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버금 Aug 11. 2023

추신. 이곳에서는 애써 모두가 잘 있다고

[프롤로그] 한 사람을 위한 제주 편지 가게






8년 만이었나 봅니다. 다시 제주에 온 건요. 8년 전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제주에 살고 싶어 왔다는 것이에요. 새삼스럽게 그 말을 이 편지에 써보면서 '살고 싶다'와 '살아보고 싶다'의 사이를 잠시 가늠해 봅니다. 감은 눈을 뜨면 2년 전의 어느 여름, 그 사이에 내가 보이는 것 같아요.


우리, 오랜만이지요.


나는 있어도 장소가 없고, 장소가 있어도 그곳에 나는 없을 때가 많아서, 그 둘을 찾아 아무 연고 없는 제주에 왔어요. 벌써 2년 전 일이에요. 처음 제주에 오고 몇 달은 바다와 숲과 돌담을 따라 내리 걸었어요. 그 길이 끝날 무렵, 제주가 나에게 곁을 내주었고요. 무어라 설명할 순 없지만 이곳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몸보다 먼저 자리를 잡았어요.


그렇게 자리 잡은 작은 마을에 집을 얻어 살기 시작했지요. 그러다 이듬해, 너른 귤밭이 보이는 소담한 공간을 운명처럼 만났어요. 주위에 상가도 상권이라 부를 만한 곳도 없어 장사하기에 영 아니었지만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가진 모든 돈을 털어 계약을 했어요. 하하, 글쎄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요. 그저 내가 이 풍경에 첫눈에 반했듯, 나처럼 이 풍경을 좋아해 줄 한 사람만 와주어도 좋겠단 마음이었어요.


얼떨결에 계약한 공간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니, 사랑을 주는 공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였는데도 나는 반대로 마지막을 생각했어요.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나는 이곳이 어떤 곳으로 기억되길 바랄까, 하고요. 이곳에서 만큼은 누구도 외롭지 않은 위로가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어요.


아주 오랜 생각 끝에 이곳에 편지 가게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람과, 사람의 삶을 이야기로 잇고 싶었기 때문에요.




이 편지에는 단 한 가지 목표가 있었지.
우리의 삶을 결산하는 것.
네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과정을 이 글을 읽을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

이 글이 너의 재능, 너의 취향, 너의 명민함,
너의 다정함, 너의 부드러움, 너의 힘,
너의 용기, 너의 순수함, 너의 아름다움, 너의 시선, 너의 청렴함, 너의 정직성,
너의 고집과 욕구를 보여주기를.
너를 걸을 수 없게 했던 그 거인의 날개를.

- 피에르 베르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눈 내리던 12월에 열었으니 운영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반년이 넘었네요. 세 계절이 지날 동안, 나는 이곳에서 많은 얼굴들을 보았습니다. 카운터에 서서 바라보는 그들은 모두 명랑한 얼굴로 들어오고 명랑한 얼굴로는 미처 다 읽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편지에 털어놓고 떠나곤 해요. 나는 그들이 앉았던 자리의 방석을 정리하며 한 사람이 머문 온기는 얼마나 오래 남는지에 대해서 종종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단 몇 분만에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일지라도요. 그 사이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오고, 그 사람이 다시 자리에 앉고요.


그렇게, 우리는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찾아와 남기고 간 편지를 읽으며 다시금, 제주에 살고 싶어 왔다는 말을 떠올립니다. 어쩌면 한 사람이 어딘가에서 살고 싶어지는 데에는 실은 다양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는 진실에 대해서요.


그저 편지를 적어 보낼 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편지에 적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그 두 가지만으로도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살아지기도 한다는 것을요.


몇 백 명의 손,

몇 백 통의 편지,

몇 백 가지의 삶.


고스란히 이야기가 쌓이던 지난 몇 달, 나는 생각했습니다. 가을이 오기 전 이 이야기들에게 답신을 쓰기로요. 그 첫 시작으로 오늘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적어 보낼 준비를 하고 있어요. 다음 주에 도착할 이 편지는 아마도 이런 말로 시작하겠지요.



'잘 지내나요?'



어느 꼬마 손님의 편지
1월 1일의 편지



추신.


잘 지내나요?

당신에게 안부를 물으며 문득

나의 안부를 덧붙입니다.


이곳에서는 애써 모두가 잘 있다고.

잘 있기 위해, 소리 없이 분투하고 있다고 말이에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

23년 8월 12일,

이립에서.

김버금 드림.





* 편지를 쓰는 동안 들었던 노래를 소개합니다. 당신도 부디 좋아하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mcdO9UP0hp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