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PM 19 : 26 McLeod Ganj
꼬박 밤을 새워 도착한 산 속의 마을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밤새 비가 내렸는지 축축해 보이는 마을의 초입에서 자유로운 소들이 반긴다. 한없이 편안해 보이는 소들 옆에는 산에서 막 내려왔는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는 들개들이 서성인다. 동물 친구들의 뜨거운 관심을 뒤로 하고 묵을 곳을 찾아 헤맨다. 도착한 시간이 새벽인지라 정처 없이 헤매는 두 방문객의 흙 밟는 소리만이 길가를 메운다. 크지도 않은 마을을 쥐 잡듯 뒤지다 어느 산길 끝자락의 한 건물에 들어선다. 조용한 산 속 마을에서 그렇게 반가울 수 없는 TV소리를 듣고 들어가지만 역시나 사람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입구의 탁자를 두드리고 소리를 내니 덩치 좋은 까까머리 아저씨 한 분이 나온다. 손님의 얼굴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며 두 명이냐고 묻더니 열쇠를 하나 준다. 그리고 몇 호라고 이야기하고는 탁자 위에 펼쳐진 자신의 업무에 집중한다. 열렬한 환대에 머쓱해져 열쇠에 적힌 숫자를 찾아 2층으로 올라간다. 방문을 열자 조그만 방에 침대 두 개, 탁자 하나, 의자 하나가 덜렁 놓여있다. 소박하다고 이야기 하기에도 많이 없어 보인다. 밤새 쉴새 없이 비틀거리는 버스 안에서 잠을 설친 탓에 깨끗하게 개켜진 흰색 이불을 보니 눕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다. 대충 가방을 던져두고 벌렁 눕는다.
시기는 한여름이지만 산 속이라 그런지 한기를 느끼며 낮잠에서 깬다. 10시간을 넘게 애매한 자세로 앉아 있는지 누워 있는지 몰랐던 버스 의자보다는 포근한 침대가 훨씬 편안했는지 기절한 듯이 잠이 들었었다. 간만에 푹 잠들고 일어나니 개운하다. 옆을 보아하니 동생은 아직 곯아 떨어져 있다. 여전히 머물고 있는 한기에 이불 속을 더 파고 들어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마을을 방문한 승려들이 많이 묵는 숙소라서 그런지 고요한 적막에도 왠지 모를 심오함이 묻어난다. 복도에서부터 간간히 들리는 사부작 대는 발걸음을 듣다 보니 어떤 마을에 와 있는지 새삼 되짚어본다.
한참 대입공부에 정신이 없었어야 하지만 딱히 그러지는 않았던 고등학교 생활의 끝자락에서 TV를 통해 티베트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그 단어와의 첫 만남은 매우 강렬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던 저 멀리 티베트 땅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행하며 장장 수개월 간 성지 순례를 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그저 걸어가도 힘들었을 고난의 길을 이마, 두 팔, 두 다리를 말 그대로 땅바닥에 내던지면서도 꿋꿋이 스스로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경외심 혹은 그 비슷한 모든 감정들을 자아냈다. 하늘에 닿을 듯한 고원 아래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시커멓게 탄 이마에 굳은살이 단단히 배기면서도 해맑게 웃던 그들의 모습은 티베트라는 글자를 머릿속에 각인시키기 충분했다. 그 이후로 ‘달라이라마’, 혹은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부침들에 대해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관심은 더 동해졌다. ‘티베트’는 항상 고개가 돌아가고 눈길은 가까워지는 단어였다.
그렇지만 티베트 본토는 외국인이 무턱대고 찾아가기에 현실적인 규제가 많은 곳이었고 그나마 그들의 흔적을 쫓아 갈 수 있는 곳이 지금 다다른 McLeod Ganj였다. 그 사실은 이 여정을 시작한 수많은 핑계 중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달라이라마가 세운 망명정부가 있고, 그를 따르는 망명객들이 정착한 곳에 왔다는 사실에, 멀리서만 바라보던 그 단어를 직접 마주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마침 머물게 된 숙소도 마을의 사원에서 관리하는 숙소라는 것을 알고는 그들의 행보에 일조한 듯한 뿌듯함까지 느껴진다. 오매불망 보고 싶어하던 연예인을 만나기 직전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잘 공감해 보지 못했던 설렘도 느껴본다.
