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린 Oct 17. 2021

'사랑손님과 어머니' & 프로이트

- 문학으로 배우는 첫 심리학 수업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누가 봐도 과부와 사랑손님의 사랑 이야기다. 그런데 사귈지 말지 내적인 갈등이 참 많다. 화끈하게 사귀면 사귀고 말면 말지 왜 이렇게 복잡할까? 까닭은 죽은 남편의 친구, 죽은 친구의 아내와 사귀려니 어쩐지 욕망이 불순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의식, 무의식, 전의식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의식, 무의식, 전의식으로 구분된다. 빙산으로 비유하자면, 의식은 수면 위에 나온 부분이며, 무의식은 수면 아래에 정신이고, 전의식은 수면 바로 아래 있다가 물결에 따라 보였다가 보이지 않다가 하는 정신을 일컫는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에서 '의식'은 사랑 손님과 어머니, 두 사람이 1930년대 현실에서는 서로 사랑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부의 재가가 사회 질서와 도덕을 어지럽힌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식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는 정신으로 도덕이나 윤리, 법을 떠올리면 된다. 이런 것들은 대개 해서는 안 될 금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욕망을 억압하는 힘이다. 먹고 싶어도 참고, 갖고 싶어도 욕구를 억눌러야 한다.


   반면에 무의식은 의식에 올라와서는 안될 욕망들이 쌓여 있는 곳이다. 폭력적인 생각, 복수심, 분노, 성적 쾌락 등이 뜨거운 마그마처럼 들끓는 곳이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에서 무의식 속에 가로놓여 있는 욕망은 서로 간절히 애정을 느낀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달걀을 더 샀고, 아저씨는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에 나갔다. 무의식은 끝없이 속삭인다. 어서 사랑을 성취하라고, 그래서 살 맞대며 살자고. 


  마지막으로 전의식은 무의식 위에 존재하면서, 의식의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의식이다. 평상시에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떠오르는 정신, 그것이 전의식이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에서 가끔씩 떠오르는 죽은 남편에 대한 기억은 전의식에 해당된다. 불쑥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그럼 자아, 초자아, 이드는 뭘까?


그런데, 의식, 무의식, 전의식만으로 마음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자기도 모르게 행하는 착한 일은 무의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오류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1923년에 마음에 대한 이론을 하나 더 내놓는다. 자아, 초자아, 이드의 이론이다. 여기서 이드는 욕망의 대리자이고, 초자아는 도덕이나 윤리,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를 뜻하며, 마지막으로 자아는 중재자를 가리킨다.  


  이드는 무의식 속에 억압된 성적 욕망이나 폭력에 대한 욕망을 가리킨다. 이드는 마치 충동에 사로잡힌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들은 규칙이나 도덕이 자리를 잡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참지 않고 당장 해결해야 한다. 마치 마트에서 아무 것이나 손에 움켜쥐는 어린아이와 같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에서 이드의 대변자는 옥희다. 그래서 아저씨한테 아무 생각 없이 아빠라고 부르고 유치원에서 꽃도 함부로 가져온다. 물론 사랑손님과 어머니도 이드에 사로잡히기는 마찬가지다. 어머니 마음 속에서 이드는 속삭인다.

  "사랑 손님과 만나! 그리고 사랑을 나눠! 욕 좀 먹으면 어때? 옥희 걱정 따위는 하지 마! 팔자를 고쳐!"


  그런데 이드가 어머니를 유혹하는 동안 누군가가 어머니를 노려보고 있다. ‘안 돼! 죽은 남편 친구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 화냥년이라는 소리 듣고 싶어! 딸은 어떻게 하고!’ 이드에 맞서 욕망을 억압하는 존재, 바로 초자아다. 초자아, 독일어로 ‘das Über-Ich’, 우리말로 번역하면 ‘나의 위’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초자아는 나를 ‘위에서’ 지켜보는 존재를 가리킨다. 누군가 나를 지켜본다면 어떨까? 욕망대로,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시선이 두려워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그럼 욕망과 도덕 사이의 갈등을 그대로 둘까? 이 둘을 중재시키는 것, 바로 자아이다.  자아는 일종의 중재자이자 협상가다.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 벌어진 다툼을 뜯어 말린다. 끓어오르는 욕구를 그대로 실행하고자 하는 이드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초자아. 둘은 서로 양 극단을 치닫는다. 둘의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자아다. 


  사랑손님이 옥희를 데리고 마트에 갔다고 치자. 옥희는 마트에서 젤리를 먹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 있다. 이드가 계속 속삭인다. ‘집어! 가져와! 뜯어! 어서 먹어!’ 그러나 그것을 가져오는 것은 안 된다. 왜냐하면 물건 값을 치르지 않고 가져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초자아가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때 나서야 할 존재가 누굴까? 바로 자아다. 자아의 선택은 뭘까?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젤리와 아저씨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기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젤리 앞에 멈춰 서서 아저씨의 손을 잡아끌면 된다. 자아의 멋진 중재는 결국 초자아도 만족시키기고 이드의 욕망도 성취시킨다. 


나의 중심은 자아가 되어야 한다!


  이드, 자아, 초자아. 이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갖춰야 하는 것은 뭘까? 그것은 자아다. 이드가 강력하면 문제를 일으키고, 초자아가 강력하면 욕구를 좌절하게 만들어서 늘 착한 아이로 살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자아가 적절한 균형을 잡고 살아야 한다. 욕망 덩어리인 이드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지켜내고, 초자아의 냉혹한 검열에서 자유를 찾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 바로 자아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가엾은 어머니는 협상가로서 자아의 힘이 너무 약했다. 이드와 초자아의 타협점을 찾는데 실패하고 결국에는 병든 사람처럼 되고 만다. 왜 자아가 약했을까? 그건 자기 삶의 목표 없이 옥희만 바라보고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옥희야, 난 너 하나면 그뿐이다.’ 왜 애꿎은 딸한테 집착했을까? 자기 삶을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결국 자아가 강하지 못한 어머니가 초자아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다. 이때 자아가 강하지 못한 사람은 지나치게 도덕적인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제멋대로,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이 된다. 두 가지 모두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몹시 괴롭게 할 것이다. 또한 초자아와 욕망 사이의 갈등으로 신경증적인 불안에 시달릴 수도 있다.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그런 경우다. 


욕망을 합리적인 의식으로 끌어올리자!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을까? 무작정 욕망을 억압하거나 회피할까? 아니면 자기합리화로 위기를 외면할까? 하지만 욕망은 늘 꿈틀대고 언제든 다시 일상을 공격할지 모른다. 욕망을 찾아 헤매는 꿈을 강박적으로 꾸고, 일상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연발할 수도 있다. 억압된 욕망을 해결하지 않는 한 변형된 욕망은 평생 쫓아다닐지 모른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목표가 억압된 충동을 당사자가 자각하게 만들어서 그 욕망을 자아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억압된 욕망을 합리적인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정신건강을 회복하자는 것이 프로이트의 목표였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발굴 작업을 수행하는 고고학자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한 층 한 층 억압된 욕망을 벗겨내 보자. 이처럼 무의식의 물꼬를 터준다면 불안과 실수, 강박 혹은 더 큰 사건은 천천히 사라지고 자아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손님과 어머니'짧게 읽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