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머리 앤 셜리.

by 허니모카


나의 머리는 빨갛지 않다.


검은색 염색약을 잔뜩 바른 덕에 그토록 싫어하던 빨간색이 사라졌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검게 변하지 않았고, 흐릿한 구릿빛을 띤 녹색으로 변했다. 드문드문 빨간색도 남아 그나마도 완벽한 초록색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얼룩덜룩해서 누가 봐도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염색하다 망한 듯 보인다.

빨강이 싫어 색을 바꾸고자 하였고, 용기 있게 시도했으나 결과는 보기 좋게 실패다. 그래도 해보았으니 미련은 없다.


색이 잘 보이지 않게 꽁꽁 묶고 다니거나, 도저히 맘에 안 들면 싹둑 자르면 된다. 단발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돌아오는 핫한 스타일이니. 단발보다 숏커트가 좋겠다. 이 또한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나 정도는 돼야...


숏커트를 하고 보니, 딴 사람이다.

영 안 어울린다. 그렇대도 시무룩할 필요는 없다.


머리카락은 또 자란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먹는 것보다도 빠르게 쭉쭉 길어진다. 실패한 초록색 머리카락이 다 사라지고, 또다시 빨간색 머리카락이 자라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토록 바라던 적갈색이 될지도 모른다.


바람과 달리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의 빨간색을 좋아하면 된다. 빨강머리는 흔치 않은 색이니 개성을 중요시하는 요즘, 오히려 눈에 확 띄고 좋지 않나,라고 마음을 바꾸면 된다.

그것도 내키지 않으면, 다른 색으로 염색을 또 하면 된다. 염색약의 색상은 60색 색연필만큼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사실, 시간이 지나면 머리카락 색깔 따윈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것 말고도 더 중요한 것들이 계속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카락의 색깔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더 복잡하고 세밀하게 지속적으로 신경을 긁어대는 일들이 한 해 한 해 늘어난다. 그때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돈 주고 염색약을 사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까다롭게.


그러고 나면,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 이게 이토록 쉬운 일이었다니. 피식 웃음이 날지도 모른다.


한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할 만큼 고민했던 일들이, 거울 속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사건들이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건 시간이 주는 자연스러운 득도일 수도 있고, 타인과 사회에 치여 억지스럽게 성장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사실은 별 거 아니라는 거다.




염색을 해봤을 때와 염색을 해보지 않았을 때, 둘 중 어느 쪽이 더 머리카락을 원하는 색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을까?


생각할 것도 없이 첫번째다. 해보지 않으면 계속 빨강머리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초록색이 될지언정 염색을 시도해보면 다음엔 다른 색으로 시도할 수 있고 원하는 색을 가질 수도 있으며, 또다시 실패해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시도를 해보는 것, 도전을 해보는 것.

그것이 실패를 가져오든 성공을 가져오든 결과를 따지기에 앞서 인생에 하나의 중요한 과정이 된다.


나의 머리는 빨갛지 않다.


신호등에서 ‘가다’를 뜻하는 초록색이며, 드넓은 초원을 연상케 하는 초록색이다. 어디서나 볼 수 없는 흔치 않은 초록색이다.


지금은 비록 실패했지만, 머리카락이 자라고 초록색이 사라지고 나면 또다시 도전할 것이다.

원하는 색을 갖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