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철을 맞이하여 언니와 조카들이 우리 집에서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오후였다. 그때 당시 둘째 조카는 갓 말하는 법을 배워가는 어린 나이였다. 나를 “이모”라고 부를 때면 신기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날 조카와 나는 우리 집 거실 바닥에서 함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문득 그날이 언니네 가족이 서울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조카에게 “강현아, 오늘이 마지막 날이네. 내일 할머니 댁 가서도 물놀이하다 다치지 말고 재미있게 놀아.”라고 혼잣말하듯이 말하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조카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아무 말 없이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정한 그 표정을 보고 나는 미소 지으며 “으응?” 하면서 조카의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이렇게 작은 사람에게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그 따뜻한 눈빛을. 그런 후 그 아이는 자그마한 양팔을 벌리더니 나를 안아주는 것이었다. 적막한 거실에서 아이에게 한참 안겨있자니 어색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언니가 조카를 안아주던 모습이 떠오르며 아이는 자기 부모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서 나에게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날 누군가를 먼저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훗날 그날의 눈빛과 포옹을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종종 떠올리곤 했다. 그렇게 둘째 조카는 나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상징하는 사람이 되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기에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만날 때마다 섬세한 남자아이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린아이에게도 바다같이 깊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면이 있어서 나는 그 아이를 한없이 사랑했다.
이후 언니는 일하기에 더 좋은 환경을 찾아 가족과 함께 살던 대구를 떠나 혼자 전라북도 완주로 이사하였다. 언니는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두 아이를 한 달 동안 완주 초등학교에서 다니는 체험을 시켰다. 큰 조카는 한 달 후 대구로 돌아갔지만 둘째 조카는 그 체험을 계기로 완주가 자기가 살아갈 곳임을 확신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후 대구에서 완주로 전학하게 되었다.
언니네 부부는 아이의 선택을 존중했고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대구를 떠날 수 있는 조카의 강단에 감탄했다. 시간이 흐른 후 완주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니 둘째 조카는 완주 아이들의 웃음이 마음에 들어서 그랬다고 답했다.
가장 최근에 조카를 만난 것은 올해 5월 언니가 아파트에서 텃밭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며 완주 집으로 나를 초대했을 때이다. 언니 집에 갔을 때 조카는 완주의 공동 육아를 하는 모임에서 하는 행사에 갔다고 했다. 아무 말 없이 찾아가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행사장에 방문했다. 행사장은 폐교를 아름답게 개조한 건물이었고 그 근방 도시에서 살다가 귀촌한 젊은 부부들과 아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멀리서 조카를 발견했을 때, 조카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 아이들을 닮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