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된 지 2개월째의 일기
습관처럼 베란다 창밖을 바라보니 아침부터 촉촉하게 비가 온다. 어제부터 태풍 타파의 영향권이다. 부산을 스쳐가므로 남부 지방엔 피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내륙에는 비만 올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비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운치 있다며 햇빛 쨍한 날보다 비 오는 날을 더 좋아한다지만 난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우산을 쓴들 신발은 무조건 젖으며, 사무실에 들어갈 때는 우산을 털고 널어놓아야 하고, 화장실 가서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도 여전히 축축하다. 그뿐만 아니라 실내에서도 군데군데 흥건한 바닥, 축축한 공기, 어두운 조도 등등… 생각만 해도 더럽고 축축하고 번거롭다.
그랬던 내가 백수가 된 지금은 왜 비를 보며 기분이 좋을까? 집에만 있기 때문은 아니다. 워낙에 실내에만 있을 때도 어둡고 축축해서 비 오는 날을 싫어했고, 심지어 오늘은 엄마 생신 기념 식사로 외출할 일정도 있다. 결국 내 안의 변화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흔히 여자들은 쇼핑을 좋아한다고들 하지만, 난 쇼핑을 싫어하는 쪽이다. 항상 눈에 띄는 걸 바로바로 사는 편이고, 특히 살게 없는데 하는 아이쇼핑이란 건 지루하다.
그렇다. 난 다분히 목적 지향적인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비를 싫어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목적 지향적인 나는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데 비가 그걸 방해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회사에 출근하거나, 집으로 퇴근하거나, 운동을 가거나, 모임을 하거나, 혹은 집에서도 환기를 시킨다거나, 청소를 한다거나, 등등…
크든 작든 항상 다음에 해야 하는 태스크가 있어서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비는 나를 방해하는 존재라고 느껴질 수밖에.
오늘은 주말이라 회사원이었을 때에도 어차피 쉬는 날이고, 오후에 가족 모임이 있으므로 일정도 있는 날이다. 회사 다닐 때와 외적으로는 차이가 없는 날. 그럼에도 지금은 비 오는 게 좋다. 운치 있게 느껴진다. 내 마음까지 촉촉해지는 것 같다. 마음의 여유가 사람을 이렇게 다르게 만드나 보다.
하면 좋고 안 해도 좋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없는 상태. 이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다르게 만드는 것 같다.
지금의 기분을 잘 기억해 둬야겠다. 지금은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지만 앞으로 내 삶에 어떤 일들이 닥쳐올지 모른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같은 게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도록 하자.
Photo by Kira auf der Heid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