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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Feb 10. 2020

적응과 방심은 한 끗 차이 1

또 다른 변화에 마주했다. 

 햇빛이 너무 눈 부셔서 그랬다.
-알베르 까뮈 <이방인>


 나는 꽤 운이 좋은 케이스다. 프랑스 파리에 약 2년 동안 지내면서 남들은 부지기수로 당하는 인종차별도 크게 겪은 적이 없다. 내 와이프도 그렇다.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별의별 인종차별을 겪더라. 예를 들면,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너네 나라로 꺼져버려!"라던가, 특히 여성일 경우 그 빈도나 수위도 높아지는 거 같았다. 언어와 신체 가릴 것 없이 성희롱을 당하고 그러다 보면 정말 돌아다니기가 겁난다고 하더라. 나와 와이프도 두세 번 "니하오"정도의 인종차별(혹은 무식함)을 겪은 적은 있지만, 그 수준이나 빈도는 들리는 이야기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 악명이 높은 소매치기도 늘 우리를 피해 가는 듯했다. 파리에 놀러 온 친구들은 심심찮게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하소연했다. 사실 그들이 파리에 오기 전에 "소매치기가 그렇게 많다며?"라고 물을 때마다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좀 애매했다. 당연히 당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 수가 적지 않으니 기본적으로 조심해야 할 건 하되, 지레 겁먹지는 않아도 될 거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줬다. 왜냐면 우리가 당한 적이 없고, 또 누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우리가 당한 적이 없으니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말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상식선에서 가방은 앞으로 메고, 주머니를 항상 신경 쓰라는 것 그게 다였다(근데 사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도 소매치기는 항상 내 옆에 있는 여행 온 친구만 귀신같이 털어갔다. 


  방심과 경계는 양면성을 가진다. 스스로는 이 중 어떤 거든 지나쳐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잠깐 여행을 왔을 때는 당연히 뭐든 조심하게 맞지만, 나 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여기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이 사회에, 혹은 이 나라 사람들을 향해 그 어느 것도 뚫을 수 없는 방어태세를 갖춰서는 득이 될 게 없다고 여겼다. 여기서 살기 위해선, 또 잘 지내기 위해서는 경계는 하되 어느 정도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 하다 못해 수업 필기라도 얻을 수 있고 그 외의 도움도 받을 수 있으니까. 사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여기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방심은 말할 것도 없다. 어쩌나 저쩌나 난 배척되진 않더라도 굳이 환대받지 않는 이방인이다. 문화 차이든 뭐든 서로의 해석의 코드는 다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행동 하나하나 태도 하나하나 신중해야 한다. 방심하는 순간 너무나 쉽사리 배척당할 수 있다.


 나름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경계와 방심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더 정확히는 방심보다는 적응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그런데 한편으론 적응과 방심은 한 끗 차이라, 어떤 단어를 쓰든 큰 차이는 없을 듯싶다. 


 최근에, 벌써 3개월 정도 됐지만 이사를 했다. 그 전에는 파리 15구에 살았다. 프랑스는 종로구나 강남구처럼 우리나라로 치면 행정구역의 구가 숫자로 나뉜다. 파리 1구, 2구 3구. 이런 식으로 20구까지 있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만 파리의 각 구도 나름의 특징을 지닌다. 1구, 2구 이렇게 한자리 수로 구분되는 구역이 말하자면 올드 타운 같은 곳으로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페라, 노트르담 같은 곳이 포진해있다. 또 13구는 약간 차이나 타운 같은 동네로 큰 아시안 마트가 여러 개 자리 잡고 있고, 중식당은 말할 것 없이 베트남 식당, 태국 식당 등 다양한 아시안 레스토랑이 있다. 19구는 파리 여행을 해봤거나 준비하는 사람들은 다 알법한 가장 위험한 동네로 구분된다. 북역(Gare du Nord)을 중심으로 이 주변 지역은 여성 관광객은 물론 남성 관광객들도 밤늦게는 절대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숙소도 돈을 더 줄지언정 다른 동네로 알아보라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 외에도 16구, 7구는 상대적으로 부촌으로 구분되기도 하며, 15구는 한국 사람들이 모여 거주하면서 파리 내 코리안 타운 같은 분위기다.


 물론 그렇다고 길거리가 정말 한국 같다거나 한글 간판이 널려 있는 정도는 아니다. 공식적으로 코리안 타운이라는 것도 없고 어쩌다 보니(사실 그 역사와 이유는 잘 모른다)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다. 특히 지하철 10호선 샤를 미셀 역을 중심으로 잘 돌아보면 오페라 주변 못지않게 많은 한식당이 밀집해 있다. 또 그 역 바로 앞에 있는 스타벅스는 한국인들의 만남의 장소 같은 곳으로 아무 때나 가도 최소 한국인 한 명은 볼 수 있다(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파리 내 스타벅스는 주로 관광객이 몰리거나 사람들이 북적이는 주요 관광지나 도심 내에 위치한다. 그런데 이곳에는 대형 쇼핑몰이 있긴 하지만 스타벅스 매장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한국인들 때문이라는 것이 나와 내 주변 한인들의 생각이었다. 심지어 이 매장에서 한 30걸음만 더 가면 쇼핑몰 안에 또 스타벅스가 있다). 이곳에서 에펠탑 쪽을 향해 가는 길목에는 파리를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면 꼭 들린다는 몽쥬 약국 2호점이 있으며(이제는 몽마르뜨에도 있고, 심지어 영화제로 유명한 깐느에도 매장이 있더라), 한인 마트도 이 곳에 두 개나 있다. 그 정도로 한국인들을 위한 제반 구조가 잘 갖춰졌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사람들이 더 모여든다. 그중 우리도 있었다. 


