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모습도 때로는 나인걸.
여행, 아름답다. 두번째이야기.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정신없이 자다가 세 시간 만에 일어났다. 이상하게 새벽부터는 다시 잠이 오질 않았다. 피곤한 상태로 호텔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는데 식당 입구에 매우 큰 일리 커피잔이 있었다. 나는 평소 일리 커피만큼 일리 커피 로고를 너무 좋아했기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여행지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 현지의 음식보다는 평소처럼 커피를 마시며 빵을 곁들여 먹는 것을 좋아한다. 호텔의 조용한 분위기와 깔끔한 조식 메뉴가 피곤함을 가시게 했다.
오늘 계획은 수현을 만나서 점심을 먹은 후에 한국에서 미리 예약한 대만 천섬·핑린 차밭 투어를 가는 것이다. 조식을 먹은 후 은지는 호텔 주변 카페에 가고 나는 호텔에서 쉬었다.
“나 핸드폰 잃어버린 것 같아.”
호텔로 돌아온 은지는 심각한 상황에 비해 담담한 목소리로 물건을 뒤지며 말했다. 몇 번 방을 뒤지고 호텔 로비에 다녀왔는데도 없다고 했다. 나는 왠지 은지의 담담한 모습을 보니 핸드폰이 주변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역시나 다시 찾는 과정에서 은지의 작은 보조가방에서 핸드폰을 발견했다. 아침에 해프닝을 겪으면서 마침 지금 여행이 얼마나 평온한지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때 우리는 수현을 만나 훠궈를 먹었다. 학교 가는 길에 식사하러 들른 수현은 마치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서 나는 수현이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다. 평일이었고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었기에 우리 주변은 자연스럽게 대만 현지인들로 채워졌다. 나른함과 평화로운 느낌 가운데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수현이와 헤어져 버스 투어 모임 장소로 갔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편의점을 가려는 찰나 여행 지원금을 받은 이지카드가 지갑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직 여행 지원금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정말 잃어버렸으면 어떡하나 걱정되었다. 호텔 방에 흘렸을 거 같은데 아니면 어쩌나 이런 답답한 추측만 머릿속으로 반복하다가 이렇게 계속 이지카드를 신경 쓰면 현재 여행을 놓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에게 말하듯 은지에게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하나 반드시 잃어버려야 한다면
이지카드를 잃어버리는 게 가장 나아.”
차밭 투어는 은지의 제안으로 예약한 것이었다. 버스에 탑승한 후 버스투어를 하는 여행객 중 한국인이 우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싱가포르, 하와이, 프랑스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을 상대로 투어 가이드 재키는 영어로 쉬지 않고 설명했다. 버스에서 좀 쉬고 싶었기에 선글라스를 끼고 눈을 감은채로 있었다.
천섬에 도착하여 여행객들과 걸을 때 싱가포르에서 온 여자분이 나에게 KOREA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았는데 이것이 남한과 북한을 말하는 것인지, 서울에서 왔다고 해야 하는지 잘 몰라 둘 다 대답했다.
핑린 차밭은 애초에 내가 보성 녹차밭 같겠거니 막연히 생각했던 게 어이없을 만큼 화려한 경관을 자랑했다. 에메랄드빛 호수에 아기코끼리가 누워있는 모양의 섬이 내려다 보였다. 이 호수는 타이베이의 식수로 사용된다고 한다. 날씨가 너무 더운 것만 빼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재키는 능숙한 가이드답게 포토 스팟을 찾아 높은 곳에 올라갔다. 일행마다 사진을 찍는 시간이었고 여러 번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어 주길래 우리도 여러 가지 포즈를 취했다. 그런데 재키는 사진을 다 찍고 웃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는 정말 한국 사람이 맞구나.(ㅋㅋ)”
우리의 포즈가 그동안 한국인 버스 투어 여행객만의 포즈와 같았다는 말을 이해한 우리는 폭소를 터뜨렸다.
이날 투어에 참여한 여행객 중 많은 수가 먼 나라에서 온 백인 여행객이었다. 나중에는 둥글게 앉아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피고한지 슬슬 눈이 감기다가, 차를 마실 때만큼은 또렷하게 반짝거렸다. 먼 나라에서 와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 마시는 법을 배우는 여행자들이 왠지 모르게 참 선한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버스투어가 끝나고 우리는 ‘타이베이 101 빌딩’ 앞에서 내렸다. 나는 이 빌딩에 대해서 타이베이의 랜드마크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난 대만 여행 때는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었다. 평소 나는 여행지에서 누구나 가는 곳에 가서 사진을 찍는 것이 왠지 식상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타이베이 101빌딩’앞에 도착해 그 빌딩을 올려봤을 때 서울에서 본 그 어떤 건물보다도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아름다움보다는 화려한 불빛과 큰 규모에 압도당하는 무서움에 가깝기도 했다. 빌딩 앞은 크리스마스가 미리 온 듯 화려한 불빛 조명을 달아 놓은 가로수와 조형물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LOVE’ 조형물 앞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내 선입견과 달리 거리의 사람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즐기듯 전형적인 장소에서 전형적인 사진을 찍는 것도 즐거웠다.
저녁 식사는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온 ‘키키레스토랑’에서 했다. 그곳은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기로 유명한 식당으로 손님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QR코드를 출력한 바우처를 들고 안내 데스크에 자꾸 기웃거리니까 레스토랑 직원이 익숙한 듯 조금만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내가 도착했다고 어서 말하지 않으면 내 권리를 놓칠 듯 조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다리면서 방문하는 한국인들을 구경(?)하는데 다들 아까의 나처럼 성격이 급해 보였다. 이곳 직원들은 매일 한국인들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아주 조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거 같았다.
‘키키레스토랑’에서 유명한 연두부튀김은 한국에선 쉽게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고 너무 맛있었기에 우리는 역시 유명한 데는 이유가 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식사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버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에 왔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내겐 더 이상 이지카드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걱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행을 준비하며 시달렸던 이미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이제야 놓아지는 걸까. 무엇이든 내 삶을 통과해서 그냥 지나가기를.
도착 후 나는 패브릭 쇼파의 방석 틈에서 이지카드와 내 신용카드 몇 개가 쏟아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