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
즉석만남, 헌팅이 하나의 '밤 문화'로 자리매김 했다.
그 모습은 다양한 모습을 띄며 정당화 되어 가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속 경제적 · 상업적 면모와 맞물려 여러 마케팅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니체 철학은 디오니소스적 면모를 추구하는데, 이 디오니소스적 미학은 합리적 이성을 거부하고 파괴적인 격정을 통해 실존을 추구한다.
즉석만남 문화는 디오니소스적 면모와 맞닿아 있다. 또한 이들은 자기 파괴적인데, 이것을 감내하게 하는것은 성욕이다. 니체에 따르면, 성욕의 추구에 따르는 허무보다 쾌락의 깊이가 더 깊다.
즉석만남 문화가 여러 폭력성에 노출을 감내하고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는 용기라면, 즉석만남의 성공은 '강자'임을 입증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즉석만남의 '강자'가 갖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 이들도 '위버맨쉬적' 인가?
밤 문화에서 술이 빠질 수는 없다. 특히나 한국 밤 문화에서 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배적이다. 술이 인간관계에 도움을 주고, 억압된 욕망을 분출 시킨다면, 남녀 간 성적 관계를 진행 시키는 일에도 사용될 것이 자명하다. 술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면, 억압된 욕망인 성욕을 쉽게 분출해낼 수 있다. 이러한 술을 통한 남녀의 만남은 현대사회에서 여러 모습을 띄게 되었다. 그중 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헌팅 문화’가 있다.
(헌팅’, ‘즉석만남’, ‘부킹’, ‘픽업(Pick Up)’ ‘원나잇 스탠드’ 등 모두 비슷한 맥락의 단어이다. 장소와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들을 갖기 시작했지만, 그 목적이 개인의 욕망, 그 중 성욕에 있다는 것에서는 의미를 같이 한다. 이러한 용어들, 특히 ‘헌팅’의 의미는 2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생전 처음 본 낯선 이성과 술자리를 함께하고, 합의된다면 성적 관계까지 갖는 이 ‘헌팅 문화’는 현대사회의 밤 문화에서 크게 생소하지 않다. 심지어 이러한 문화를 기반으로 ‘초면인 남녀 간의 즉석만남’만을 목적으로 하는 술가게 까지 성행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 안에서는 이러한 술 가게가 위치 해 있으며, ‘즉석만남’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명소’들이 있다. 낮에는 제 역할을 하다가, 밤이 되면 즉석만남 문화의 장(場)이 된다. 수유, 홍대, 이태원, 강남 등이 그러하다.
어쨌든 한국 안에서 밤, 술, 남녀의 성적 긴장감이 고루 섞여 한국 특유의 밤 문화를 형성한다. 이것이 하나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은 이미 위시되고 도덕적으로 질타 받는 수면의 상태에서, 하나의 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공개적이고 구체적으로 형성되어 수면 위로 떠 올라왔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 이전에도 이러한 즉석 만남의 형태를 띠고 있는 문화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나이트클럽’이나 ‘콜라텍’ 같은 것들이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즉석만남의 특이점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심지어 거리에서 흔히 행해진다), 온전히 욕구 충족에 목적을 두고, 보다 일회성에 가까워졌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현대사회의 여러 요인들에는 ‘영업시간’이 무색한 거리의 수많은 술가게들, 피임의 확대, 정보기술의 발달, 무엇보다 현대 시민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변화 등 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대의 밤 문화 - ‘즉석만남의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요인들 중, 무엇보다 그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개인의 욕망’에 집중해 이 문화를 바라보고자 한다. 사회·문화를 바라보는 여러 철학자들의 담론이 있겠지만, 이 밤 문화와 어울리는 철학적 사유는 누구보다 ‘니체’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합리주의적 이성의 전복은 현대 사회의 욕정적 밤 문화를 설명하는데 적합하다. 밤 문화의 성행은 시대가 ‘발전’ 함에 따라 시민 사회의 구성원들은 더욱더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닌, 욕정과 욕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즉석만남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술’ 또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개념으로 치환 되어 설명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현대사회의 즉석만남 문화가 니체를 통해 반드시 긍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도덕적 잣대로 이 문화를 가늠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니체철학이 비판될 수 있는 것처럼 니체 철학의 비판점을 통해 즉석만남 문화를 비판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석만남 문화는 그 문화의 특성상 수면위로 올라와 가시화되고 논의 될 수 없었다. 낮의 세계에서 이야기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자신만의 공공한 현상들을 다양한 모습을 유지 시키고 발전 시켜 왔다.
