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물 못 잃는 사람
중학교 2학년 때 영드 "셜록"이 우리 반을 강타한 이래로, 추리물, 수사물을 미친 듯이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셜록 홈즈며 아르센 뤼팽 전집, 명탐정 코난 따위를 독파하고 싸인, 신의 퀴즈 등의 한국 드라마부터 CSI 시리즈를 챙겨보기도 했다. 왓챠플레이와 넷플릭스를 이용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머독 미스터리, 크리미널 마인드 등등을 정주행하는데, 이 '정주행'할 수 있다는 게 꽤 중요하다. 온갖 드라마를 추천받고 까탈스럽게 고르지만 끝까지 본 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10화 이내로 완결인 짧은 드라마도 재밌다고 하면서 절반 가량만 보고 관둬버리는데, 한 번 관두면 앞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서 다시 보고 싶어도 영원히 엄두 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보다 만 드라마들에 생기는 왠지 모를 죄책감까지 덤으로 따라온다.
반면 수사물은 사건 발생 - 난관 봉착 - 결국 해결! 이라는 단순한 구조와 옴니버스 구성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부담 없이 꾸준히 볼 수 있다. 실제로 (욕하면서 보는) 크리미널 마인드는 무려 2017년에 보기 시작해서 이제 겨우 14개 시즌 중 7시즌을 끝냈다. 재미도 재미지만, 한동안 안 보더라도 언제든지 중간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좋다.
수사물에 대한 나의 애정 덕분에 뉴욕 경찰서를 배경으로 하는 "브루클린 나인-나인"은 부담없이 시작할 수 있었는데, 더군다나 거하게 취향 저격을 당해버린 이유는 코미디 시트콤인 것을 아예 모르고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볍고 어이 없이 진행되는 수사 과정 중에 뻘하게 터지는 개그가 웃을 일 없는 시리어스물만 주구장창 보던 중에 신선하게 다가왔다. 부담 없이 보는 수사물 중에서도 정말정말 부담감 제로로 볼 수 있는, 유쾌하게 본 뒤 그 잔상을 곱씹게 하는 "브루클린 나인-나인", 여러분들에게도 소개한다.
[엄청난 반전은 없지만 그래도 스포일러 주의]
대부분의 시트콤이 그러하듯 브루클린 나인-나인을 사랑하게 하는 것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에 있다. 이 시트콤을 왜 좋아하는가 설명하기에 앞서 주요 인물들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그러고 나면 왜 좋아하는가, 가 다 드러날 것 같기도 하다.
제이크 페랄타
"제이크 페랄타, 제 형사 중 최고에요. 악당 잡기 좋아하고 문제 해결도 잘하죠.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자아 성장입니다." (테리 제퍼즈, 시즌 1, 1화)
이 드라마의 메인 주인공이자 브루클린 99번 지구 관할 경찰서의 가장 뛰어난 경찰관, 이지만, 제대로 어린애다. 시종일관 편안하고 가벼운 태도로 수사에 임하고 남 놀려먹기 좋아하지만 결국 사건을 뚝딱 해결하는 '주인공 치트키' 그 자체인 캐릭터.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전혀 없던 생부와의 관계가 좋지 않고, 이를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로 자주 언급하기도 한다. 초반에 부각되는 과하게 유치하고 어린애 같은 성격도 이의 영향이 있는 듯 보이는데, 레이먼드 홀트가 새로운 서장으로 부임한 뒤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인다. 첫만남에서 홀트의 넥타이를 매라는 명령을 아예 무시하거나 비꼬며 넥타이를 매고 바지를 안 입는 등의 반항을 하며 기싸움을 하고, 그가 믿고 맡긴 일을 크게 만들어 실수하고 수습하는 과정들을 겪고, 함께 잠입수사를 해 곤경에서 서로를 구해주며 끝끝내 신뢰를 쌓는 모습이 보이는데, 자신의 결핍이었던 아버지-아들 관계를 홀트와 형성하며 철이 들어 간다. (실제로 제이크가 홀트에게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냐고 묻기도 한다. 거절당하지만..)
레이먼드 홀트
시즌 1 1화에 99 경찰서에 새로 부임한 서장. 어떤 상황에서도 웃지 않고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으며, 칼같은 원칙주의자로 제이크와 모든 게 정반대라고 보면 된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흑인에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했고 따돌림을 당했다. 종종 무시당하던 젊은 시절의 회상 씬이 짧게 등장하기도 하는데, 웃음과 개그가 난무하는 이 드라마 속에서 그 장면들만큼은 늘 홀트의 무표정한 얼굴에 주목한다. 극의 분위기보다 너무 진지하지는 않을 만큼 짧게, 예사의 회상 씬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그러나 비웃는 웃음소리들과 홀트의 표정만큼은 정확하게 짚는다.
