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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녀 Sep 05. 2022

신차오 베트남 2

기후위기 시대의 바캉스

즉석 밥 열두 개, 즉석 국 세 가지, 통조림 반찬-깻잎‧장조림‧멸치, 컵라면 여섯 개-다양한 맛으로, 봉지 김 여섯 개, 할리갈리 게임, 추리소설책과 에세이, 아이를 위한 그림책, 한글 학습지 등등. 호캉스가 될지도 모를 여행을 위해서 짐을 쌌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준비한 것은 넷플릭스에서 내가 볼 드라마와 윤우가 볼 만화 수십 편을 다운받아 놓는 것이었다. 5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말이다.

3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비행기 타는 것이 힘들어졌다. 긴 시간 동안 좁은 이코노미석에 갇혀 있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무엇보다 추락할 수 있는 이동 수단에 타고 있다는 자각이 심해졌다. 조금이라도 비행기가 흔들릴 때마다 나는 죽음을 상상했다. 이렇게 흔들리다가 추락하게 된다면, 그때 내 몸으로 느끼는 감각은 놀이동산의 자이로드롭 같은 느낌일까. 비명을 지르게 될까. 바로 앞의 의자 포켓에 있는 비상시 행동 요령 안내 책자를 꼼꼼히 봐 놓을 걸. 추락할 때면 윤우를 꼭 끌어안아야 할까. 끌어안는 게 도움이 될까. 어른인 나도 무서울 텐데 윤우는 추락이 얼마나 무서울까. 추락은 얼마나 길까, 혹은 짧을까. 운이 좋아 바다에 떨어진다면? 어차피 수영을 못해서 죽을 것이다. 육지에 추락해 비행기와 함께 내 몸이 산산이 부서진다면? 그 고통은 얼마나 클까. 산고보다 더할까. 그전에 기절해버려 의식이 없으면 차라리 낫겠다. 그런 상상이 줄을 이었다.  

20대 때는 비행기 타는 것이 마냥 좋았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기내식은 신기하고 맛있기만 했다. 좁은 좌석이 주는 고통은 기내식에 곁들여 마시는 맥주와 와인에 취해 푹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고 없었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설렘, 회사 일에서 벗어난 자유로움, 여행에 대한 기대. 젊었기 때문에, 죽음은 아주 멀리 있었기 때문에, 감히 내게 올 수 있을 거라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마음 편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예정대로 우리는 출발했다. 출발 며칠 전부터 거실에 여행 트렁크를 펼쳐 놓고 생각날 때마다 물건들을 던져 놓았다. 그렇게 짐을 쌌는데도 빠뜨린 것이 있었다. 내 화장품 가방과 목 베개를 두고 온 것이다. 화장품이야 베트남에 도착해서 싼 걸로 다시 사면 돼지만 목 베개는 공항에 파는 곳이 없었다. 새벽 비행기여서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은 탓이다. 비행기에서 편히 자기는 글렀다.

저가항공사의 비행기는 작은 선체에 승객들을 꾸역꾸역 싣고서 베트남을 향해 이륙했다. 새벽 1시 반에 출발하는 밤 비행기였지만 윤우는 아직도 눈이 말똥 하다. 평소에는 금지된 태블릿으로 만화를 제한 없이 볼 수 있으니 그 재미가 잠을 이겼다 보다. 나는 많은 아줌마들이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는, 얼굴이 하얗고 말쑥한 남자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를 1회부터 보기 시작했다. 비행기 소음이 몰입을 방해했지만 책보다는 보기가 편했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하늘을 날고 있는 게 맞는지 실감이 안 날 때가 많았다. 비행기 모양의 통속에 들어가 앉아 있다가 나오면 나라가 바뀌어 있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엘리베이터가 꼭 그랬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처음 타본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 친구가 살던 빌라에서였다. 마술 상자 같았다. 네모난 박스 속에 들어갔을 뿐인데 문이 닫히고 다시 열리면 층이 바뀌어 있는 마술. 그때에는 엘리베이터 바깥이 보이는 창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구조를 상상할 수 없었다. 강철 줄이 엘리베이터 박스를 위층으로 올리고 아래층으로 내리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행기도 그런 마술 같았다. 이코노미석 좁은 의자에 앉아 이리저리 목을 가누며 졸고 있다 보면 나라가 바뀌어 있는 마술. 내가 높은 하늘, 구름 위를 시속 몇 백 킬로미터로 이동하고 있다는 직접적인 실감이 없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의 풍경, 정면 모니터에서 보이는 비행경로. 이런 것들이야 스크린으로 쏘는 가짜 영상일 뿐이라 해도 모르는 일 아닐까.

푸쿠옥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고 했다. 출발하기 직전까지 날씨를 확인했다. 긴 비행 끝에 하강하는 비행기 선체에 어김없이 비가 후두둑 후두둑 부딪혔다. 그래, 비가 오는구나.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재밌게 노나 한 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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