즉석만남 문화는 같은 의미라고도 할 수 있는 ‘헌팅’개념을 빼 놓고 얘기 될 수 없다. 헌팅(Hunting)이란 본래 동물을 사냥하는 의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헌팅은 ‘남자가 처음 보거나 잘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 호감을 느껴 장소를 불문하고 만남을 요청하는 일’을 말한다. 자연과 같은 날 것의 장소(남녀 간의 만남의 분위기나, 목적이 있는 장소가 아닌)에서 남성이 여성을 사냥한다는 의미에서 다소 남성중심주의적 의미를 띄고 있다. 여성은 헌팅 하는 주체가 아닌 헌팅 당하는 의미에서 객체이다. 때문에 즉석 만남 문화 속에서 남성은 “헌팅 했다”라고 타인에게 과시 할 때, 여성은 “헌팅 당했다”라고 타인에게 과시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헌팅 당했음을 과시 하는 것은 ‘남성에 의해 사냥 당했음’을 과시 하는 것과 같다. 이때, 여성은 자신이 사냥 당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임을 확인 받았음을 과시하지만, 무언가 에게 어떠한 목적으로든 목표물이 되었다는 사실자체는 과시할 것이 아니다. ‘사냥감’이 되었다는 것은 사냥하는 주체(이하 ‘사냥주체’)보다 어떠한 면으로든 약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헌팅의 중대한 문제는 사냥주체보다 사냥감의 사냥에 대한 ‘잠재적 태도’에 있다. 동물을 보호하는 취지에서 마취 총을 쏘아 동물을 잠재우는 것은 사냥이 아니다. 이렇듯 사냥 주체가 사냥감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목적을 갖고 있고, 사냥주체와 사냥감의 사냥을 통한 추구점이 비슷하다면, 사냥은 그 남성 주의적 폭력성을 잃고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헌팅 문화 속에서 사냥주체인 남성의 목적은 대부분 대상 여성과의 섹스에 있다. 이러한 헌팅의 남성중심주의적 폭력성, 그리고 그 폭력의 원동력이 되는 남성의 성욕에 의해 헌팅은 수면위로 올라가 정당하게 논의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헌팅은 그저 터부시 되어서 묻히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상품’ 이다. 얕게는 술가게와 숙박업소 등의 이윤, 지역적으로는 즉석만남 문화가 팽배한 지역 상권의 활성화, 근원적으로는 패션 · 미용 시장의 활성화 등 즉석만남 문화로 인해 소비될 상품들은 어마어마하다. 이러한 헌팅의 경제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헌팅을 수면 위로 올려 부정적으로 터부시 되는 문화적 인식을 잠재울 만한 전환점이 필요하다. 그 방법으로 현대 사회의 마케팅은 헌팅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 ‘헌팅’을 ‘즉석 만남’이라고 ‘순화’ 하여 부르기 시작한다. 헌팅이 갖고 있는 다소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어감과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성관계에 대한 뉘앙스를 제거하는 것이다. 확실히 ‘헌팅’에 비해 ‘즉석 만남’은 마치 현대 사회에 유행하는 ‘만남’의 한 형태로 들린다. 그러나 ‘즉석 만남’ 또한 그 목적에는 여전히 헌팅과 같은 개인의 성욕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헌팅의 의미가 사냥과 연관 짓게 되어 그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반해, 즉석만남은 마치 즉각적으로 만나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둠으로써 본연의 진정한 목적을 감추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즉석 만남은 ‘헌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처음 만난 사람’, ‘소개팅’, ‘미팅’ 등 비교적 순수하게 다가 올 수도 있다. 심지어 사람간의 모든 만남에 즉석 만남이 적용 될 수 있다.사람은 누구나 즉석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의 관계마저, 부모와 자식이 출산과 태어나짐을 통해 공유하게 되는 사태 속에서 서로에 대해 예상 · 계획 할 수 없는 즉석 만남이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직장상사, 친구, 연인 등 타자와의 만남 모두가 첫 만남의 상황 안에서는 즉석 만남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모두 성관계는 아니다. ‘즉석만남’은 표면적으로는 모든 목적의 만남을 위시하지만 표면 아래에서는 ‘헌팅’의 개념으로서 성욕 해소라는 목적을 갖고 있다.