수많은 무시와 차별 속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 게이와 레즈비언 뉴욕경찰협회를 창립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장기간 협회의 유일한 협회원이자 협회장이었다) 결국에는 실력을 인정받고 승진하며 남편과 행복한 결혼생활 중에 있다. 그렇게 포부를 안고 99 경찰서에 왔더니 제이크 주도 하의 난리통이고, 자신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들 투성이다. 제이크가 홀트의 부임 이후 철이 드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뻣뻣한 대나무 같던 홀트는 99 경찰서에 녹아들며 좀 더 유도리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절대 받아주지 않던 제이크의 파도타기 춤에 결국 화답하고, 절대로 줄임말 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하다가도 결국 경찰서에서 유행하는 줄임말을 써 버리고, 할로윈마다 반복하는 게임에 열정적으로 임하기도 하며 99 경찰서의 가족이 되어간다. 물론 개그 포인트는 그 와중에 절대로 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티에서 춤을 출 때조차.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조차.
에이미 산티아고
99 경찰서에서 제이크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홀트 못지 않게 교과서적인 원칙주의자, 정리된 파일철 오타쿠인 '헤르미온느'형 인물이다. 뉴욕 최연소 서장이 되는 게 목표이지만 제이크와의 대결에서 번번이 당하고 만다. 홀트 서장을 존경하다 못해 숭배해서 그에게 인정받고자 의욕적으로 사건에 임하지만 과할 때가 많은데, 그게 오히려 사랑스럽다.
찰스 보일
제이크의 동료 형사로 엄청난 금사빠에 전 부인의 새 남편이 세 준 곳에서 살기도 하는 등(...) 꽤나 기이한 사람이다. 금사빠라는 설정 때문에 메인 주인공인 제이크보다 더 많은 러브라인에 엮이고 다사다난한 관계가 많다. '제이크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타이틀에 집착하고 그의 다른 친구들을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로사 디아즈
제이크의 동료 형사로 홀트와 마찬가지로 절대 웃지 않는 포커페이스다. 홀트가 기쁨-슬픔-화남을 느끼지만 표정변화가 없다면 로사는 아예 냉담한 쪽이다. 과격하고 화가 많고 사생활과 개인의 공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화가 나면 다 때려부수고 항상 가죽자켓을 입고 다니며 바이크를 몰고 다닌다. 이웃들에게는 로사 디아즈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사는 집도 아무도 모르고 주소가 노출되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정도로 노출을 꺼리고 누군가 자신에 대한 것을 폭로하려고 하면 무기를 들고 죽음으로(...) 위협한다.
시즌 5에서 바이섹슈얼로 밝혀지는데 이를 가족에게 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초반에는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차단하지만 에이미, 테리 등에게 연애상담을 하거나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과정에서 제이크와 홀트에게 의지하는등 점차 마음을 여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상대방이 이에 기뻐하거나 다가오는 순간 얄짤없이 끔찍하다는 듯 거부한다.
테리 제퍼즈
"테리는 사랑을 사랑해! (Terry loves love!)"
99 경찰서의 경사로, 근육량 유지에 집착하고 요거트를 사랑한다. 엄청난 덩치와 근육을 자랑하지만 늘 본인을 3인칭으로 칭하고, 딸들과 아내에게 절절 매는 것이 개그 포인트. 딸들이 태어난 이후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극도로 커져 현장 출동을 꺼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상담을 받기도 한다.
지나 리네티
"Gina knows the best."
주요 인물 중 유일하게 경찰이 아닌,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말단 공무원으로 하는 일이 분명하지 않다가, 후에 홀트 서장의 개인 비서로 일하게 된다. 4차원적 행각에 핸드폰 중독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숨겨진 최종보스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 교육을 들으러 온 비행청소년부터 홀트 서장까지 세 치 혀로 구워삶아 좌지우지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형사들을 혼쭐내주기 위해 큰 그림을 그리는 등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곤 한다.
