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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금 Aug 18. 2023

그래도 우리는 편지를 쓰겠지

<첫 번째 편지> 안녕, 나 자신. 잘 지내?


언제 어디에 있을지 모를 미래의 나에게




  To. 수신인 이립

  From. 발신인 알 수 없음


  안녕, 나 자신. 잘 지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전혀 짐작이 안 되지만 어떤 상황이든 즐거운 일상을 지내고 있기를 바라. 나는 기억력이 안 좋으니까 지금 2022년 연말의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남겨두려고 편지를 써 봐.

 

  오늘은 추위가 잠시 물러가서 따뜻하고 맑은 겨울날이야. 가뜩이나 역치가 낮은 나인데 여러가지 거리가 한 번에 몰려와 조금은 정신이 없어. 좋은 일은 친구들과의 연말 약속과 가족과의 여행 계획이 있다는 거고 나머지는 그닥 기쁘지는 않은 일들이네.


  아빠가 친 사고 수습의 일환으로 본가에 다녀오고, 이력서를 작성하고, 전세 대출 연장 신청도 해야 해. 이제 정말, 정말로 나의 유예기간의 끝이 다가와. 나는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고 싶은 걸까? 웬만하면 그 기간의 끝까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 사서 고민하는 나라서 머리를 비우기는 쉽지 않지만, 그냥 책 읽고 또 읽고 다음 책을 읽고 먹고 걷고 요가하고. 그것만으로도 충만한 하루를 보내. 닥치면 뭐든 하게 되겠지. 고민도 그때 가서 하려고.


  남들이 보기엔 아닐지라도 많은 게 달라진 올해야. 담배도 끊고 혼술도 끊고 요가도 시작했어지. 바뀌기 전엔 상태가 그렇게 나쁜지도 몰랐었는데 아주 많이 다르더라. 올해가 지나기 전엔 놓치지 말고 건강검진 해야 하는데, 작년에 비해 훨씬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 (모든 수치가 정상범위에 들었으면!)


  작년 이맘 때쯤만 해도 내가 이렇게 바뀔 수 있을지 몰랐어. 바뀌려는 생각도 안 했었지. 항상 막연한 언젠가로 미뤄만 뒀지. 주변에서도 다들 신기해 해. 그치만 변하고나니 정말 좋아. 술 없이도, 시간을 보낼 방법은 무궁무진하고 재미있게 놀 수 있더라. 두통도 사라지고, 아침이 이렇게 상쾌할 줄이야.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돼?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지 않게 살았을지도 모르니 이쯤에서 멈춘 나를 칭찬해주려고.


  그러니까 지금은 이렇게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더라도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지. 나는 나를 대부분은 모르지만 조금은 알아. 나는 큰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아주 작은 걸로도 충분해. 나 자신의 속도에 맞춰 가자. 그 속도로 무엇이든 일단 시작하기를.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잘하고 있으리라 믿어. 꼭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 네가 그럴 수 있길 나도 노력하고 있을게.


 2022년 겨울.

 나에게, 내가.



  To. 익명의 사람에게


  당신이 보낸 편지를 이곳에서 나는 읽습니다.


  편지는 보내는 장소와 받는 장소가 다르고 쓸 때의 시간과 받을 때의 시간이 달라서. 어쩌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지나간 일의 안부를 뒤늦게 묻는 것이 편지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지요.


  편지 속 당신이 있던 계절을 떠올리며 이곳의 겨울 사진을 찾아봤어요. 창 밖에 늘어선 키 작은 나무들이 보이나요? 꼭 노란색 전구를 켜둔 것 같은, 샛노란 귤 나무들이요.


  겨울이면 아무 생각없이 무심코 집어먹던 귤이 실은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싸우며 열린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나는 이곳에 와서야 처음 눈으로 확인했었지요.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린 귤, 세차게 내리는 눈발을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매달려있는 귤을 보느라 하루가 가버린 적도 있습니다. 고작, 귤 한 알을 보느라고요.


  그렇게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고 가고 이제는 여름이 가고 있네요. 세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당신은 잘 있었나요?

  아니, 있었나요?


  '잘' 같은 수식어는 내려놓고 묻고 싶어요. 귤이 그래왔던 것처럼. 당신이,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있어왔는지를요.




아빠가 친 사고 수습의 일환으로 본가에 다녀오고,
이력서를 작성하고, 전세 대출 연장 신청도 해야 해.
이제 정말, 정말로 나의 유예기간의 끝이 다가와.
나는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고 싶은 걸까?


  언젠가 봄이었어요. 이제는 귤이 다 떨어져 빈 나무가 되어버린, 귤나무 옆을 지나가는데 못 맡아본 꽃 향기가 나는 거예요. 귤밭 할머니께 여쭤보니 귤꽃 향기라고 하시더군요. ‘가까이서 맡아보멍 귤꽃에서 귤 냄새가 나야.’ 손짓하시며. 이 향기는 지금이 아니면 맡을 수 없다고, 정말로 아주 잠깐이라고.


  귤꽃이 피는 시간은 2주 남짓, 그 짧은 시간 안에 귤은 그 다음을 준비해요. 그 시기가 지나고 나니 정말로 잎사귀 사이에 숨은 푸른 귤이 보이더군요. 그때 알았어요, 누가 알아봐주지 않아도, 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 모습대로 있었단 걸. 열매를 맺는 겨울까지 자신의 시간을 유예하지 않는다는 걸. 어떤 시간이든 온몸으로 맞이한다는 걸.


  나중을 잘 지내기 위해 오늘 유예한 것들이 많아요.


  만일 시간이라는 게 없다면 나는,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물리적 공간도 엇갈린 시간도 모두 무용해지는, 이 편지지 크기의 작은 공간 안에서 만큼은.


  그렇게 된다면 나는 오늘 당신이 행복한지 묻고 싶어요.

  다른 날이 아닌, 바로 오늘이요.


지금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의 모든 시계가 멈춘다면. 아무도 숫자를 셀 수 없게 된다면. 해가 지지 않는다면. (...)

서로의 일정이 맞지 않아서 오랫동안 만나지 만나지 못할 때에도, 나는 우리가 또 만날 거라는 걸 알았다. 아무리 만나기 힘들어도. 우리는 만날 것 같아. 그 사실이 내게 힘을 줘.

시간을 알려주는 것들이 모두 죽는다면. 일단 어디서 만날지만 정하자. 2층에 발코니가 있는 카페에서 만나자. 해가 지지 않아서, 세상이 엉망이겠지. 사는 게 힘들어지겠지. 그래도 우리는 시를 쓰겠지.

<만나서 시 쓰기>, 김승일


  세상의 모든 시계가 멈춰 지금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면, 그래서 언제쯤을 기대하며 더이상 나의 행복을 유예하는 게 조금도 상관 없어질 때가 온다면. 그때 나는 김승일 시인의 이 글을 적어 당신에게 보내겠어요.


'어디서 만날지만 정하자.

2층에 발코니가 있는 카페에서 만나자.

해가 지지 않아서, 세상이 엉망이겠지.

사는 게 힘들어지겠지.

그래도 우리는 편지를 쓰겠지.'


어쩌면 여전히

세상은 엉망이고

사는 건 힘들어지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이에요.



23년 8월 18일에.

이립에서.

이름을 모르는 당신에게, 김버금 드림.



* 편지를 쓰는 동안 들었던 노래를 소개합니다. https://youtu.be/j2W12WFKd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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