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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 Feb 14. 2019

회색분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회색분자라는 말은 꽤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단어이다. 말 그대로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사람이라는 의미로, '회색'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줏대가 없고 어떤 이슈에 대하여 확실한 경향성이 없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 국어사전에는 "소속, 정치적 노선, 사상적 경향 따위가 뚜렷하지 아니한 사람을 말한다."라고 나와있다.




짙은, 흑백의 기억

만학도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그런 나이에, 남들보다는 다소 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나는 순진하게도 캠퍼스의 낭만이라던가, 전공분야에 대한 열띤 토론 같은 지극히 이상적인 대학생활의 기대감에 휩싸여있었다. 비록 현실은 전혀 달랐지만. 겨우 학교에 적응하려던 즈음, 국립학교였던 탓에 새로 바뀐 정권의 영향과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제대로 휩쓸리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총장은 외압에 의해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사직을 종용받고 있었고, 일부 학과들은 그 존폐를 걱정해야 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학교 곳곳은 교수 및 학생들의 대자보로 뒤덮였고, 교수들 사이에도 파가 나뉘는 마당에 학생들 사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 틈엔가 소위 말하는 '의식 있는', '깨어있는' 교수와 학생들은 어느 한쪽 편에 서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의미로 국한되었고, 그에 대한 반대의 입장에 있거나 어떤 입장도 표명하지 않고 침묵하는 사람들은 다수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참을 수 없이 비겁한 '적'이 되었다. 그때의 내가 본 일련의 상황들은, 분명 부당하고 정치적인 의도성이 분명한 것이기도 했지만, 일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 역시 없지는 않았던 터라 '어느 방향으로든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늦게 들어간 만큼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싶었고, 좋은 학점을 받고 싶었고,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는 문제에 대해서 학업을 접어놓고 무턱대고 어느 한쪽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선적인 활동을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결국 대다수가 생각하는 의견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던 나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일부 학생들은 대놓고 나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나는 점점 더 교우관계가 힘들고 버겁게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졌던 경멸과 압박감은 - 어쩌면 내 안에 존재하는 의기소침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 결국 또 다른 정치적 폭력으로 다가왔다. 결국 대학생활에 대한 내 천진난만했던 이상은 보기 좋게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조기졸업으로 학교를 도망치듯 벗어나기 전까지 하루하루는 무겁고 답답한 어둠 그 자체였다.




당신이 믿는 것과 내가 믿는 것 사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진리와, 절대악과 절대선이 있다고들 한다. 아니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솔직히 말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 오히려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냐고. 나는 아무래도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다. 책을 많이 읽으면, 많은 공부를 하면, 많은 사건을 겪고 많은 세월을 살면, 보다 현명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다양한 경험이 쌓일수록 오히려 모르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질 뿐이었다. 굳이 내 기준의 현명함이 뭐냐고 묻는다면 더 많은 다양성과 대안적 방안들에 대해 편협하지 않은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밖에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가, 어떤 이에게는 돈이, 어떤 이에게는 명예가, 사회주의가, 과학이, 사랑이 그 신념이 된다. 그것은 그들의 배움과 환경과 경험과 추구하는 가치관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정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작정 배제할 일도 아니요 무조건 혐오할 일도 아니다. 세상은 흑백논리로 규정하기에 너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켜있다. 세상에 산재한 사회적 이슈들은 저마다 독립적이기보다는 다른 사회적 이슈들과 복잡하게 관계를 맺고 영향을 끼치고 받고 있고,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보수냐 진보냐의 단순화된 구분법으로 개념화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페미니즘이라는 것도 그 기원과 발전과정을 따라가 보면 그렇게 간단한 개념도 아니고, 페미니즘을 표방한 유사 이론들은 마치 기독교의 종파가 수십 개로 분리되듯이 저마다의 신념에 따라 다양한 방향과 이미지로 재편되고 소비되고 이용된다. 남혐 여혐이라는 개념도, 세대 간의 불통의 문제도, 점점 분자화 되어가는 개인주의도 결국은 과열된 신념에 대한 피로에서 오는 반작용이 아닐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어떤 문제가 당면한 상황이나 한계, 그리고 기회비용에 따라 내 의견이 가변적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일종의 신념이라면 신념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색분자라는 말은 결국 흑백논리의 이분법적 가치관에서 파생된 부정적 의미의 단어이다. 그러나 이분법적 가치관이 위험하고 폭력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의 입장에서 회색분자야말로 세상의 밸런스를 위해 꼭 필요한 긍정적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다 해서 양비론, 양시론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쪽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할 문제들이 있고, 그래야만 개인도, 조직도, 국가도, 사회도 더 나은 방향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일수록 보다 신중하게 다양한 방향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회색층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으며 충분히 유의미한 입장의 존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캐스팅보트인 회색의 영역에서, 우리는 서로를 혐오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해 볼 화두를 찾을 수 있고, 가치판단에 대해 보다 덜 폭력적인 대안을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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