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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일리 Jul 23. 2023

수영장 빌런, 수영을 사랑하기까지

-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아주 긴 여정을 거쳐 드디어 이곳에 왔노라고.

세상 사람들을 물을 좋아하는 사람과 물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나누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후자 쪽으로 후다닥 뛰어가서 줄을 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매년 여름마다 해운대 해수욕장 개장 소식을 알리는 뉴스나 캐리비안베이에서 노는 인파들을 티브이에서 볼 때면 그 바글바글한 번잡함이 싫어서 채널을 돌리곤 했다. 그때마다 왜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나는 즐거워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몇 번 물에 빠졌기에 물을 싫어했던 데다 신규 임용자 교육생 때 있었던 일로 완전히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다. 그 일은 강원도 내린천에서 래프팅을 하던 중 일어났다. 나는 어깨동무하고 뒤로 입수하라는 말에 뭣도 모르고 뒤로 넘어갔다가 물에 빠졌다. 혼비백산한 채 ‘아 나는 지금 죽기 싫다’며 발버둥을 쳤다. 분명 그때 물속에서 바라본 하늘은 마치 저승길로 가는 길로 보였다. 발버둥 치다가 건져내진 후 내리 열몇 시간을 잤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나는 물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8년 후 늦봄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직장 동료가 수영장에 같이 다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물이 너무 싫다고 거절했지만 그녀는 수영하는 법을 배우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더 얻는 거나 같지 않겠냐며 나를 설득했다. 결국 설득에 넘어가 수영장을 등록했다. 실은 물에 빠진 후 시간이 꽤 지났기에 별생각 없이 등록한 것이었다.



첫 수영 수업에서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았다. 나랑 비슷할 줄 알았던 초급반 사람들은 파란색 혹은 노란색으로 되어있는 얇은 판을 들고 자연스럽게 물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팔을 저으며 자연스럽게 수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머리를 물 안으로 넣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물을 향해 머리를 숙이려고 시도할 때면 본능적으로 공포감이 들었다. 나보다 열 살은 어린 수영 강사는 내 속도 모르고 내가 수영복을 입고 수영하는 게 부끄러운 것으로 오해했는지 그런 걸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다는 둥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난 그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싸우느라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나는 수영장 한 모서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첫 수영 강습을 마쳤다.

이틀 후 두 번째 강습 시간에 내가 나타나자 다른 회원들은 내가 다시 수영하러 왔다는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물속에 머리를 넣는 연습을 하느라 사람들 눈치를 볼 틈이 없었다. 머리를 물속에 넣고 이리저리 관찰했다. 수경을 통해 수영장 바닥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만일 내가 스노클링을 하며 바닷속 물고기와 해초를 볼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수영을 하고 싶다!’는 기대가 피어올랐다.


어떤 강사들은 내가 금방 그만둘 것 같다거나 수영을 배우기까지 아주 오래 걸릴 것이라는 부정적 견해를 대놓고 표현하곤 했다. 그때 내 관심사는 오로지 몸을 물에 띄우는 것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앞에 ‘칭찬 요정’이 나타났다. 새로 온 선생님은 내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줬다.

“회원님은 자세는 좋으시니까 몸에 힘을 빼면 좋으실 것 같아요.” 

그동안 수영하는 사람들 진로를 방해하는 수영장 빌런 취급을 받다가 칭찬을 받으니 힘이 났다. 나는 새로 온 선생님의 응원 덕분이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물에 뜨면서 자연스레 수영을 할 수 있었다. 어느 회원이 ‘이제 라인으로 나오셨네요.’ 축하해주었다. 한 단계 나아가니 다음 단계를 마주해야 했다. 그런데 나의 한 단계는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매우 세분화된 단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단 물에는 떴는데 수영을 하다 보니 물에서 어떻게 멈춰 서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저를 좀 잡아달라며 부탁해서 수영을 멈추었다. 집에 돌아와 물에 떴다가 내려오는 법을 유튜브로 찾아보았다. 이런 것도 있을까 생각했지만 친절한 수영 유튜버들은 나 같은 초보를 위해 많은 동영상을 남겨두었다. 그렇게 그 해 여름은 선생님과 유튜브의 조력을 받아 수영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되었을 때 나는 수영장 갈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 인생 처음으로 물에 가볍게 뜨는 느낌이 재미있었고 일상과 동떨어진 수영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새로움이 나날이 커졌다. 나는 주 3회 반이었지만 추가 비용을 내고 나머지 2회는 자유 수영을 다녔다. 직장 컴퓨터 바탕화면은 너무나 평화롭게 수영을 하는 모델 사진으로 해두니 근무시간에도 수영을 하는 기분이었다. 중간 중간에 물을 가르는 손짓을 상상할 때면 더위를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여전히 수영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못하던 운동을 노력으로 할 수 있게 된 사실이 내 삶에 큰 활력소가 되었다. 특히 수영을 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 상상도 하지 않았기에 기쁨은 더 컸다. 

매일 퇴근 후 수영장을 가는 나를 보며 직장 동료들은 내가 굉장히 수영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지만 굳이 나서서 그 오해를 바로잡아 주진 않았다.  새벽 수영을 할 때 창밖으로 떠오르는 햇빛이 물속으로 비춰올 때 너무 아름다웠다는 누군가의 말을 들었다. 그 말에 매료되어 동네에서 새벽 수영을 다니게 되며 수영과의 인연은 그 이후로도 꽤 이어졌다.


그해 여름, 수영을 배운 기억은 물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의미도 크지만 내가 ‘수영장 빌런’역할을 맡았던 게 시간이 흐른 후에 재미있게 추억된다. 수영장이라는 새로운 무대 위에서 사고뭉치지만 결국 고지에 도착하는 빌런 역을 완벽하게 수행한 배우로서 행복했다. 비록 몇 년 후 늦은 나이에 운전면허 따기에 도전하며, 엑셀을 브레이크로 착각하는 등 모든 시행착오를 겪으며 다시 빌런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올여름은 한동안 멈추었던 수영을 더 배워볼 계획이다. 구체적인 목표는 그때 배우다가 멈춘 평영을 다시 마스터하는 것이다. 그리고 멋진 바다가 있는 장소로 스노클링을 하러 갈 예정이다. 그때 바닷속 친구들과 만나서 꼭 말하고 싶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아주 긴 여정을 거쳐 드디어 이곳에 왔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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