낮잠을 푹 자고 나아간 마을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새벽에 마주친 을씨년스럽던 분위기의 거리는 어디로 가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온 듯 산골의 좁은 길들이 북적인다. 신기하게도 지나다니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낯이 익다. 비행기로 몇 시간을 날아와서 버스도 그만큼 오래 타고 와서야 도착한 이 곳에서 마주친 이들은 처음 볼 법한 옷차림만 다를 뿐 고국의 사람들과 생김새가 비슷한 것보다 좀 더 닮아 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뜻 모를 언어가 영 어색하다.
장날인 마냥 유난히도 북적대는 행상들이 가득한 마을의 길들을 지나 큰 사원에 다다른다. 티베트인의 정신적 지주인 ‘라마’들의 사원이다. 입구부터 발 디딜 틈 없는 것이 무슨 행사가 열리는 듯 하다. 호기심에 그저 멋모르고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간다. 왁자지껄 한참 시끄러운 사원의 한가운데 너른 마당에는 형형색색의 깃발이 걸려있고, 깃발들 사이에는 누군지 모를, 하나같이 엄숙한 표정을 한 주인공들의 사진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거나 어정쩡하게 서 있다. 역시나 빠지지 않는 승려들이 연단 주변에 몰려 있고 법회처럼 보이는 행사가 진행 중이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스님이 연단에서 뜻 모를 이야기를 읊조리고 있지만, 사람들끼리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더 큰지, 마이크로 쩌렁쩌렁 울리는 연사의 목소리가 더 큰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눈을 감고 계속 손 안에서 염주를 돌리는 할아버지,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세상 신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아주머니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낄낄대는 학생들, 엄숙해야 할지, 즐거워야 할지 정체를 모를 행사는 계속 그 상태로 진행이 된다. 내심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었나 보다. 별 감흥 없이 금방 사원을 빠져 나간다.
맥빠진 걸음을 방향도 모르고 옮기던 중, 사원 뒤쪽으로 산길이 있었고 그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 발걸음을 좇는다. 들길이었지만 사람이 나다녔던 흔적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길의 초입에 어마한 덩치의 소가 주저앉아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파리를 쫓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길의 분위기는 점점 심상치 않아진다. 산 아래 건물들이 하나둘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인적 하나 없는 길가에는 마니차가 가득하다. 돌돌돌 돌아가며 갖가지 소리를 내는 마니차를 한 손으로 굴리며 지나가다 보니 주변의 공기가 묘해진다. 마니차나 그 옆의 기둥들에 새겨진 암호같이 생긴 그네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저 무의식적으로 일일이 하나씩 굴려가며 길을 계속 따라가다 보니 사당이 하나 나온다. 사당 건물이나 그 앞의 돌탑은 꽤나 크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 괜스레 오싹하다. 건물 안에는 흑백의 인물 사진들이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간단한 영문의 설명글들을 읽으니 그들의 조국, 민족의 독립을 위해 스러져간 이들의 사진인듯 하다. 사진들의 주인공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읽을수록 고통스러운 그들의 사연에 자꾸만 고개를 마주하기 힘들다. 무거워지는 마음만큼 주변의 공기도 가라앉는지 아까 사원에서와는 정반대의 침묵이 가득하다. 따뜻한 바람에 퍼지는 풍경소리, 경전을 읊는 목소리를 녹음해 둔 테이프 소리쯤이나 들리지만 그 시끄럽던 사원에서의 소란보다 더 아프게 귓전을 그리고 심금을 휘젓는다. 마침 돌탑을 넘나들던 들고양이와 눈이 마주친다. 유난히 그 눈매가 날카로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