결국 헌팅, 즉석만남, 등은 ‘즉석 만남의 문화’라는 가면 안에서 함께 포섭되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 모습은 다양한 모습을 띄며 정당화 되어 가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속 경제적 · 상업적 면모와 맞물려 여러 마케팅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포털 사이트에서 ‘즉석만남’을 검색해 보면 그 내용과 목적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웹사이트, 모바일 앱, 방송, 술집 등 여러 마케팅 형태로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남성들에게 즉석만남을 강의하는 ‘픽업 아티스트’라는 ‘직업’ 아닌 직업이 존재함을 확인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성공적인 즉석만남을 위해 외모, 대화, 크게는 자신감 까지 ‘수강생’들에게 교육하고 그 대가로 일정한 돈을 받는다. 이때 성공적인 즉석만남이라 함은 물론 여성과의 섹스를 목표로 하는 과정이다. ‘픽업 아티스트’본인들은 이러한 성관계를 위한 맹목적인 만남뿐 아니라, 모든 대인 관계에서 수월함을 가르쳐 준다고 주장 할 수 있지만, 픽업 아티스트라는 명명부터 이미 여성과의 육체적 관계에 궁극적 목표가 있음을 시사 해준다. ‘픽업(Pick-up)’이란, 앞서 논의한 ‘헌팅’의 서구권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픽업(Pick-up)을 ‘아티스트(artist)’의 경지까지 도달해 구사한다는 것이 이 직업의 목표이고 정의라면, 그들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다분히 육체적 관계만을 목표로 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픽업 아티스트가 (자칭) 직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즉석만남 문화의 가시화, 정당화가 뒷받침 돼있다. )
니체 철학에 대한 모든 언급은 불가능 하지만, 본 글의 주제와 맞는 간략한 소개를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우선, 그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학적 철학’이다. 고대 그리스의 미학이 아폴론적인 미(美)(질서, 비례, 아름다움, 조화, 낮, 빛,)즉, 이성과 연관 지어 논의 되는 측면과 이에 대비되어 디오니소스적 ‘숭고’(혼돈, 무질서, 추악함, 거대함, 밤, 어둠, 술, 육체)즉, 감정 · 욕구와 연관 지어 논의되는 측면의 대립이라면, 니체의 철학은 디오니소스적 미학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때문에 자연 상태의 욕구는 그 자체로 입지를 갖으며 이에 따른 행동이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것이다. 이러한 자연 상태는 약육강식, 즉 강한자만이 살아남음을 뜻한다.
또한 존재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인간이 처한 실존적 허무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인간이 어떠한 설계와 목적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짐(피투)’을 당한 이상 실존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실존적 허무에 대해 인간은 이성으로서 이 허무에 서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이 허무에 대한 몸부림은 이성으로서 가능 한 것이 아니라, 비극적 신화, 즉 예술 · 문화로서 가능하다. 니체에게 비극적 신화는 마치 술처럼 고통을 잊게 하고 황홀경에 빠지게 만들어, 실존의 허무를 잊게 만든다. 하지만 서구 합리주의 철학은 이것을 합리적 이성으로 해결하려 했고, 여기서 서구 철학의 출발점이 잘못 되었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니체의 철학은 기존의 서구 철학이 갖고 있는 아폴론적 이성의 미학을 배제하고 스스로 디오니소스 미학의 계승자임을 자처한다. 인간 실존의 공포와 경악 앞에서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고 은폐하는 것이 아닌 파괴적인 격정을 통해 마주하며 실존을 극한까지 밀어 붙이는 디오니소스적 방법을 택한 것이다.
먼저, ‘디오니소스적’이란 무엇인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폴론적인 것의 대척점을 이룬다. 그것은 실존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의 고통을 극단적으로 표출함으로써 자기망각적인 도취, 즉 탈아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봄의 충동과 도취의 음료”를 상징하는 디오니소스는 파괴와 창조, 소멸과 생성, 죽음과 생식을 반복하는 자연의 적나라한 진실, 즉 극단적 공포와 망아적 황홀을 자신 안에 구현하고 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통과 쾌락 모두에서 한계와 절도를 모른다. 형식과 질서의 파괴, 과도함과 불균형, 비합리적 충동 등을 근본특징으로 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예술의 질료적 측면인 파토스의 원리를 대변한다. 이처럼 의지와 감정의 과도한 분출을 특징으로 하는 디오니소스적 공동체에서 일상적 실존의 현실세계를 규정하는 개별화의 원리, 즉 대립과 분열 그리고 위계질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 안성찬,『숭고의 미학』- 파괴와 혁신의 문화적 동력, 유로서적, 2004. 174P.