 하지만 곧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여러모로 한국인들에게 좋은 환경이고, 치안도 나름 괜찮은 데다 대중교통도 그 정도면 편리하다. 무엇보다 학원을 통해서든 아르바이트 때문이든 알고 지내는 한국 친구들 대부분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 하나가 슬금슬금 기어오르더니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났다. 언제나 유학생의 발목을 잡는 그것, 바로 이었다. 파리 내는 비슷비슷하지만 역시나 이곳도 방세가 어마무시했다. 이 상태로 지내다가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리가 갖고 있는 자본이 바닥 날 상황이었다. 당장 우리의 생활을 이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이사를 결심했다.


 파리 내에서 집을 구하는 것의 어려움은 아마 처음 혹은 두 번째 글에서 한 번 언급했던 거 같다. 그 짓을 한 번 더하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그래도 확실히 파리를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집세는 확 낮아졌다. 방세는 낮아지는데 조건은 확연히 좋아졌다. 예를 들면 지금 내는 방세의 70% 정도 월세인데 방이 3개고 면적도 확 넓어진다거나 그런. 하지만 하늘 아래 집 구하는 게 쉬우랴. 마음에 드는 매물을 찾는 건 버터 없이 바게뜨를 먹는 것과 같았다(내 입장에선 매우 힘들다는 의미다). 


 그러던 중 의외의 곳에서 해결책이 나왔는데, 바로 학교 기숙사였다. 와이프 학교가 이전 준비를 하면서 새 부지에 기숙사도 지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딱 2인실만 남았었다. 정확히는 학교 캠퍼스 안에서 있는 사설 기숙사인데 어쨌든 지금 방세보다 훨씬 저렴했고 넓이도 넓었다. 우리가 살게 될 방을 미리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신축 건물이라 사실상 새 집이었다. 되면 나이스고 안 돼도 본전이다라는 간절함으로 신청했는데 들어와도 좋다는 통지를 덜컥 받았다. 조금 더 널어진 생활공간에 책상과 테이블, 심지어 침대까지 달린 뫼블레. 화장실도 욕조는 없지만 널찍했고, 부엌은 현관문이 있는 입구 쪽에 있는데 내부 문을 닫으면 생활공간과 분리가 됐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비록 빨래는 공용 세탁실에서 돈을 내고 해야 했지만 상당히 만족스러운 집이었다. 


 학교 입학에 이어 새로운 파리 생활의 장이 열리는 듯했다.


 그럴 것도 한 것이 사실 한 가지 께름칙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위치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파리 내 각각의 구는 나름의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19구는 가장 치안이 안 좋은, 어떤 사람들의 과감한 표현에 따르면 사실상 치안공백인 곳으로 현지인은 발도 들이지 않는다고 무지막지하게 말하는 19구 바로 윗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파리 북쪽의 외곽지역으로 각종 악랄한 소문과 이야기가 자자한 곳이었다. 집을 알아볼 때 가장 중요한 곳이 주변 환경일 텐데 우린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좋은 이야기 없이 각종 범죄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래도 좀 괜찮았지만, 와이프가 걱정이었다. 학교를 다니면 스케줄 상 혼자 다녀야 할 때가 많고 어쩌다 보면 밤에 혼자 오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학교 캠퍼스가 들어서니깐 좀 나아지지 않을까(아직 캠퍼스가 다 만들어지지도 않았다)하는 기대와 또 피치 못할 때는 제외하고는 항상 함께 다니기로 했다. 또 "그 지역도 동네마다 다르대"라는 희망찬 자기 위안을 품고 이사를 감행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인상은 정말 다르다는 거였다. 파리 외곽이긴 하지만 그래 봤자 지하철 역 한 두 개 차이일 뿐인데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파리, 그리고 전에 살던 15구와 정말 달랐다. 학교 캠퍼스의 새 건물이 들어서긴 했지만 어딘가 휑하고 단조로웠다. 그 흔한 마트도 바로 근방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지역 개발을 상징하는 무수한 크레인이 돌아가고 있었다. 또 뭔가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더 크게는 정말이지 유색인종 비율이 확 늘었다. 물론 프랑스인들 입장에서는 15구 역시 그렇겠지만, 그래도 나는 한국인이니까 괜찮았다. 또 동네 분위기 자체도 상업적이면서 생활의 활기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정말 흑인과 아랍 혹은 북아프리카 계열이 차지하는 수준이 상당했다. 물론 그들에 대한 어떤 악의도 개인적인 불편함도 전혀 없지만 어쨌든 확연히 달라진 동네의 분위기와 또 그 자체가 보여주는 동네의 이미지는 가히 움츠러 들기 충분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항상 같은 곳에 무리 지어 있었고, 밤이 되면 길가에 모여 십 수명이 차량 수리를 하고, 주말이 되면 트럭을 개조한 것인 간이 텐트인지를 치고 또 모여 있었다. 뭣보다 기숙사 바로 앞에 고물상 같은 게 여러 개 있는데 가로등은 희미했고 또 그 앞에는 낮부터 여럿이(또!) 줄지어 있었다. 노숙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그런 거였다. 거기다 기숙사에서 한 15분만 걸어가면 텐트촌, 즉 각자 나라의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온 밀입국자들이나 노숙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곳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전형적인 거주지역인 데다 원체 공사 중인 곳이 많아 밤만 되면 더욱 조용했다. 그 흔한 카페나 바를 가는데만 10분은 가야 했다. 낮이고 밤이고 환한 조명과 레스토랑과 술집에 뿜어내는 조명들에 너무 익숙해졌던 나였다. 너무나 다른 이곳, 무지는 사람을 용감하게도 하지만 끝도 없이 쪼여들게도 한다. 딱 그런 상황이었다.


 아 그리고 늘 사진들을 같이 올리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은 이유를 다음에 이어서 말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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