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
이제 누군가 내게 말하길 자기는 다만 자기 자신의 경우에 근거해 고통이 무엇인지 안다고 말한다! - 각자 모두가 무엇인가를 담은 상자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상자 속의 그것을 “딱정벌레”라고 부른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상자를 드려다 볼 수 없고, 모든 이는 자신의 딱정벌레를 봄으로써 딱정벌레가 무엇인지 안다고 말한다. - 그런데 이 경우 각자 모두가 자신의 상자 속에 서로 다른 것을 담고 있는 것이 정말 가능하다. 심지어 상자 속의 그것이 계속해서 (다른 것으로) 변하고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 이제 “딱정벌레”라는 단어가 이 사람들의 언어에서 그 용처(Use)가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가? - 만약 그렇다면, 그 단어는 사물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자 속의 그것은 언어-게임에 전혀 속할 수 없다: 심지어 어떤 것도 아니다: 왜냐면 그 상자는 텅 비어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만약 감각 표현의 문법을 “사물과 지시”의 모델에 근거해 정립할 경우 사물은 우리의 고려대상에서부터 사라져 버리게 된다.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2nd edition), §293, translated by E. Anscombe, 1958.
위 글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상자 속의 딱정벌레’이다. 딱정벌레는 곤충 중 유난히 많은 종류와 형태를 띠고 있음으로써 예시로 등장하였다. 각자는 상자 속에 가려진 ‘딱정벌레’를 갖고 있으면서 그것이 딱정벌레임을 알고 혹은 믿고 있다. 서로의 상자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지만, 각자는 자신의 상자 안에 딱정벌레를 갖고 있다 말한다. 각자가 상자를 들고서 서로의 딱정벌레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통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꿈으로 치환되는 이미지 속 딱정벌레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이 서로의 딱정벌레를 알아가기 위해 상자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풍경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으며, 상자를 부정하며 소리로서 타인의 딱정벌레를 공유하고자 하는 모습도 있고, 딱정벌레 이전에 상자에 대한 사색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각자의 상자 속 딱정벌레를 보고야 말겠다는 노력과 좌절,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딱정벌레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타인의 딱정벌레를 받아들이려는 일련의 행위들(이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이것들이 이번 전시회 :sometween 의 지향점과 맞닿아있다. 하지만 위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서로의 딱정벌레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은 비평 철학자로서 정신적 용어의 사용과 그 한계점을 지적하고 있다. 언어가 하나의 고유한 행동이라 했을 때, 그 행동을 읽어냄으로써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 에 대한 회의다. 그것은 곧 각자가 갖고 있는 딱정벌레에 대해 서로 ‘온전히’ 소통하는 것이 가능한지, 볼 수 있다면, 어떻게 닮아 있을지, 결국 딱정벌레는 애초에 존재했던 것인지, 궁극적으로 이 딱정벌레에 대한 소통의 노력이 ‘예술’이 될 수 있을지 묻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세계의 끝 여자친구』
다시 소통에 관한 문제로 돌아와서, 소설가 김연수의 글을 상기해 본다. 인간의 소통에 대해 탐구하는 그의 작품 세계 속에서 그는 인간 사이의 소통의 한계를 상정하고 있다. 이는 당연한 혹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볼 수 있다. 나는 네가 아니고, 너도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계’가 의미를 갖는 까닭은 그 노력에 있다. 답을 얻는 것이 아닌 답을 추구하는 그 노력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우리가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 타인밖에 없을까? 그 대답은 글 말머리에서 시작된 딱정벌레에 관한 질문들과 문맥을 같이 한다. ‘일상’과 ‘형이상학’(이 두 단어를 양 극점으로 상정하는데 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의 사이에서, 관념과 물리학 사이, 그리고 정물화와 추상화 사이에서 늘 무엇을 담아내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 어찌 보면 쓸모없는, 이러한 고민의 필요성과 전혀 마주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공부’하기로 한 학생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격으로 이것을 공부한다고 자부하며, 고민의 결과물들을 ‘전시’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사이'의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일련의 과정을 ‘사랑’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떠한 특별함이나 구분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지양해야 할 태도이다. 인간은 모두 인문학자이며, 예술가이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고민하고 효율성과 거리가 먼 미적 요소들을 선택하고, 행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추구의 과정은 그리 녹록치 않다. 누구나 온전한 소통을 원하고 무언가를 추구하는데 진실하지만,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 방법론적 고민이 필요하다. 그것은 보여주기와 감추기 사이의 줄타기의 필요성이기도 하고, 찰나에 대한 시각화이기도 하며, 활자에 감정을 불어넣은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작업실의 밤공기가 지겨우리만큼 익숙해져 가지만 매번 그 길이 단순히 사랑하기에는 절대 만만하지 않은 길이란 걸 안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우리의 과정은 수직상승이 아닌 경사가 심한 비탈길을 오르는 과정이다. 그것은 위 글처럼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오르는 과정이다.
언젠가, 어쩌면 답에 근사하게 왔다고 생각할 때가 올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지금은 아니다. 이 글을 포함해,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의 흔적과 소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13년 가을, 친구가 기획하게 된 전시회를 축하하며 실었던 글입니다.
학부과정을 마치면 미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은연중에 얘기한 것 때문인지, 친구는 자신의 작품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에 대해 떠들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갓 제대한 직후라 그런지, 비교적 지금보다는 패기를 갖고 글들을 써내려 간 것 같습니다. 그때도 누군가의 작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꺼려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어려움은 더해만 갑니다. 그 노력의 무게를 다르게 체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작업실의 밤공기가 지겨우리만큼 익숙해져 가지만
매번 그 길이 단순히 사랑하기에는 절대 만만하지 않은 길이란 걸 안다.
본문의 어느 곳 보다 이 구절이 마음에 드는 동시에, 치기 어린 '안다'라는 글자가 당혹스럽고 의뭉스럽습니다. 얼마나 더 살아봐야 알까요
...
나를 위로하던 누군가의 음악도
뚝딱 나온게 아닐것임을 깨닫고
그간 나의 어머니가 그린 그림도
무심코 보던 어제 보다 더 깊어
로마같은 그들을 우러러봐
쓰러져가는 내 눈에 그들은 푸르르다
나는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농담같던 말이 오늘따라 내겐 하나도
웃기지 않고 오히려 진지해
머리안에 가득 짐을 짊어지네
내 꿈, 내 걱정, 내 '겁'과 담배
불을 지피네
jazzyfact- smoking dreams
cf.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lated by E. Anscombe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009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