즉석만남 문화는 디오니소스적 면모를 갖고 있다. 평소에는 점잖고, ‘헌팅’ 같은 즉석만남 문화를 터부시 하는 자가 ‘망아’ 즉,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규정, 제한 등을 풀어버리는 데서 즉석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망아가 분출 되기 위한 조건으로 ‘밤’이 적절하다. ‘비합리적 충동’ 또한 즉석만남을 얘기 하는데 적합한 디오니소스적 요소다. 즉석만남은 그 동기부터 목적까지 모두 소모적인 행위이다. 그 소모로 인해 얻게 되는 것은 소모 그 자체일 뿐이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행위는 오로지 성적 ‘충동’에 의해서만 야기 될 수 있다. 이러한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은 비슷한 맥락의 두 디오니소스적 요소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술’과 ‘음악’이다.
이러한 즉석 만남의 문화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그리고 한국의 밤 문화에서 가장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꼽으라면 단연 ‘술’이다. ‘실존의 고통을 극단적으로 표출’ 하고, ‘탈아’되며 ‘망아적 황홀’에 이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의지와 감정의 과도한 분출’, ‘위계질서의 사라짐’ 등 디오니소스가 곧 주신(主神)이듯, ‘디오니소스적’ 이라 함은 ‘술에 취함’과 같다.
즉석만남에서 이러한 술이 빠지지 않는데,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술의 디오니소스적 요소와 관련이 있다. 이미 즉석만남 문화 자체가 디오니소스적인데, 술까지 가미되어 무한정적으로 성욕을 분출하려는 움직임을 만든다. 즉석만남과 술 모두 디오니소스적이라고 할 때, 이 둘의 차이점은 단순히 즉석만남은 ‘성욕’이라는 목적을 향해 있고, 술 자체는 사물로서 감정적 증폭제 역할 하는 등 목적을 이루게 해주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즉석 만남은 술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감성 주점’, ‘헌팅 술집’ 이라는 이름으로 성행하는 모든 술집은 이러한 즉석만남과 술 이라는 디오니소스적 요소들을 결합한 장소이다. 즉석만남의 목적과 술이라는 도구가 만나 큰 시장가치를 구현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즉석만남 술집’에서도 빠지지 않으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음악’이다. 음악 중에서도 특히 ‘락’, ‘힙합’ 등 다른 음악 장르에 비해 비교적 정신없이 몰아쳐 ‘망아’의 길로 안내하는 음악들이다. 이것들은 마치 ‘소음’처럼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 극단적인 공포가 그 음악 안에 내제 되어 있음으로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여 실존의 불안을 잊게 만든다. 락 음악과 힙합(랩 음악)에서 모두 ‘죽음’은 중요한 주제이다. 락은 ‘죽음’을 위시하는 것이 아닌 죽음을 위한 노래 그 자체이다. 그리고 힙합 음악의 경우 ‘갱스터 랩’과 같이 자신이 겪은 극한적 죽음의 위협을 하나의 ‘시적’ 가사로 담아냄으로서 죽음을 ‘승화’ 시킨다.
결국, 즉석만남의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술’과 ‘음악’ 이라는 도구 혹은 촉매제를 통해 나타나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감성 주점’, ‘헌팅 술집’, 등 과 이러한 이름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즉석만남의 문화가 형성된 여러 장소에는 이 ‘술’과 ‘음악’이라는 디오니소스적 요소가 빠지지 않는다. 때문에 음악과 술을 나이, 직업, 성향 등 개인의 취향에 맞게 제단 함으로써 여러 즉석만남 문화가 형성된다. 술과 음악의 종류, 즉석 만남 분위기는 자본주의의 마케팅 전략과 맞물려 많고 다양한 즉석만남의 장을 열어 놓았다.
즉석만남의 문화가 자본주의 마케팅이라는 큰 구조 안에서는 지극히 경제적인 생산성을 가져다주지만, 그 구조에 속한 개인에게 즉석만남은 소모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행위이다. 어떠한 결과물이나 정서적 안정을 도모하는 건설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룻밤 사이 지출되기만 하는 경제적인 손실부터, 이성에게 거절당했을 때의 좌절감, 밤새 술을 먹음으로서 오는 육체적 피로감등 자기 자신을 갉아 먹는 행위이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손실에도 불구하고 즉석 만남을 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성욕에 기인한다.
