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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랑이 Aug 05. 2021

제발 나의 혈중 아아메 농도를 채워줘

너무 더웠던 독일 첫 여행의 날

폭염이 약 3주쯤 지속되고 있는 지금 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마시는 음료수는 나에겐 단연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첫 잔은 항상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 한 잔 마시고 얼른 한 바퀴 동네 산책을 하고 오면 유리컵에 얼음을 가득 담고 캡슐 커피머신으로 커피를 내린다. 진한 향기와 함께 짙은 갈색의 에스프레소가 내려오고 그 뜨거움에 얼음이 녹아버리면 얼음을 더 넣는다. 금세 유리컵 주변에 물방울이 맺히고 그대로 한 모금 먹는 순간 체감온도 5도는 내려간다.


그 순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정말 너무 맛있다.


더운 날일수록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더 더 더 마시게 된다. 재택근무를 하는 지금은 선풍기를 틀어놓고 일을 하다가 집에서 만들어 시원하게 마시고, 밖에 나가야 할 때는 곳곳에 존재하는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제일 저렴하고 신속하게 마실 수 있다. 차가 없는 뚜벅이이지만 텀블러에 가득 담아다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있으면 더운 날에도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래 어디든 갈 수 있지.


그때 38도가 넘던 뷔르츠부르크에선 안 그랬어. 그곳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없더라고......


5살 아이와 비행기를 경유하며 와야 해서 약 24시간 깨어있다가 도착한 숙소는 너무 더웠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자 금방 새벽이 와버렸다. 너무 피곤했다. 아이도 시차 때문에 금방 몇 시간 만에 깨버렸다. 독일의 대부분의 에어비앤비는 커피 캡슐머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얼음은 역시나 없었다. 일반 얼음틀을 가져오진 않았지만 1회용 아이스큐브 백을 사 왔던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전날 이걸 얼려두지 않은 나 자신을 욕하면서 물을 담아 냉동실에 넣어보았다. 한국에서 한번 실험을 해보고 가지고 왔었어야 하던 건데...... 1회용 팩은 금방 얼긴 했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불편했고 얼음도 너무 작았다. 결국 미지근한 아메리카노 한잔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길을 나섰다.


그날은 몇 년 만에 대학 동기인 정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침 8시에 일찍 만난 정은 몇 년 만에 봤다는 게 믿어지지 않게 여전했고 너무 반가웠다. 뷔르츠부르크는 큰 도시가 아니라면서 아침 일찍 유명한 곳에 가보고 너무 더울 땐 쉬자는 말에 모두 찬성을 했다. 무슨 포도밭도 지나고 유명한 다리도 지나고 정말 유럽스러운(?) 건물들을 구경했다. 분명 아름다운 궁전과 건물과 분수였는데, 이름이나 모습보다는 궁전 뒤편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몽슈가 노숙자처럼 잠을 자고 지노는 돌멩이를 줍고 나는 정과 수다를 떨었던 기억만 난다. 중간중간 쉬고 지노 수발도 들고 사진도 찍고 하다 보니 금방 시간이 갔다.

10시가 넘더니 너무 더웠다. 태양광선이 거의 나를 찌를 것만 같았다. 팔다리가 타들어 가는 거 같아 선크림을 미친 듯이 처덕처덕 발랐고 끊임없이 그늘을 찾아 헤맸다.

대체 그늘은 어디 있는가.


아니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그 전의 유럽여행에서 배웠던 것 중 하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스타벅스에만 있다는 거였다.


정에게 물었다.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파는 데 있어? 스타벅스 같은데."

"뷔르츠부르크는 작은 도시여서 스타벅스가 없어. 프랑크푸르트나 뉘른베르크 가야 할 텐데...... 이곳에선 아이스 아메리카노 파는 곳 본 적 없는 거 같은데?"

"스타벅스가 없다니...!"

"혹시라도 카페 가서 아이스커피 마시지 마. 그거 커피에 아이스크림 얹어준다."