개인적으로 로사, 홀트보다 더 냉담한 인물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은데, 등장인물들 중 가장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필터 없이 당당하게 말해버리기 때문이다. 경찰서로 걸려온 전화에 보이스 메일을 남기세요, 확인은 안 하겠지만, 이라고 말해버린다거나, 살갑게 다가오는 찰스와 에이미에게 난 너 말하는 게 싫으니까 입 좀 다물어줘, 라고 해 버린다거나,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충실히 업무를 불이행하는 모습에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뭐 어쩌라는 거냐"라는 식의 무심한 얼굴에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아닌 척 하면서도 동료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를 아끼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지나는 공적 관계에 사적 감정이 끼어드는 것을 전면 거부한다. 복잡한 상황이 생기면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아니니까 상관할 이유가 없다며 유유히 떠나고 모두가 실패할 때 극적으로 등장해 정말 상관하기 싫지만 잘난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라는 태도로 일을 해결하고 또 다시 유유히 떠나는 그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간지폭풍이란...
히치콕&스컬리
99 경찰서의 무능한 콤비이다. 과거에는 베테랑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서류 작업을 하고 맛있는 걸 챙겨 먹으며 하릴없이 업무시간을 때우는 데 보람을 느끼고 있다. '무능한 콤비'를 자처하지만 필요할 때 (예를 들면 도둑맞은 간식을 찾아야 할 때 등) 에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이며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는데, 좀처럼 그럴 일은 없다.
왜 좋냐면
우선 소개한 위 인물들 중에 '병풍'이 되는 캐릭터가 없다. 의자에 붙어있다시피 하는 히치콕과 스컬리가 비중은 다른 사람들보다 적더라도 존재감은 빠지지 않고, 메인 주인공인 제이크에게 모든 스토리라인이 집중되지도 않는다. 보통 20분이 조금 넘는 한 편 당 세 가지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전개되는데, 그 방식이 꽤나 세련되게 균형이 잡혀 있다. 특정 몇 명에게 쏠리지 않고 모든 인물이 매력을 발산할 시간이 골고루 나눠져 있어, 모두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불어 농담처럼 가볍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도 허를 찌르는 점들이 있고, 무리한 관계나 웃음을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땅딸막하고 마초와 거리가 먼 찰스를 자유연애를 지향하는 캐릭터로 잡았다는 점, 여성 캐릭터들을 무의미하게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 홀트 서장과 로사의 퀴어 설정이 개그소재로 쓰이지 않는다는 점, 오히려 백인 중년 남성 둘이 가장 무능한 콤비라는 점 등에서 다양성을 고려한 흔적이 보인다. 실제 로사 디아즈 역의 스테파니 베아트리즈는 에이미 산티아고 역의 멜리사 푸메로가 캐스팅되었다는 것을 듣고 한 프로그램에서 라틴계 배우를 둘이나 뽑을 리는 없다며 울기까지 했는데 캐스팅되어 놀랐다고 하며, 지나 리네티 역의 첼시 퍼레티는 로사와 지나 사이의 커플링인 '디아네티'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해 직접 2차 창작을 해 SNS에 올리기도 한다. (아쉽다면 동양인 캐릭터가 시즌 초반에 반짝 등장하고 사라진 한국계 천재 해커 외에는 없다는 점, 그리고 그 역할마저도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또한, 시트콤에 자주 딸려 나오는 방청객 웃음소리나 슬랩스틱으로 억지 웃음을 유도하지 않고 오로지 인물들의 찰진 대사가 재미를 이끈다. 그리고 장르 특성상 온갖 괴랄하고 복잡한 관계가 펼쳐지는 게 개그 포인트이기도 하지만 (예를 들어 한 때 파트너로 지내던 찰스와 지나가 부모님의 재혼으로 남매가 되어 버린다는 해프닝처럼...), 코미디에 집중하면서도 제이크의 성장과정과 홀트 서장, 에이미와의 관계 변화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4-5시즌의 시간을 두고 에피소드를 쌓으며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 제작자와 배우들의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기도 하고, 시청자 입장에서 인물들의 꾸준하고 천천히 미묘한 감정 변화를 보며 정이 쌓이기도 한다.
Noice!
좀처럼 정주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좀처럼 그 드라마 너무 좋지, 라고 말하지 못하는 내가 보장하는 사랑스럽고 유쾌한 시트콤이다. 수사물이니까, 하는 단순한 마음에서 시작해, 헤어나오지 못하고 몇 번이고 돌려 보고 출연 배우들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다음 시즌 방영을 기다리게 되었다. 유행어를 부정하다가 무심코 따라해버리는 홀트 서장처럼, 제이크의 입버릇인 Noice!를 Nice! 대신 말해버리게 되었다. 넷플릭스에 뭐 없나, 주말에 몰아볼 거 없나, 하는 당신! 브루클린 나인-나인을 시작해보자. 어느 새 99 경찰서의 구호를 외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테니까. Nine-nine!
서룩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