 결로도 안 생기고, 집안에 곰팡이도 없고, 개미도 안 나오는 집에, 주인아줌마도 없이 살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없는게 메리트라는 노래 가사가 이토록 와 닿을 수 있을까?




아무리 평범한 백반 한 끼라도 하루를 굶은 사람은 누구보다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입안에서 퍼지는 밥알의 고슬고슬한 느낌, 새콤하게 익은 배추김치의 아삭한 흰 부분, 입안의 빈 공간을 채우는 된장찌개 한 숟가락…  


이 평범한 집도 그동안의 결핍이 있었기 때문에 내겐 너무 맛있었다.

해 드는 방향, 햇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관찰하며 집안에서 해를 쬘 때 행복감을 느꼈다. 환기를 할 때면 집안에 불어오는 바람에 싱그러움을 느꼈고, 창문을 닫을 때 부드럽게 슥 소리가 나며 조용해지는 감각을 좋아했다. 베란다에 나갈 때마다 종종 곰팡이가 있는지 살피고 없으면 미소가 떠올랐다. 누구의 허락도 없이 원하는 대로 원하는 때에 조금씩 인테리어를 꾸몄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기본적인 것일 테지만, 그렇게 결핍된 내 인생이었기에 그 기본적인 것마다 마음이 차올랐다.


물론 이 '기본'을 쉽게 충족한 사람들도 그 나름의 역사가 있을 테니 분명 그들에게도 내가 모르는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모든 역사에는 결핍이 많았기 때문에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곳에서조차 쉽게 충족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내 결핍이 좋다. 결핍이 있어야만 그것이 충족됐을 때 그 의미를 온몸으로 맞이할 수 있다. 또한 갈증을 느낄 때는 분명 괴롭지만 어떤 순간에도 항상 좋은 점은 있기 마련이었다.


요즘도 집에 해가 들 때면 생각한다.

‘집안에 해가 들어도 이 햇빛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 해가 든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야.'


PS. 아쉽게도 다시 서울을 떠나게 되면서 언급한 마지막 집에는 1년 남짓밖에는 살지 못했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훨씬 저렴한 값으로 더 좋은 환경의 집에 살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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