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 시대의 바캉스
예약해 둔 여행 날짜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베트남 푸쿠옥으로 떠나는 4박 5일의 여름휴가였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푸쿠옥 여행자 카페를 들락거리며 과연 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 맞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젯밤 남편에게 의견을 물어봤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건성의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비? 비 오는 대로 놀면 되지. 어차피 우린 리조트라며.”
“비가 동남아 우기 보통 때처럼 오는 게 아니래. 그러니까 스콜처럼 잠깐 세게 내렸다 그치는 게 아니라 폭우가 주구장창 계속 온대. 다들 호텔에 갇혀서 즉석밥에 컵라면 먹고 보드 게임하고 있다는데?”
“그래? 어떡해야 하나? 자기가 잘 판단해봐.”
가지 않으면 비행기 값과 호텔비를 합쳐 20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날리게 된다. 간다면 5시간 반의 비행을 견디며 베트남까지 간 후 호텔 안에 콕 박혀서 이리 누웠다 저리 앉았다 할 것이었다. 한국에서 싸간 즉석식품과 맛을 보장할 수 없는 저렴한 호텔 음식을 며칠 내내 먹으면서, 일곱 살 남자아이의 심심해, 놀아 달라, 또는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투정을 어르고 달래며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게 될 확률이 높다. 혹시라도 비가 그친다면 좋겠지만 인터넷으로 찾아본 현지 일기예보는 우리가 머무는 목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죄다 비와 번개가 표시되어 있었다.
푸쿠옥은 베트남 최남단에 있는 섬이다. 이곳을 알게 된 것은 친구 현이 때문이었다. 두어 달 전 주말 현이가 두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왔었다. 열한 살, 일곱 살, 세 살의 아이들이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노는 동안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들의 수다가 보통 그렇듯이 아이들 때문에 이야기는 자주 끊어졌다. 현이가 얼마 전 다녀온 휴가 이야기를 꺼냈다. 지명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 응? 어디라고?
- 푸쿠옥이라고도 하고 푸꿕이라고도 하고. 거기 빈펄 리조트 풀빌라에 묵었는데 너무 잘 쉬고 왔어.
- 그래? 동남아는 바다가 예쁘지는 않던데…. 누렇고 흙탕물 색깔 같다고 해야 하나? 난 바다도 하늘도 깨끗하고 파란 데가 좋아. 괌처럼.
- 아니야. 푸쿠옥도 바다 예쁘던데? 사진 보여줄까?
현이가 보여준 사진 속의 바다는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신비로운 에메랄드 빛을 보여주는 바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머물다 올 정도는 되어 보였다. 게다가 지은 지 얼마 안 된 깨끗한 리조트와 저렴한 물가를 고려하면 매력적인 휴가지였다. 우리 가족의 이번 여름 휴가지 후보로 일단 메모해 두자. 스마트폰 메모장에 생소한 이름을 입력해 두었다.
여행이라는 점에 한해서는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매년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으니 말이다. 신혼여행부터 생각해보더라도-싱글일 때 다닌 여행을 차치하고-스페인, 하와이, 일본 오키나와, 일본 북해도,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괌, 일본 북해도까지 거의 해마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셈이다. 우리가 대단한 부자도 아닌데 말이다.
아이 친구들을 보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아이가 매주 한 번씩 듣는 생활체육 수업이 있다. 단지 내 주민체육센터를 대관해 유치원 엄마들이 아이들 조를 짜서 만든 수업이다. 그 수업에 참가하다 보면 방학도 아닌데 두어 주에 한 번은 여행을 떠나서 결석하는 친구들이 꼭 있었다. 때로는 한 주가 아니라 한 달씩 빠지기도 한다. 제주도로, 태국으로, 발리로 또 다른 어딘가로 한 달 살기를 하러 떠난 까닭이다.
가까운 해수욕장으로 물놀이 가는 것이 전부였던 내 유년기와 비교해보면 어마어마한 차이다. 그 차이만큼 아이들이 더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다. 이건 너무 옛날 사람 같은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