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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Dec 23. 2021

잠이 안 와서 쓰는 글

이 밤은 너무 길어

2021. 12. 23. 오전 1:54~2:36


언제였더라. 그래, 3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어. 여느 때처럼 칼퇴하고 1001번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1시간이 걸려서 정류장에 내렸지. 그날 내가 무슨 일을 했더라. 기분은 어땠지? 아마 좋았을 거야. 엄마가 부산에 내려왔었거든. 아빠도 일찍 퇴근하는 날이었어. 맞아, 좋지 않을 리가 없네.


잘 생각해보니까 2018년 8월 말이었던 것 같아. 곧 서울로 올라간다고 들떠있던 때였거든. 걸음마다 뒤축이 해진 구두가 벽돌 바닥에 푹푹 패였어. 편의점에 갔었어. 새로 생긴 불독 하우스? 같은 곳 뒤편에 있었는데 개가 너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움츠려서 걸어갔어. 난 참 우스운 사람인 것 같아.


GS25에서 4캔에 1만 원 하는 맥주를 무려 8캔을 사는데 옆에 웬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었어. 할머니가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계시더라고. 그런가 보다, 했지. 난 별로 주변에 관심 있는 편이 아니거든. 맥주를 이고 나오는데 저 멀리 횡단보도 근처에 편의점에서 본 그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어. 어떻게 나보다 빨리 저기까지 간 거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주춤주춤 그쪽으로 걸어갔어.


할머니는 새하얀 백발이었는데 머리에 흰 핀을 가지런히 꽂고 있었어.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위에는 하얀 카디건을 걸쳤더라고. 할아버지도 할머니만큼이나 정말 새하얀 백발이었어.


나도 모르게 훔쳐보다가 눈길이 아래로 갔는데 할머니의 오른손과 할아버지의 왼손이 깍지  채로  잡혀있었어. 되게 가볍게 잡은  같은데 출렁다리처럼  팔이 힘있게 곡선을 그리고 있었어. 할머니의 왼손에 아이스크림 하나, 할아버지의 오른손에 아이스크림 하나가 붙들려 있었어. 콧구멍으로 여름의 열기와 자잘한 바람의 찬기가 제멋대로 뒤섞여서 들어왔어.  속으로 토네이도 같은 기운이 가득 차는  느껴졌어.


잔잔히 부는 바람에 할머니의 치마가 나부끼고 있었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짧지는 않았을 거야.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는데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그리도 나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 서 있었거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정수리 위로 그럴듯하게 예쁜 하늘이 펼쳐져있었어. 그,있잖아. 막 그런 하늘. 진파랑의 물감이 가득한 물통에 흰색과 분홍색 물감을 연하게 풀어놓은 것 같은 하늘. 아이 참, 이렇게 말하는데도 이해 못해?


찰나는 영원이고, 영원은 찰나인 것 같았어. 맞잡은 손은 흔들림이 없었고 두 사람은 가볍고 무겁게 그 자리에 있었어. 어떤 이의 인생의 목표라는 건 저런 모습인 걸까? 저 두 사람은 그 끝에 서 있는 건가? 그럼 나의 끝은 어떤 모습이지? 이마에 맺힌 땀이 주룩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어.


할머니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다시 한번 잔바람에 요동칠 때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어. 그때 내 눈앞이 조금 뜨겁게 흐려졌던 것 같은데. 코를 훌쩍이면서 괜스레 그날 하늘을 찍었어. 봐, 이게 그날 하늘 사진이야. 이제 이해돼? 다시 보니까 8월 말이 아니라, 광복절 전날이었네.

날씨가 춥잖아. 2021년이 가는 것도 모르게 살이 애는 하루잖아. 근데 오늘, 그때 그 여름날이 떠올랐어. 잔잔한 바람과 넘실거리는 열기 속에서 가볍게 붙잡고 있던 주름진 두 손. 그때 그 할머니, 할아버지 말야. 여전히 두 손을 맞잡은 채 부산의 어느 외진 거리를 걷고 있으려나? 오늘은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골랐을까?


이렇게 무른 순간이 찾아와서 나를 흔들면, 나는 어김없이 무너져. 가슴 한가운데를 그 여름날의 뒤섞인 공기가 후벼 파는 것 같아. 제정신 아닌 것 같다고? 그냥 섬세한 거라고 해줘. 너도 그런 날 있을 거 아냐. 나처럼 잠이 오지 않는 날. 찰나가 영겁처럼 나를 붙들어 매는 날. 모르겠다고? 에이 생각났으면서 그래. 어쩌면 우리는 그런 순간이 모여서 우리가 되는 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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