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배우는 첫 심리학 수업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의 인격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엄격한 청교도가 지배하는 초창기 미국. 그리고 그곳에서 목사의 직분을 수행하는 딤즈데일. 그런데 누구보다 금욕을 실천해야 할 목사가 아름다운 여인 헤스터와 간통을 저지른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숨기는 딤즈데일. 그 이유가 뭘까?
딤즈데일이 범죄와 무관한 것처럼 행동했던 것은 그가 목사라는 가면을 쓰고 있기에 가능했다. 딤즈데일만 가면을 쓴 게 아니다. 헤스터 프린의 남편, 로저 칠링워스. 그도 역시 가면을 쓰고 있다. 자신의 아내가 부정을 저질러 처형대 위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그건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순간 자신이 부도덕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것이 알려지는 동시에 복수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가면은 자아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쓰는 일시적인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가면은 특별한 사람만 쓰는 게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필요에 따라 다른 인격으로 살아간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이런 인격을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본래 페르소나는 라틴어로 가면을 의미한다. 주변을 둘러보자. 사람들은 언제나 한결 같지 않다. 어떤 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말투도 달라지고 행동도 바뀐다. 집에서는 속옷 바람에 방귀도 마음대로 뀌지만 밖에서 그랬다가는 큰 망신이다. 직장에서, 집에서, 그리고 또 다른 집단에서 ‘나’는 각각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각 집단에서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감정이나 행동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페르소나가 가면이라면, 가면을 쓰고 벗는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어떤 가면을 쓸지, 또 언제 가면을 쓰고 벗을지를 판단하고 조율하는 정신, 융은 이를 자아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자아는 의식의 가장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문지기, 게이트 키퍼의 역할을 한다. 마음속에 있는 욕구와 생각 중에 무엇을 드러낼지 판단하는 역할, 그것이 자아가 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딤즈데일이 죄를 자백하는 대신 목사라는 가면을 쓰게 한 존재, 그것이 바로 자아다.
자아의 역할은 무엇보다 자기를 지키는 일이다. 자아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가면을 바꿔 쓰며 내면의 자기 욕망을 절제한다. 만약 자아가 약하면 어떨까? 모래를 이는 체가 성기다고 생각해보라. 자갈이나 돌들이 섞여서 고운 모래를 얻기 어려운 것처럼 자아가 약하면 부정적인 감정이나 사고들이 뒤섞여 인격을 망치게 된다.
자아는 필요에 따라 페르소나를 바꿔 쓴다. 집에서, 직장에서, 친구를 만나러 갈 때에도 자아는 페르소나를 교체한다. 그런데 만약 페르소나가 너무 많이 바뀌거나, 지나치게 자아와 이질적이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관계만 늘어나고 결국 진정한 자기를 잃게 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랜 시간 가면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본 모습을 잃는 건 당연하다. 늘 남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고달픈 삶, 자기를 돌아보기 어렵다.
딤즈데일을 보라! 그는 하루하루 쇠약해져 간다. 그 까닭은 진실을 외면한 채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와 죄인, 너무 이질적이지 않은가? 딤즈데일뿐인가? 로저 칠링워스. 그는 자신의 성을 버리고 가면을 쓴 뒤부터 성격이 변모한다. 그는 아내에게 비록 위선적인 사람이었지만 본래 꽤 괜찮은 학자였고 의사였다. 하지만 복수하기로 마음먹고 난 후부터 그는 달라졌다. 전에 없이 교활해졌으며 건강하고 온후했던 낯빛은 차츰차츰 검게 변하고 말았다. 이질적인 페르소나가 그나마 존재하던 선한 인격까지 망쳐놓은 것이다.
반면에 가장 괴로워야 할 헤스터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그녀는 부정과 수치의 상징인 주홍 글자를 단 한 번도 숨긴 적이 없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냈고 그녀의 탁월한 성실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도 함께 실천했다. 그녀는 자기의 죄를 숨기려고 페르소나를 쓰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 결과 세 사람 중 가장 건강한 정신력을 실천한다.
딤즈데일의 병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아무리 목사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도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죄의식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해결되지 않은 죄의식, 불쾌감을 일으키는 기억, 심리적인 갈등과 번민, 이런 것들이 일종의 심리적인 복합물을 구성하여 딤즈데일을 억누르고 있었다. 칼 융은 이처럼 무의식 속에서 부정적으로 연합된 심리적인 복합물을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우리가 흔히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결국 딤즈데일은 지독한 죄의식과 콤플렉스를 다스리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콤플렉스가 한 개인을 파멸시킨 것이다.
그런데 콤플렉스가 인생에서 꼭 나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헤스터 프린을 보라. 그녀는 수치와 치욕의 주홍 글자라는 콤플렉스의 상징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당당히 드러내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여 결국 자신에 대한 편견을 돌려놓았다. 수치의 상징 A는 이제 adultery(간통)의 약자가 아니라 Angel(천사)이거나 Amour(사랑)의 약자가 아닐까 하는 이들마저 생길 정도였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라. 자신의 콤플렉스를 유머러스하게 승화시키는 이들이 종종 있지 않은가? 신체적인 단점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키가 작거나 뚱뚱하거나 못생긴 얼굴의 개그맨들이 자기 단점을 극복하고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주지 않는가? 그들이 주는 웃음은 콤플렉스의 찬란한 재창조다. 또 ‘가난’이라는 콤플렉스를 무소유의 자유로 해석하는 이도 있고, 시골출신인 것을 당당히 밝히며 콤플렉스에 맞서는 이들도 있다. 만약 신분이나 지위, 학벌이나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면 콤플렉스를 재창조하는 이들을 떠올려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콤플렉스만이 문제는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인격과 전혀 정반대의 인격은 더 큰 문제다. 의사였던 로저 칠링워즈. 그는 겉으로는 자상한 의사로 살면서 속으로 증오와 분노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는 딤즈데일 목사를 용서하는 대신 철저히 그의 영혼을 망가뜨렸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인격과 정반대의 숨은 인격, 이를 칼 융은 그림자라고 지칭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향하는 성격과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가 잘난 척 해서 싫은 적이 있는가? 내 안에도 가끔씩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다. 누군가 무임승차해서 싫은가? 사실 내 안에도 한 번쯤 무임승차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게 바로 그림자다.
하지만 그림자가 항상 나쁜 것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칼 융은 무의식, 그중에서도 그림자가 창조적인 영감의 원천이 된다고 밝혔었다. 그림자를 적절히 인식하고 잘 표현하면 오히려 생활에 활력이 생길 수 있다. 딤즈데일을 떠올려보자. 그가 만약 자신 안에 있는 그림자를 잘 받아들였더라면 어땠을까? 그의 그림자는 청교도의 도덕에 억눌린 성적인 감정이었을 텐데, 이런 감정들을 억압하지 않았던들 그는 헤스터가 제안했던 대로 보스턴을 떠나 행복한 가정을 이뤘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림자도 내 안의 반쪽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의식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에는 ‘포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우주에 떠도는 설명하기 어려운 힘의 원천을 가리키는 이 말은 어둠의 힘이 되기도 하고, 선한 기운이 되기도 한다. 포스에 휩싸여 그 힘에 복종하면 사악한 다스베이더처럼 영혼이 타락하지만 포스를 제어하면 정의로운 제다이 기사처럼 악에 맞설 수 있다. 무의식 속 그림자도 똑같다. 그 힘의 방향만 잘 잡는다면 인류를 구원할지 또 누가 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