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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 ater Apr 03. 2018

김수영-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외 3편

시 리뷰

1. 범인적 시어(詩語) 


 김수영의 시 세계는 ‘대립’으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의 시 세계는 대립항들의 긴장관계를 강조 하는데, ‘사상과 형태’, ‘침묵과 요설’, ‘언어의 서술과 언어의 작용’, ‘예술성과 현실성’, ‘내용과 형식’등의 대립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김수영의 시를 단순 대립으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것은 ‘생활세계와 초월적 세계’, ‘범인과 위인’의 애매한 대립 긴장관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그 자신을 포함한 범인의 생활세계를 끊임없이 비판 하면서 부단히 위인의 초월적 세계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범인에 대한 자조 섞인 그 비판 안에서는 ‘범인’의 생명력과 그에 의한 생생함이 그의 시에서 살아 있다. 범인과 위인의 대립에서 그저 위인의 세계를 추구하는 듯 비추어 지지만, 그 시들의 ‘시어’ 자체는 범인의 육체적, 일상적 시어로서 이루어져 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 중에서


 이 작품 속 화자가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분개하는 과정은 다분히 육체적이고 감정적이다. 시의 화자는 주인년이나 야경꾼들을 에게만 증오·분개하고, 언론의 자유나 월남 파병 같은 ‘보다 큰’ 이념적 불합리에 대해서는 증오·분개하지 못한다고 개탄스러워 하고 있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사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거대한 뿌리」(1964) 중에서


 「거대한 뿌리」 에서는 앞서 살펴본 「어느 날 고궁에서 나오면서」과 달리 추상적인 이념(진보주의자, 사회주의자, 중립)인 ‘더 큰 것’에 대한 분개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는 화자와 같은 범인들에 대해 육체적 · 감정적 표현을 통해 분개하고 있다면, 「거대한 뿌리」에서는 그 대상이 ‘일본 영사관’, ‘동양척식회사’등 시 · 공간적으로 구체적인 대상이라는 것은 변함없지만, 그 바탕이 되는 추상적 사상마저 분개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대상에 대해 더욱 속되고 격한 감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고서라도, 이러한 속되고 과격한 표현을 쓰기보다, 순화된 언어로서 그것들을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언어적 감각이 뛰어난 시인으로서 얼마든지 노골적이고 직선적인 비판 대신에 은유, 환유 등 우회할 수 있는 언어의 경로로서 자신의 증오·분개를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세련된’방법이 가능 했을 것 이다. 그러나 김수영은 그러지 않고 오히려 시 작품 속에서 직접적인 사건, 대상을 언급하면서 더욱더 생생한 시어를 표현했다. 이러한 김수영의 추상적 시어와 대비되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시적 표현 방법을 ‘범인적 시어(詩語)’라고 하겠다. 그의 시적 표현이 범인적, 즉 흔하고 대중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범인의 삶에 밀접한 생생하고 육체적인 표현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범인적’이다. 범인적 시어는 단순히 시적 표현에서 나타나는 일상성과 친근함뿐만 아니라, 김수영이 갖고 있는 언어에 대한 태도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언어(言語)는 나의 가슴에 있다
나는 모리배(謀利輩)들한테서
언어(言語)의 단련을 받는다
그들은 나의 팔을 지배(支配)하고 나의
밥을 지배(支配)하고 나의 욕심(慾心)을 지배한다
  
그래서 나는 우둔(愚鈍)한 그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면서 하이덱거를
읽고 또 그들을 사랑한다
생활(生活)과 언어(言語)가 이렇게까지 나에게
밀접(密接)해진 일은 없다
  
언어(言語)는 원래가 유치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유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아 모리배(謀利輩)여 모리배(謀利輩)여
나의 화신(化身)이여
  
  
-「모리배(謀利輩)」(1959)



