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유인간 Apr 07. 2020

자발적 무자녀 가족, 온전한 부부의 삶을 지향하며

아이가 없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백수가 됐으므로 아이를 안 낳거나 못 키우겠다는 것은 분명 아니다. 반대로 아이가 없는 삶을 선택했기에 빠른 은퇴를 할 수 있었다. 아이가 있었다면 아마도 될 수 있는 한 오래 직장에 다니려고 했을 것이다.


예전에 사석에서 은사님께서 이미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 다른 종교를 전도하는 것보다 무교인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무교의 ‘무’가 백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나가면서 하는 말씀이었지만, 무교인 나는 그 말에 굉장히 공감했다. 마치 내 머릿속에 있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말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뜬금없게도 난 종교와 자녀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둘 다 그로 인해 살아갈 원동력을 얻는다는 것, 그래서 ‘전도’하려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라는 말을 너무 쉽고 당연하게 던진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 테고, 아이로 인해 행복해서 권하거나, 혹은 아이 키우는 것을 의외로 너무 쉽게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보통 아이가 있는 사람들이 전자의 경우,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 후자의 경우이다. (물론 친구들 중, “지금의 나는 내 아이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어. 하지만 맞아. 만약 이 아이와의 경험이 애초에 없었더라면 아이 없이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위의 ‘무교’에 대한 내 소회는 딩크족이나 싱크족처럼 자발적 무자녀 가족인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무’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지만, 이 ‘없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있음'을 선택한 사람들 못지않게, 어쩌면 더 많은 고민을 한다.

내가 둘 다 ‘없는 사람’이어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마도 그래서 그럴 것이다.


아이가 없는 삶을 선택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일찍부터 그 선택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한 편인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내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엄마의 사랑이 너무 위대해서 나는 따라갈 수가 없다.   


어렸을 적 가끔 난 엄마가 자식(=나와 동생)을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 보였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 이렇게 잘해주고 희생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된 건지 물어본 적도 있다. 엄마는 워킹맘이었는데, 직장에서 ‘이모’들은 엄마를 슈퍼우먼이라고 불렀다. 다니시던 직장에서 이사장까지 지냈으니 여러모로 열정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생활협동조합이란 직장 특성상 직위와 보수는 별 관계가 없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가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초등학생이 구할 수 없는 준비물이 필요하다. 합창단에 필요한 흰 상의와 검은 바지라던지, 미술시간에 필요한 수채화 도구(스케치북, 크레파스 말고 ‘수채화 도구’라는 처음 듣는 단어를 초등학교 저학년이 알 리가 없었다.) 같은 것 말이다. 그 시절에는 휴대폰도 없었으므로 나는 하교 후에 집에 와 엄마 직장에 전화를 걸어서 "이런이런 준비물이 필요하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일이 많아 종종 늦게 들어왔는데, 그런 날에도 여지없이 준비물을 어디선가 구해다 주었다. 가끔 엄마는 너무 피곤해 보였고, 나는 엄마의 사랑이 너무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은 너무 보잘것없다. 엄마의 사랑은 내 그릇으로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2. 가치관에 자신이 없다.


금전적인 문제는 사실 가장 쉬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봐도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형편에 맞춰서 키우면 된다. 진짜 문제는 가치관이다. (금전적인 문제도 사실 여기서 나온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요즘엔 4살부터 영어유치원을 비롯한 ‘코스'를 타야 한다던데 이게 맞는 것인가, 틀렸다고 할 수 있는가?
아이에게 부부의 인생 중 얼마를 투자할 것인가?
어떤 가치관과 도덕성을 지닌 사람으로 키워야 하는가?
옳고 그름은 무엇인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으로 키워야 하는가, 아니면 투지를 갖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키워야 하는가?  


더 황당한 것은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나 자신의 가치관도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가치관을 형성하기에 상당히 괴로웠다. 그 괴로운 시간을 내 아이가 겪는다는 게 달갑지 않다.


3. 희생하기엔 내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회사원 시절, 디자인팀에는 워킹맘들이 많았으므로 현실적인 문제들을 많이 접했다.

아이가 울어서 몇 달째 잠을 몇 시간밖에 못 자는 엄마
아이가 아파서 급히 휴가를 내고 병원에 다녀와야 하는 엄마
아이를 픽업하려 회식도 못 가는 엄마
초등학생인 아이가 한 말에 상처 받고 운 엄마
아이가 왕따를 당하는데 전업맘만큼 신경을 못써줘서 걱정인 엄마
그냥 모든 엄마…


나는 금요일을 기다렸고 엄마들은 월요일을 기다렸다.


친구 중 한 명을 아이가 돌 정도일 때 만났는데,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육아를 하려면 4명의 양육자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예를 들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함께 공평하게 아이를 양육하는 아름다운 모습 말이다. 그 친구의 삶을 접하면 실로 그러했다.  


