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바보다. 경주 마라톤을 신청해야 되는데 공주 마라톤을 신청했다. 지금 취소도 안 되는데.”
남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마라톤 협회에서 보낸 이름표를 받아보고서야 같은 날 동시간에 접수를 받았던 신청 중에 경주가 아닌 공주 마라톤으로 신청한 걸 깨달았다. 등번호 위에 떡하니 쓰여진 충청남도, 밑에는 공주백제마라톤이 적혀있었다. 경주, 공주 모음이 많이 다른데 어떻게 그걸 착각하는지 우리는 황당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그래서 갑자기 가게 된 공주. 일요일 아침 9시에 마라톤 시작인데 우리집에서는 새벽 6시 이렇게 나가도 간당한데다 장거리 운전을 한 후 마라톤을 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전날 숙소를 잡아서 하룻밤 자고 나는 애들과 숙소에 있고 남편은 마라톤을 다녀오기로 했다. 물론 참가 취소비보다 숙박비나 여행 경비가 더 들었지만 그래도 여행간다는 기쁨을 만끽했다. 충청남도는 처음 가는 거라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들은 함께 차를 타고 공주로 향했다. 두시간 반, 140km의 장거리 여행이 시작되자 둘째는 키즈 유투브, 첫째는 요새 한참 난리인 포켓몬고 게임을 하며 차 안에서의 지루함을 이겨냈다. 차에서 어쩔 수 없지 싶다가도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내내 게임을 하는 아이를 볼 때마다 눈이 나빠지진 않을지, 뇌가 덜 발달된 4살 아이한테 치명적이진 않을지 엄마로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으니 괜히 아이를 감시하게 되고, 한숨만 푹푹 쉬어졌다. 그러다 내가 혼자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어차피 차 안에서 할 게 없는 건 아이나 어른이나 똑같은데 조금 편하게 마음먹자고 생각하며 내 주의를 돌릴 무언가 필요했다. 나는 뭘할까 고민하다 며칠 전 보다 만 넷플릭스 ‘수리남’이 생각났다. 10시에 아이들 자고 나서 보거나 설거지하며 무료할 때 이어폰 끼고 봤던 19금 시청불가 딱지가 붙은 컨텐츠였다. 애들이 자고 나서야 누리는 늦은 시간의 자유이거나 온전히 내 시간이 아닌 노동의 시간을 빌어 짬내서 하는 문화생활 수준이라 한번에 확 몰입하고 싶을 때 몰입하기가 힘든 구조였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나는 낯선데서 자면 잠을 잘 못자는 편이라 이어폰을 꼭 끼고 잠들어야 그나마 잘 자기 때문에 여행시 필수로 챙겨 다닌다. 내 가방에 있던 이어폰을 꺼내 귓구멍에 꽂았다. 온갖 리얼한 욕설과 마약 이야기들이 난무하므로 이어폰이 없었으면 보지 못했을 거다. 운전하는 남편은 요즘 포켓몬고로 공감대를 형성하며 잘 노는 큰 아이와 대화하도록 맡겨두고 나는 ‘수리남’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시간 날 때 봐서 2화정도까지 밖에 못 봤는데 본격적으로 수리남에 빠져들었다. 배우들의 연기가 얼마나 생생한지 강력한 범죄조직 앞에서 들킬까봐 조마조마한 건 주인공 뿐만 아니었다. 나 역시 거기 빠져들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밝고 맑은 동화를 보는 둘째의 화면은 휘황찬란 색깔이 화려했지만 내 화면은 거무튀튀하고 음산한 색의 조합이었다. 그런게 어찌나 재미난지. 아가들아, 세상은 이리도 복잡하고 탁한 것이란다. 이 복잡함을 이해하고 열광하는 어른의 세계는 얼마나 재밌는지 너흰 모르겠지. 물론 현실이 아니고 드라마, 영화라는 측면에서만 재밌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공주로 여행온 건 까맣게 잊고 차에서부터 본 ‘수리남’을 할 것 없는 숙소에서도 이어폰 끼고 틈틈이 보고 다음 날 대구로 오면서 쭉 다 보았다. 6회차 마지막까지!! 마지막 5,6화에 너무 집중해서 보고 피곤해서 그런지 집에 도착할 때쯤 되니 두통이 오고 속이 안 좋아졌긴 하지만 오랜만에 ‘몰입’ 이라는 대상을 찾은 것 같아 뿌듯했다. 그 덕에 아이들도 영상에 심취해서 돌아온 뒤 다시 버릇을 잡느라 고생이긴 하지만. 그래도 남편은 무사히 공주 마라톤을 완주했고, 숙소 근처도 돌아보았고, 욕실에서 물놀이도 실컷 했다. 세종에 사는 친구에게 추천 받은 공주 맛집도 가보았는데 다 성공적이라 좋았다. 주말 낮시간 평소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에 절대 볼 수 없는 19금 컨텐츠의 맛은 매우면서도 자극적인 맛이라 한층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재미있는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라는 건 아이들 못지 않게 어른들도 열광하는 부분이니까.
나는 이 수리남을 보고 새로운 결심을 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면서 재미있는, 몰입이 되는 이야기를 보면 캐릭터나 이야기 구조를 뜯어보고 이해해보려는 버릇이 들었는데 이걸 그냥 휘발되도록 두지 않고 그때 그때 글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내가 작년에 정말 좋아했던 드라마가 있었는데 본방을 보고난 후 아쉬운 마음에 네이버 TV에서 짤로 보면서 댓글을 열심히 달았었다. 그 중에서 내가 작가 의도를 열심히 분석한 댓글 몇개가 베댓에 된 게 있었다. 내 댓글에 대한 덧글에 작가세요? 이런 댓글까지. 그걸 보곤 기분이 좋았었다. 어쨌든 그때를 생각하며 내가 감상한 문화 컨텐츠 들에 대한 후기를 적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이른바 [이야기의 힘을 믿는 한 독자의 감상기] 정도의, 전문성은 없는 평범한 후기이겠지만 그래도 좋은 이야기를 창조해내고 그걸 구현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까 공부하듯 그렇게 글로 남겨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깊은 문화 콘텐츠들이 뭐가 있었나 나중에 다시 훑어보기도 쉽게 말이다.
어쨌든 엄마인 나에게도 시청할 시간, 이야기에 몰입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면서 나는 공주 여행=수리남, 또 이것이 문화컨텐츠 후기 작성이라는 새로운 목표로 발전하면서 갑작스러운 여행을 다시 나의 발전적 삶으로 승화시켰다는 뿌듯함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