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학 리뷰
저자가 말한 '페미니즘은 반(反) 남성주의가 아닌 반(反) 성차별주의'라는 미묘하고도 중요한 정의는 페미니즘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첫걸음이 된다. 또한 성차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계급 · 인종 등 모든 부당한 차별에 대항하는 것을 수반한다고 한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페미니즘은 모든 부당한 차별에 대항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포괄적이며 급진적으로 이해된다.
페미니즘이 단순한 남성 혐오 즉, 반남성주의에서 반성차별주의로 확장되는 것은 페미니즘이 마땅히 추구되어야 할 운동임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운동의 포괄적이고 급진적인 성격 때문에 비현실적인 인상을 남기는 듯하다. 인간들 사이의 차이 그리고 이로 인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생각까지 타인에게 억압받지 않고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사회 속에서 계급으로 인식되는 경제적 소득부터 사상 · 국가 · 종교 · 문화, 좁게는 어린아이와 어른 · 각기 다른 생김새 · 취향 · 신체능력까지 모든 차이가 차별로 '변질'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지향점이 비현실적인, 즉 이상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 '변질'을 방지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기대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들이 차별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차이'와 '차별'의 구분을 통해 차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구분 기준은 차이로 인한 어떠한 '이득'의 여부에 따른 기준이다. 또한 차이로 인한 즉각적 감정 변화, 예컨대 혐오감이나 기쁨 · 낯섦과 같이 머릿속으로 계산되지 않은 순수한 감정 그 자체에 의한 구분이 차이와 차별을 구분 짓는 잣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차이로 인한 모든 이득이 모두 '나쁜' 혹은 '부정적'인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또한 차이로 인한 개인의 순수한 감정 발현이 타자에게 전달되기 까지는 결심과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감정 자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차이와 차별의 구분 기준이 어떠한 이득에 있던, 순수한 감정에 있던, 분명한 것은 주위에서 항상 도사리고 있는 '억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억압'이 발생하는 근원을 서구 형이상학에서 찾았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은 서구 형이상학의 이원론(세계는 언제나 두 개의 범주, 이를테면 우 · 열, 선 · 악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가설)이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 등등 모든 형태의 집단 억압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고, 그런 사고가 유태 - 기독교 신앙 체계의 근본을 형성하고 있단 사실을 폭로했던 것이다.
서구 형이상학의 이원론에서 차이를 차별로 변질시키는 억압, 즉 '폭력성' 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서구 형이상학은 '남자'도 아니며, '성차별'도 아닌, 서구의 세계를 이어온 근본적인 사고 틀이다. 동양 또한 대부분 서구화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는 점에서 '세계의 근본 인식'이라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이로써 페미니즘이 저항해야 할 상대는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근본 인식인 이원론 체제로 귀결된다. 때문에 페미니즘의 상대는 구체적 대상도 아니며, 한 체제나 시스템도 아닌, 인간 모두와 자기 자신 그리고 각 개별의 사고 방향 혹은 철학함(형이상학)까지 확장된다.
페미니즘이 단순히 반남성주의가 아니 반성차별주의로, 그리고 이 반성차별주의가 실행되기 위해서는 모든 차별에 대한 억압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페미니즘에 대한 재고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절실한 정당성을 각인시켜 주었지만, 반대로 그 난해함까지 가증 시켰다. 서구의 근본 이데올로기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적 이원론을 부정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지향점이었고 앞으로도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더욱더 크고 구조적이며 동시에 탈 구조적인 '무언가'로 변화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자체도 서구 형이상학 전통과 대척점에 있는 사상이라고 이해한다면, 또다시 서구 형이상학이 갖고 있는 이원론에 새로운 구도로 편입되어 반복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존의 구조적인 틀을 변화시키는 것임과 동시에 스스로 탈 구조적이어야 할 것이다.)
논의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페미니즘의 정의와 그 범위가 희미해지는 듯하다. 또한 그 희미함으로 인해서, 실현 가능성과 그 방법에 대한 의문 또한 꼬리를 문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반남성주의에서 반성차별주의로 나아가는 것처럼, 기존 서구의 이원론을 전복시킬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현 가능성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용인하는 행위는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의 실천력을 약화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2016년 봄, '여성 복지론' 수업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해보면서 쓴 글입니다. 약 2년이 흐른 지금, 이 이슈는 어느 주제보다 뜨겁고 무거운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모호하고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차이와 차별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도 나타났듯이, 'Ⅱ. 차별의 근원' 에서 쓰인 '억압'이라는 기준 또한 명확한 차이와 차별의 기준이 될 수 없는듯합니다. 차별의 결과로서 혹은 차별의 다른 표현으로서 '억압'을 이해할 때, 억압은 차이와 차별을 구분 짓는 잣대가 아닌 차별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A(차이)와 B(차별)를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B(차별)라고 대답하는 모양입니다. 이는 서구 형이상학이 어떻게 폭력성을 가해서 차이를 억압(차별)로 변질 시켰는지 설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의문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자가 제시한 서구 형이상학의 이원론 뿐만 아니라 차이와 차별의 근본적인 기준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논의가 될 것입니다.
'~st'의 대가
예컨대 물리주의 · 객관주의 · 상대주의 등 누군가 어떠한 사상체계'(~sm)'를 믿고 표명함으로써 지켜나간다는 것은 굉장히 책임이 큰 일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사고체계(철학함 그 자체)와 행동을 지배하도록 해야 하며, 그에 따른 비난 또한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 소크라테스의 독배를 들이밀어 사상(철학함)을 지켜나가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너무 잔혹하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상을 명분으로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며, 그로 인해 생겨난 또 다른 사상들은 또 다른 차별을 낳고 개인의 일상생활까지 침투하는 걸 우리 모두 지켜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사상(~sm)을 안다고, 그리고 믿는다고도 말하지 않았으나 독배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사상을 믿고 표명한다는 것은 액세서리로 삼기에는 너무 무겁고 추악하며 불편합니다.
ref.
-벨훅스, 『행복한 페미니즘(feminism is for everyone)』, 박정애 옮김, 백년글사랑.
-커버 이미지 : 영화 'lost in traslation'(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