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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교사 Jun 23. 2018

독일 유치원엔 학습이 없다

“아니 도대체 왜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거죠!”     


큰 아이의 유치원 보모인 크리스티안(Christian)에게 물었다. 그녀는 이 질문에 오히려 당황해 했다. 마치 그런 질문을 처음 받아 봤다는 것처럼. 그리곤 심호흡을 한 후 이렇게 말했다.     

“프라우 권(Frau Kwon)! 학교에 가서 해야 할 공부를 왜 유치원에서 하죠? 학습은 학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공부하면, 아는 것만큼 학교수업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없게 됩니다.”     

맞다. 그녀의 말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맞다. 하지만…     


독일 유치원엔 학습이 없다     


큰아이가 독일 유치원 생활 3년차에 접어들 무렵, 유치원에서 예년과 다른 색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초등학교 입학 준비반’이 개설된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독일 유치원에는 학습이 없었다. 영어는 고사하고 모국어인 독일어의 알파벳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런 생활을 지켜봐온 입장에서 이번 일은 사뭇 기대도 되고 호기심도 생겼다. ‘이제야 독일도 정신을 차리는구나’ 싶었다.     

그래, 최소한 알파벳은 줄줄 읊어야 학교에 가지.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학부모들에게 나눠진 안내문에는 기대했던 국어(독일어), 영어, 수학 등의 학습내용이 전혀 없었다. 대신 오리고 붙이고 만드는 창작활동과, 안전교육, 그리고 소방서‧동물원‧박물관 등 견학 중심의 체험학습이 주였다.     

사실 큰아이 3년, 작은 아이 5년간의 유치원 생활을 지켜보면서, 유치원에서 많은 걸 가르쳐 주리라는 바람과 욕심은 애진작에 눈치껏 버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지적인 학습과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아이를 생각했을 땐,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바람 하나,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최소한 알파벳이라도 가르쳐 주겠지!’ 하는 것이었다. 이러다가 큰아이는 알파벳 철자 하나 모르고 학교에 들어갈 참이었다.     

그런 참에, 유치원 보모에게 마치 대역죄인 마냥 질타를 들은 거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선 이렇게 되묻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안하면, 집에서라도 하겠지. 독일 엄마들이라고 뭐 크게 다르겠어?’      

딸아이 단짝 친구 엄마에게 이 부분에 대해 물어 보았다.     

“유치원에선 알파벳을 가르쳐 줄 마음이 없어 보여요. 그럼 부모들이 집에서 가르쳐 학교에 보내나요?”     

그 때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학교에 가면 다 해줍니다.”     

그녀는 아이의 학습에 대해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고, 학교에 대한 믿음도 확고했다.     

자식교육에 관심 없는 부모가 어디 있고, 내 자식 잘되길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마는 독일 부모들은 좀 많이 달랐다.     

주변 어디를 둘러 보아도 아이의 선행학습에 조바심을 내는 부모는 없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렇게 법과 제도를 잘 따르는 민족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냐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아니다. 제도에 순응하는 게 아니라 교육에 대한 바른 철학이 보편화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게다. 교육방침의 단순한 논리 중 하나. ‘선행학습은 아이를 망칩니다. 선행학습은 학생들을 학교생활의 부적응자로 만듭니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학교 교육은 무너집니다’라는 구호를 철저하게 믿고 따르는 분위기와 국민성, 이것이 바로 건강한 교육풍토를 만들고 있었다.     

이런 조기교육의 바람이 유치원은 물론이고 부모들 사이에서조차 불지 않는 건 너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 코가 석자여서 아이들 선행학습에 마음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경쟁사회에서 조기교육에 관심 없는 세상이 있다니! 이 믿어지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내게는 요지경일 뿐이었다.     

결국 독일 유치원 보모인 크리스티안의 말대로 아이에게 알파벳조차 가르치지 않고 학교에 보냈다.      

반신반의했던 사실이 실재 눈앞에 펼쳐졌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국어(독일어)시간에 배운 거라고는 알파벳 아(A)에서 제트(Z)가 전부였다. 처음에는 알파벳을 인쇄체, 필기체로 몇 개월간 쓰기만 하다가, 시간이 좀 지나니까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단어, 예를 들어 아(A)하면 아펠(Apfel,사과), 베(B)하면 비르네(Birne,배) 등을 함께 익혀 나갔다. 1년간 옆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참 징하게 진도가 안 나간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단어를 읽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책을 줄줄줄 읽어 내는 것을 목격했다. 까막눈이던 아이에게 책을 읽게 해준 학교와 선생님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치원 보모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만약 유치원 보모 말을 무시하고, 책을 읽을 정도로 공부를 시켜 학교에 보냈다면 어땠을까? 생애 처음으로 내딛은 배움의 현장에 잘 적응했을까? 배우는 것이 즐겁고 흥미롭게 느껴졌을까? 그리고 학교와 교사에 대한 감사와 신뢰감이 생겼을까?     

이게 바로 순리가 아닌가 싶다. 이런 순리를 따르는 것이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닐까?     


※ 이 글은 더퍼스트미디어와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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