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는 내 그리움에게
잘 지내?
나는 잘 지내. 말하고 보니 일본 영화 「러브레터」가 생각난다. 아주 어렸을 때 보고 작년 이맘때 다시 봤었는데. 나도 어른이 됐나 봐. 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가 왜 하얀 설원을 가르듯이 뛰어가서 숨을 고르고 기껏 한다는 말이 굳이 "잘 지내시나요. 나는 잘 지내요."였는지 이제야 알겠더라고. 10년 전, 5년 전에는 우습기만 하던 그 대사들이 말이야.
나도 꾹꾹 마음을 눌러 담아 너에게 묻고 스스로 답해봐.
잘 지내? 나는 잘 지내.
영화 중간중간에 많이 울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또 다른 주인공 후지이 이츠키가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했을 때 울먹이는 이츠키를 따라 대성통곡했던 기억이 나. 이츠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너는 알아? 나는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한데... 마음을 담은 편지가 너무 늦게 쓰였다는 걸 뒤늦게 알았던 것 같아. 전하고 싶은 마음이 한 장에 빼곡히 담겨 있지만 이제 편지가 수신인을 잃어버린 거야. 너무 늦었지만, 나도 부치지 못할 편지에 내 마음을 담아 미련의 우표를 붙여 너에게 보내.
시간이 참 많이 흘렀어, 너도 그렇게 느끼지? 참 많은 것이 변했어. 사계가 몇 번이나 내 주변을 배회했어. 나는 그사이에 아파서 병원도 몇 번 가고, 짧게 짧게 여행도 가고, 최근에는 이사도 했어. 시간이 흐른 만큼 확실히 나이도 든 것 같아. 아침에 화장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면 얼굴이 퍼석거리고 옷 입는 취향도, 음식 취향도 덩달아 올드해졌어. 나의 시간이 무심하고 야속하게 꾸준히 움직인 것처럼 너의 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서 우리 사이에 상상할 수도 없이 넓은 간극을 만들었겠지?
가끔 생각하고는 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너인지, 너를 둘러싸던 시간인지, 그 시간 속에 행복했던 나였는지를 말이야. 근데 그중에 구체적으로 어느 것인 것 같기도 하고 모두 다인 것 같기도 해. 예전과 비슷한 장소, 시간대, 말투가 어디선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내 앞에 데자뷔를 선물해줄 때, 그런 원치 않은 선물을 받을 때 당황하는 나는 내 그리움의 근원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미련한 나인 것 같아. 미련에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름도 미련스럽게도 '미련' 아닐까?
과거는 항상 아름답게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어.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야. 하루를 살며, 감사할 일들이 참 많은데도 소리 없이 그 자리에서 차분히 반짝이는 과거를 뒤돌아보면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올라. 그냥 그 시간이 너무 예뻐서 샘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 어찌 됐건 나는 등을 돌려 계속 '지금'을 살아야 하니까. 그 순간을 함께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기억은 잔인한 달콤함인 것 같아. 마르셀 프루스트가 옳았어.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로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가 이런 말을 했다는데 할 일 없는 오후에 골라낸 기억이 가끔은 사람을 천국으로 보냈다가 또 가끔은 지옥으로 내몬다는 거 알아? 반반의 확률로 말이야.
이 책을 모티프로 한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 신비로운 여인 마담 프루스트는 주인공 폴에게 기억에 대해 한 수 가르쳐주거든? 기억은 캄캄한 연못 속에 숨어 사는 물고기와 같으니 추억이 좋아할 만한 미끼를 던져보라고 조언을 해. 나도 가끔 허전해질 때 내 일상의 검은 물에 여러 물고기 밥을 던져서 추억을 낚아 올리고는 해.
이쯤 되면 그리움이 나를 붙잡고 있는 걸까, 내가 그리움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언제였더라. 기억은 참 신기해서 어떨 때는 생생하게 와 닿다가도, 어떨 때는 물속에 꼭꼭 숨어 도망쳐버린 물고기처럼 온데간데없을 때가 있어. 그날이 그런 날이었던 것 같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는데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들었어. 그냥 비가 오길래 아무 생각 없이 듣다가 그만 펑펑 울고 말았지 뭐야. 가사가 뭐였더라...
이젠 나의 희미한 기억 속에
너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너의 슬픈 미소만이 나의 마음속에
가득 남아 흐르고 있어
맞아. 이 부분이었던 것 같아. 고함치듯이 내뱉어지는 랩 부분에서 문득 깨달은 거야. 내 기억도 시간과 함께 빠른 속도로 닳아 없어져서 곧 희미한 감정만 남을 것이라는 슬픈 예감을 말이야. 전시회에서 작품 하나를 보고 그 전시회장을 떠나고 한참이 지나면 그림의 세세한 부분은 기억 안 나고 대강의 인상만 기억에 남잖아. 과거가 된 수많은 기억들이 흐물흐물 뼈대를 하나씩 잃어버리면서 형체가 없어진다는 걸 그때 깨닫고 펑펑 울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고. 시간을 되돌릴 수도, 기억을 잃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래도 김건모는 비가 그치고 나면 지친 그리움의 대상을 찾아 떠날 거라고 했는데 나는 그럴 수도 없었어. 그 후에 많은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정말로 희미한 감정밖에 남지 않았어. 그때 두려워했던 것처럼 말이야.
참 좋아하는 스님 중에 법상 스님이 있는데, 『날마다 해피엔딩』이라는 책에서 스님은
즐거움이 오든 괴로움이 오든 그것은 한 줄기 바람이 내 존재 위를 스쳐 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어떤 인연'이 잠시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들뜰 것도, 가라앉을 것도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하더라고. 말처럼 쉬운 일이면 참 좋을 텐데. 나는 아직 나를 두고 떠나는 어떤 인연에 의연하지 못한 철부지인가 봐. 나이는 먹었는데 아직 내 안의 내가 자라려면 시간이 좀 더 흘러야 하나 봐.
그런데 시간이 지난다고 되는가 의문이기도 해. 사람들은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슬픔에 대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위로하고는 하는데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게 참 많잖아. 내 안의 그리움이 그렇듯이.
오늘 쓰는 이 편지는 한 줄기의 가을바람으로 시작됐어. 감기에 걸려 콧물을 훌쩍이며 하릴없이 추억을 낚고 있다가 문득 분 바람에 편지를 쓰게 되었어. 왠지 그래야할 것만 같았어.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마음속에 꽉 찬 짐의 무게를 조금은 덜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했고. 너에게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편지를 쓰니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이 편지가 내게 무겁게 다가왔나 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말을 할 수가 없네.
마음에 담긴 말들을 꾹꾹 눌러 담아 편지를 썼지만 아직도 내 안의 응어리는 그대로인 것 같아. 그립고, 또 그립고, 앞으로도 한참을 더 그리울 것 같아.
편지를 보낼까 몇 번이나 생각해봤지만, 역시나 안될 것 같아.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내 기억 속의 추억이 그렇듯
너는 계속 그대로 아름답게 반짝여줘.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이상, 이런 시(詩)
수신 : 이 세상 모든 그리움에게, 그리고 그리움에 몸서리치는 이 세상 수많은 '또 다른 나'에게
발신 : 2019년 가을의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