나는 내 삶을 온전히 살기에도 평생밖에 못 사는 것이 너무 아쉽다. 남편과 이야기하는 시간, 커피 마시는 시간, 사색하는 시간, 요리하는 시간, TV 보는 시간, 그림 그리는 시간, 운동하는 시간, 친구를 만나는 시간, 산책하는 시간, 여행하는 시간, 집을 가꾸는 시간… 모든 시간이 너무 값져서 이것을 잃는 것이 너무나 큰 상실로 느껴진다. 아이를 키우려면 지금 있는 내 시간은커녕 지금 없는 시간까지도 잠을 줄이며 송두리째 바쳐야 한다. 심지어 그건 몇십 년 동안이나 계속된다.




아이를 낳으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를 키운다는 건 다른 종류의 행복이야.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해 본 차원의 행복이야."

맞는 말이다. 다른 차원의 행복. 나는 경험해보지 못할 것임과 별개로, 다른 사람들이 아이로 인해 얻는 행복이 나도 기쁘다. 하지만 나에겐 내가 아는 차원의 행복이 있다.


아이가 없는 삶의 행복  

    
1. 남편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30년이나 인생을 함께 하셨지만 시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시고 시부모님은 그렇게 많이 싸우셨다고 한다. 비로소 인간대 인간으로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8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두 분 모두 편해지셨다고 하셨다. 상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모진 시간을 헤쳐나가느라 막상 부부는 서로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나와 남편은 올해로 만난 지 20년, 결혼한지는 7년을 넘겼다. 나는 남편이 화장실에 가고 싶은지, 배가 고픈지, 할 말이 있는지 그냥 안다. 우리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취향과 일을 공유하고 누구의 엄마나 아빠가 아닌 그저 인간으로 서로에게 온전하며 매일 사랑과 행복을 말한다.


2. 살 만한 여유가 생겼다.


남들만큼 살려면 직업도 좋아야 하고 재산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이것저것 갖춰야 할 것이 많다. 특히 나 같은 흙수저는 더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남들만큼’이란 '아이가 있는 남들만큼'이었다. 아이를 빼고 보니 금전이든 번듯한 직업이든 남들만큼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유가 많이 생겼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개인적인 편이었다. 지금도 당연히 그렇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관대해지고 여유가 생겼다. 오히려 부모님, 동생들, 친구들처럼 이미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날 서지 않고 더 여유롭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3. 내가 원하는 것을 부담 없이 할 수 있다.


여가시간을 좋아한다. 여행, 요리, 산책, 운동, 사색과 같은 것 말이다. 만약 아이가 있다면 어느 것 하나 원하는 만큼 할 수 없다. 아이가 갈 수 있는 곳으로 여행가야 하고,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아이가 어리면 함께 산책하거나 나를 위한 운동 시간을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사색까지는 상상조차 넌센스다.


요즘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을 보며 집 앞 전원주택 부지에 새 집 공사는 얼마나 진행됐는지 체크하고, 어떤 집이 될지 상상하고, 그러다 됐다 싶으면 운동을 하거나 요리를 하는 잔망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 사태 전에는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배우고, 가끔 친구와 약속을 잡아 만났다. 이런 일들 하나하나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상황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미 식사를 하고 배가 부른 사람에게는 아무리 산해진미를 준다고 해도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아,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에게 아이란 디저트와 쁘띠 푸르, 커피까지 충분히 먹었는데도 “이건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서 한 철만 나는 허브로 만든 귀한 디저트야. 한 번 먹어봐. 소화불량에 걸릴 지라도 지금 안 먹으면 후회할걸?”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난 "생각해주신 말씀은 고맙지만 전 괜찮아요. 사양하겠어요.”라고 하겠다. (남편은 이런 말을 듣는 느낌이라고 한다. “여기 서울 연남동에서 아주 유명한 커리집인데 좀 비싸긴 해도 맛있고 분위기도 끝내줘. 주말에 가면 줄을 한 시간 씩 서야 하긴 하는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대전에서 가려면 멀긴 하겠지만 한번 시간 내서 꼭 가봐야 해?” 힘들게 거기까지 가는 대신 우리는 보통 집에서 피코크 인스턴트 커리를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해보지 않고는 몰라. 그러다 분명 후회할 날이 올 거야.”라고 누군가 계속 도발한다면 나도 도발적으로 "아이가 주는 행복감이 그렇게 크다면 왜 2명만 낳고 멈추나요? 그렇게 좋으면 계속 낳아도 되잖아요."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두세 세대 전만 해도 자식을 10명씩은 낳다가 점차 줄어 요즘은 1~2명을 낳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아이가 주는 행복이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 감당해야 할 기회비용은 시대와 개인에 따라 다른 것이다.  


내 그릇은 이 정도이다. 아무리 그게 다른 종류의 맛이라도 나는 배부르다. 내가 아는 차원의 행복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친다.  

작가의 이전글 돈이 별로 안 드는 시골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