나는 숲을 사랑한다. 도시에는 욕정에 눈먼 자들이 너무 많아 살기 좋지 않다.
욕정에 불타는 여인의 꿈에 나타나는 것보다는 살인자의 손에 걸려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런데 이 남자들을 보라. 이들의 눈은 이 세상에서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117P.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러한 남성들의 맹목적 성욕 추구에 대한 언급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남성들에게 ‘순결’은 무의미 한 것으로, 타고난 것이 아닌 그저 주어진 것으로 이해된다고 한다. 순결 같은 성적 정조 관념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부과되는 의무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짐으로서 의무를 무시하고 거부 할 수 있는 것이다. 즉석만남 문화는 이러한 ‘성적 정조 관념’이 개입할 틈이 없다. 이러한 관념이 전제 되어 있다면 즉석만남의 문화가 시작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성관계’자체에 성적 정조 관념이 결여 돼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석 만남은 성 관계를 지향하는데, 주로 하룻밤 사이에 모두 벌어지고 또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즉석만남의 ‘일회성’은 순결 같은 정조 관념을 비웃는다. 때문에 즉석만남은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다. 큰 용기와 여러 면모의 소모를 통해 얻는 것이 일회성에 지나지 않아 허무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즉석만남을 통한 성욕의 분출에서 오는 쾌락과 마찬가지로 즉석만남을 통해 느껴지는 허무적 고통은 비교 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이 물음에 대한 니체의 단서가 있는 듯하다.
오, 인간이여, 조심하라!
깊은 한밤중은 무슨 말을 하는가?
“나는 잠들어 있었다. 잠들어 있었다.
깊은 꿈에서 깨어났다.
세계는 깊다.
낮이 생각한 것보다 더 깊다.
세계의 고통은 깊다.
쾌락은 마음의 고통보다 더 깊다.
고통은 말한다. ‘사라져버려라!’
하지만 모든 쾌락은 영원을 원한다.
깊고 깊은 영원을!"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486~487p.
‘낮’이 아폴론적 미학, 즉 합리적 이성을 뜻한다고 할 때, 이 낮이 생각한 것보다 세계는 깊고 쾌락 또한 깊다. 또한 쾌락은 마음의 고통보다 더 깊다.
즉석만남이 그 본연 속에 남성 주의적 폭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결국에는 상호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문화이다. 오히려 즉석만남의 시작, 즉 남성이 여성에게 처음 말을 거는 행위 등, 남성이 여성에게 어떠한 기호를 처음 보낼 때만이 남성이 주체로서 폭력을 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여성이 주체가 되어 남성의 목적을 가늠하고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의를 하는 목적은, 남자와 여성 모두 폭력성을 행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즉석만남이 남성 · 여성을 떠나 각 개인의 욕망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이다.
이 개인의 욕망은 현실에서 실현되기 쉽지 않다. 시대가 속한 정치적 상황 같은 사회 체제부터, 개인의 도덕적 견제까지 욕망을 억압하는 요소들은 많고 강력하다. 이 강력한 억압을 해쳐나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것이 ‘용기’이고 이 ‘용기’를 갖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가 ‘위버맨쉬’ 라면, 니체는 이러한 용기의 측면에서 ‘즉석만남의 문화’를 옹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즉석문화가 갖고 있는 욕망의 추구는 폭력을 낳기도 한다. 즉석만남 모바일 앱을 통한 폭행 · 강도 등의 범죄에서 보이는 지극히 물리적인 폭력부터, 즉석만남이 처음 보는 상대에게 호감을 얻는 경쟁이니 만큼 외모나 신체적 결함에 대한 비언어적 혹은 심하게는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 심적 · 철학적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에게 가 할 수도 있다. 니체의 말처럼 모든 것이 힘에의 의지고, 세상이 약육강식의 원리대로 돌아가며, 강자만이 용기 있게 자신의 욕망을 실현 시킨다면, 즉석만남의 성공 또한 ‘강자’임을 입증 하는 것일까? 그리고 즉석만남의 강자가 갖고 있는 ‘힘’은 진정으로 무엇인 것인가? 고민해 봐야할 문제다.
ref.
- 커버 이미지 : 영화 'lost in traslation'(2003)
- '헌팅'의 사전적 의미 : 위키 백과
- 안성찬, 『숭고의 미학』 - 파괴와 혁신의 문화적 동력, 유로서적, 2004.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