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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유인간 Jun 22. 2020

책갈피 소유욕

갑자기 소유욕이 없어진 이야기

현재의 나는 소유욕이 별로 없는 편이다. 

미니멀리즘까지는 아니지만 되도록 물건을 들이기보다는 버리려는 쪽에 속한다. 

명품 같은 것도 그다지 욕심이 없고 화장품도 스킨과 로션, 겨울엔 로션 대신 크림 정도만 구비한다. 


처음부터 소유욕이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닌 것 같다. 실은 소유욕을 넘어선 욕심까지 있었다.  

유치원생 정도로 어렸을 적에 엄마와 도시락 가방을 사러 간 적이 있는데 만화 주인공인 캔디 캐릭터가 그려진 한 도시락 가방이 너무 갖고 싶은 나머지 그 옆에 있는 못생긴 녀석을 선택했다. (응?) 정말 바보 같지만 그걸 가져버린다는 게 아까워서였다. (응??) 


사실 물욕을 놔버리게 된 계기가 있다. 

어렸을 적에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엄마와 서점에 자주 갔고 책을 많이 사 주셨다. 서점에서 책을 사면 새 책의 옆구리에 도장을 찍고 책갈피를 하나씩 끼워줬다. 그런 서점 책갈피를 그렇게 모았다. 


서점마다 책갈피의 생김새도 여러 가지이고, 한 서점에도 다양한 디자인의 책갈피가 있었다. 가장 흔한 디자인은 문구나 일러스트가 인쇄된 네모난 작은 종이를 코팅하고 윗부분에 펀치로 구멍을 하나 뚫어서 거기에 리본을 매주는 것이었다. 좀 더 대형 서점에 가면 빳빳하게 인쇄된 조금 더 큰 종이로 된 책갈피를 주기도 했다. 이런 책갈피는 보통 코팅도, 리본도 없었고 책 광고 같은 것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가끔 여행을 가거나 해서 기념품점에 가면 꼭 책갈피를 팔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파는 것은 나무 막대에 나비나 원숭이 같은 모형이 달려있는 것도 있고 클립 형태로 책장에 끼우게끔 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 내가 책갈피를 워낙 좋아해서 엄마는 해외로 여행이나 출장을 다녀오시면 꼭 책갈피를 사다 주셨는데, 일본산 책갈피는 무려 금으로 도금된 것이었다. 언젠가부터는 한국의 대형 서점에 가도 석가탑 모양이라든지 전통 문양 모양이라든지 그런 비슷한 것들을 팔고 있었다.  


책갈피를 정말 좋아했고 아주 많은 책갈피를 갖게 되었다. 내 책갈피 컬렉션은 정성스레 만든 예쁜 종이상자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 


한편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나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달리 책갈피를 모을 일도 없었고 무엇보다 적응하고 공부하느라 바빠서 다른 데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갈 수 있었는데 토요일 오후에 갔다가 일요일 오전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자연스럽게 책갈피 같은 것은 일상에서 잊혔다.  


그러다 졸업할 시즌인지 언제인지 모를 어느 날, 그 책갈피 상자를 발견한 것이다.  

오랜만의 그 상자는 반가웠지만 낯설었다. 한때는 한 번씩 꺼내서 감상하고 뿌듯해하던 책갈피들이었는데,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책갈피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림과 글씨들이 촌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왜 거기에 그렇게 애착을 가졌는지도 잘 생각이 안 났다. 어떻게 그렇게 좋아하던 물건들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 신기했다. 애착을 가지고 모았던 시간들이 순간 부질없게 느껴졌다. 


스무 살도 안 된 꽤 어렸을 때인데, 그 이후로는 무엇이 됐든 물건에 그리 소유욕도 애착도 없다. 필요하면 사고, 불필요하면 버린다. 지금 아무리 고민한들 어차피 나중이 되면 애착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남편은 여행에서 산 버스표까지 소중하게 간직하는 사람이라 남편과 비교하면 나는 참 감성이 부족한 사람이다. 다행히 요즘은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는 시기라 나도 설자리가 생겼다.  


게다가 소유욕이 별로 없다는 것은 상당히 편리하다. 특별히 사고 싶은 것이 없으므로 돈을 딱히 많이 벌지 않아도 되고, 여행에서든 일상에서든 이걸 살지 저걸 살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적당한 것으로 사고 마음에 안 들면 쓰다 버리면 되니까. 심지어 평소에 잘 안 사니까 뭔가를 꼭 사고 싶을 때 자기 합리화도 잘 된다.  


한때 책갈피를 그렇게 모았다는 이유로 나는 소유욕이 별로 없는 사람이 됐다. 당연하게도 여기에 좋고 나쁨은 없다. 그저 소유욕이 강했던 꼬마가 소유욕 없는 어른으로 자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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