 언어가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이며, 이 언어라는 도구를 대하는 태도가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가 된다면, 「모리배」에서 나타난 김수영의 언어에 대한 태도는 ‘범인적’이다. 이때의 '범인적'은 반(反)하이데거적이며, 유치하고, 세련되지 못한 투박한 언어관이다. ‘가슴에 있는 언어를 모리배가 단련 · 지배’ 하여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갈비탕에 대한 분개를 가능케 하고, ‘생활과 언어’가 너무나도 밀접해 구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욕지거리가 시어로 등장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수영이 택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태도는 역으로 ‘하이데거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언어 또한 세계를 인식하는 절대적인 방법이 아닌, 인간만이 다룰 수 있음과 동시에 인간을 속박하는 도구의 하나로 보았다. 그와 대비되는 세계 인식의 방법으로는 ‘예술’이 있다. 그러나 시(詩)는 다분히, 아니 오로지 언어적이다.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예술이지만, 그 방법이 언어로 밖에 행해질 수 없는 기구한 예술이고 , 세계 인식 추구의 방법이다. 또한 하이데거에게 생활세계 속에서 세인(世人)들이 나누는 담론의 도구가 되는 언어는 시인이 행하는 언어와 대비되는 언어의 부정적 측면이다. 이러한 부정적 언어의 측면을 시어로 표현해낸 김수영의 시는 하이데거로 하여금 세인(世人)과 시인과의 화해를 주도하고 있다. 지극히 세인(世人)적인 표현, 즉 범인적 시어를 사용하나 그 내용의 측면에서는 시인의 고민을 다함으로써, 시인과 세인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어차피 ‘언어(言語)는 원래가 유치한 것이’ 아니겠냐며 하이데거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김수영의 태도는 「모리배」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모리배(謀利輩)들에게 언어(言語)의 단련’을 받으면서 우둔(愚鈍)한 그들을 사랑함과 동시에, ‘하이덱거를 읽기’ 때문에 가능하다. 



2. 범인적 시어의 의미


 김수영의 시가 범인적 시어의 면모를 보여준다면, 그것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
“그러는 너는? 그 관념을 어떻게 처리해?”
“나는 관념이 아니라 정액을 처리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설가는 말이야. 현실적이어야 해.”
철학이 이의를 제기한다.
“그게 과연 그렇게 간단할까? 너는 관념에서 출발해 거기에 사실의 살을 붙여가는 일을 하잖아.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거기에 육체를 더하는. 그러니까 네가 뭐라고 떠들든 너 역시 관념을 먼저 처리해야 할 거야.”
“소설은 그런 게 아냐. 매우 육체적인 거야. 심장이 움직이면 마음은 복종해. 우리는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른 몸을 갖고 있어. 문학계의 해병대, 육체노동자, 정육점 주인이야.”
“너의 그 확신이 나는 불길해.”
누가 철학자 아니랄까봐 냉소적이기는.
  
-김영하 「옥수수와 나」 중에서  


 시의 세계는 ‘육체, 생활세계, 일상’에서 ‘관념, 초월적 세계, 낯설음’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행한다고 한다. 하지만 김수영의 시어는 다분히 육체적이다. ‘문학계의 해병대, 육체노동자, 정육점 주인’ 이다. 범인적 시어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관념, 초월적 세계, 낯설음으로 향하는 기존의 시 세계의 방향을 ‘육체, 생활세계, 일상’으로 전환하였다. 합리적 이성 체계에서 육체로 향하는 모더니즘 요소와 맞닿아 있다. 

이것은 ‘참여시’라고 부르는 정치적 참여보다는 보다 근원적이다. 물론, 앞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거대한 뿌리」에서 같이 구체적인 정치적 사태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지만, 두 작품 모두 내용을 떠나서 ‘범인적 시어’로 이루어져 있다. 시어의 표현 자체에 우선순위를 두어 시작(詩作)에 근본적인 원리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시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처럼, 같은 대상, 상황, 생각 등을 담아내려고 하여도 각 언어가 갖고 있는 차이성이 주는 한계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결과물이 다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틀의 차이이다. 하나의 특정한 고유 언어처럼 ‘범인적 시어’는 시 내용이 의미하는 것을 초월해 언어적 태도로 이해 해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수영이 번역에 능했다는 사실은 새롭게 다가온다. 번역을 통해 누구보다 신식의, 새로움을 추구 하였다는 의의뿐만 아니라, 번역해 놓은 결과물을 통해 시를 감상자 곁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때문에 김수영의 생생한 시어는 감상자에게 ‘그림의 떡’이 아닌 ‘눈앞에 보기 좋게 차려진 떡’ 이다. 다른 시들이 세련된 표현을 추구하여 시의 작성자와 소수의 평론가, 관련 전문가들의 협소한 만족으로 전락될 때, 김수영의 범인적 시어는 저속을 자처하고 또 자조하면서 감상자 곁으로 다가온다.






cf.

-김수영『김수영 시선-거대한 뿌리

-강웅식김수영론-언어의 윤리와 시의 완성새로 쓰는 한국 시인론
-김영하옥수수와 나, 「제 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서동욱김행숙 외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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