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고 믿었던 만큼 상대방도 저에 대한 마음이 똑같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죠?' 때로 내가 상대방에게 주었던 진심이 나 혼자만 일방적으로 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기 어려워 답이 없는 결론을 두고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다.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듯, 그 일을 곱씹는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상대에게 주었던 마음을 모조리 부정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냉정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만 상처 받는다고 여기는 이면에는 상대방에 대한 높은 기대치도 한 몫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은 나한테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는 사람이라는 기대치가 문제인 것이다. -양창순
되뇔수록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할퀴고 깊은 생채기가 난다. 그만 생각하자해도 쉽게 멈춰지질 않는다. 그만큼 우리는 내가 애정 했던 사람, 그리고 그 마음의 크기가 다른 이들보다 컸던 사람에게, 사실 나는 그정도의 존재가 아니었단 걸 깨닫게 된다는 건 큰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성난 황소처럼 혼자 분노했다, 부정했다, 요동치는 감정 기복을 겪는다. '내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아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대답 없는 질문을 혼자 끊임없이 한다. 그러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던 중 우연히 법륜 스님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 받은 한 여학생의과 이야기였는데 참 많은 위로가 됐다.
학생: 저는 친구를 자랑하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친구는 제 험담을 하고 다녔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요.
법륜스님: 자,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저 구멍에 공을 넣고 싶어 공을 던졌어요. 내가 공을 넣고 싶어 던졌는데 그럼 무조건 꼭 들어가나요?
학생: 들어갈 때도 있고 안 들어갈 때도 있어요.
법륜스님: 넣고 싶어서 공을 넣으려고 던졌는데, 그럼 공이 꼭 들어가야 하잖아요? 내가 넣고 싶고 넣으려고 던졌으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학생: 들어가면 좋겠지만 안 들어갈 수도 있겠죠.
법륜스님: 내가 너 좋아, 하면 상대방도 반드시 나도 너 좋아,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학생: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법륜스님: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면 그건 옳은 행동이고, 그게 아니면 그른 행동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자연스러운 이치가 아닙니까?
학생: 자연스러운 이치인 것 같습니다.
법륜스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을 칭찬했는데, 그 사람은 나를 비난할 수도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왜 상처를 입어요. 봄에 잎이 피고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인데.
맞는 말이다, 누가 준만큼 상대도 나에게 꼭 줘야 하는 거라 말했었나.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 없다. 나 혼자 성급하게 내린 정의에 혼자 아파하는 것이다. 나는 상대에게 1000을 줬는데 상대는 나에게 100을 주었다면, 혹은 100조차 주지 못했다면, '왜 내게 100밖에 주지 않는 거야'가 아니라 상대방은 내게 100만큼을 줄 여유밖에 없는 사람인 것이다. 상대가 줄 수 있는 건 그만큼인데 더 큰 양을 바랐기에 상처가 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좋아한다고 상대도 나를 당연히 좋아해 줘야 하는 게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다.
우리는 수많은 상처를 받고 아파하지만, 반대로 어쩌면 누군가도 나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있는 상처의 제공자 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사 그렇다. 일방적인 건 없다. 나는 그런 적 없다 할지라도, 알게 모르게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상처 받지 않는다. -박상천
상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란 말이 아니다. 내가 해준 것에 대해 당연히 돌려받을 것이란 기대는 조금 놓아두라는 것이다.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쩌면 상처는 우리는 내가 이만큼 내주었으니 상대도 그만큼은 내게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신, 그러니 너무 아파할 것 없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사는 존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