"아포가토 같이?"

"아니, 그냥 좀 차가운 커피에 아이스크림을 얹어줘."


맙소사.


내가 독일 살았으면 이런 날씨에 길거리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팔았을 텐데.

불티나게 팔렸을까 아니면 혹자 말대로 국밥 차갑게 먹는 기분이라 안 팔렸을까


카페에 들어가서 메뉴판을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덥다고 재미없다고 칭얼대던 지노에겐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몽슈에겐 유명하다는 사과주스를 시켜줬다. 나랑 정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유럽의 노천카페에서 먹는다는 즐거움도 잠시.. 너무 덥다. 아이는 진짜 천천히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녹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애엄마답게 금방 아이스크림 국이 되어버린 접시를 후루룩 마셔버리고 정에게 말했다.


"에어컨 있는 식당으로 가자."


정이 열심히 검색을 하고 알아낸 후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 앞에 쓰여있는 칠판에 이렇게 크게 쓰여있다고 정이 말했다.

'에어컨 있음'

식당 앞에서 주접을 떨며 사진을 찍었다.

궁전이고 시청이고 카페고 모두 에어컨이 없었는데, 이곳은 에어컨이 있다!!


오픈 시간 전엔 못 들어온다고 해서 식당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들어갔다.

가게로 들어가니 숨을 쉴 수 있었다.

아아.... 에어컨이 너무 은혜로웠다. 따뜻한 커피고 뜨거운 슈바인학센이고 뭐고 다 먹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지구를 더 덥게 만든다는 이 기계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오전 내내 피곤과 더위로 징징거리던 지노도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자기는 소시지를 먹겠다고 했고 우린 기분 좋게 식사를 하였다. 사실 음식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원했던 것만 기억이 있다. 만약 우리가 여행객이 아니었으면 거기서 음식을 계속 시키면서 앉아있었겠지만, 사람이 점점 불어나는 걸 보면서 다들 같은 마음이겠지 싶어 계산을 하고 나왔다.


오후에 갈만한 곳이 없었다.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져 있는 곳이라면 오늘 같은 날씨에 갔을 텐데, 남편의 등은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고 우린 어딘가 건물 안에 들어가긴 해야 했다.

비록 에어컨이나 선풍기는 없지만, 길바닥 보단 낫지 않겠냐며 우린 차가운 물을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이런 날씨에선 오히려 창문과 창문 가림막을 닫고 건물 안에 있는 게 더 시원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정과 나는 다소 어두컴컴한 주방에서 계속 냉장고의 물을 마시고 다음 독일에서의 일정과 내가 이해 안 되는 독일어 사이트들을 검색해가며 물어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노랑 남편은 욕실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비록 욕조는 없었지만 샤워부스를 향해 둘은 땀이 나면 계속 샤워를 해가면서 비눗방울을 날렸다.


피곤하고 덥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지 못해 다소 힘들었지만 그날 소중했던 기억은 어떤 멋진 건물도, 유명하다는 와이너리도 아니고 오랜만에 정과 함께 웃으며 나눴던 대화와 지노가 샤워부스에서 비눗방울을 날리며 까르륵 웃었던 웃음소리 었다.


저녁에 우리는 싸온 한국음식을 정과 나눠먹으면서 (정은 고추참치와 참기름을 비벼먹으며 눈물을 흘릴 뻔했다.) 정에게 가져온 한국음식을 마구 싸주고 저녁 늦게 놀이터까지 다녀오면서 헤어졌고 지노는 저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코피를 흘렸다. 더위와 피로가 아이를 진짜 피곤했나 보다.  


다행히도 이 날이 독일에서 더웠던 마지막 날이었고, 나는 얼음틀을 기언치 사서 매일 얼음을 꽉꽉 얼리며 매일매일 셀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유럽에 다시 간다면 무조건 실리콘 얼음틀을 챙겨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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