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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l 27. 2019

[몽상] 스물셋, 내 취향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든다면

스물셋, 내 취향의 음악들


취향에 대해 적는 동안 새삼 깨달은 사실은, 그것이 결코 영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삶이 흐르는 동안 취향도 자연스레 변한다. 유려하게만 느껴졌던 소설의 문장에서 생경한 불편함이 씹힐 때, 과거에는 싫어했던 가지의 물컹함이 매력적인 식감으로 다가올 때, 감탄하며 들었던 랩 가사가 어쩐지 낯간지럽게 느껴질 때. 나는 스스로가 변했음을, 그래서 취향의 동심원도 어느 순간 이동하고 확장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현재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이 음악들은 과연 영영 내 취향으로 남을 수 있을까. 그래서 하나의 조건을 덧붙인다. 만약 '스물셋 지금 이 순간', 내 취향으로 이루어진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든다면, 그 트랙리스트는 다음과 같을 거라고. 2019년 스물세 살의 내 삶은 이 음악들과 함께였다고. 그러니까 이건 미래의 언젠가를 위한 현재의 화석같은 것이다.


1. Mia & Sebastian's Theme(Late for Date), Justin Hurwitz



스물의 내가 그랬듯, 스물셋의 나도 인생의 영화로 <라라랜드>를 꼽는다. 이 영화에 무조건적인 애정을 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다. 나는 저스틴 허위츠가 현재 가장 뛰어난 영화음악감독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으로써 영화에 잊지 못할 마법의 순간들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Mia & Sebastian's Theme(Late for Date)'은 영화에서 연인의 사랑이 시작되던 순간에 흐르던 곡이다. 온 세상이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같은 사랑이 시작되기 직전의 순간. 이 곡은 첫 데이트의 부드러운 긴장감과 예민한 설렘 같은 것들을 명징하게 담아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이 흔들리는 가을과 차가운 겨울을 지나 어떻게 변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결말을 알고서 듣는 사랑의 시작은 귀중하고 허무하다. 그래서 나는 이 곡을 더 아껴 듣게 된다.


2. 지켜줄게, 백예린



고가도로에 삐져나온 초록잎
아마 이 도시에서 유일히
적응 못한 낭만일 거야
(...)
자주 보러 올게 꼭은 아니지만
지켜보려 할게 시키지 않았지만
또 놀러올게 괜시리 눈물 나네
너를 보러 또 올게


백예린의 목소리는 인어같다. 그녀의 신비하고 예쁘고 서정적인 목소리는 분명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 또한 그녀의 목소리로 가득찬 신보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다행히 올해 3월 그녀의 신보를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 남은 곡은 '지켜줄게'. 첫 소절부터 가사가 너무 좋기 때문이었다. 이 곡에서 백예린은 연약한 낭만에 대해 노래한다. 부서지기 쉬운 낭만에 대해서. 지키고 싶지만, 불변하기를 바라지만 확신할 수 없는. 그럼에도 백예린은 '가장 때묻지 않은 그런 감정은 우리만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이 좋아서, 이 곡을 듣고 또 듣던 밤들이 있었다.


3. Jamais Vu, 방탄소년단



Please give me a remedy, a melody
오직 내게만 남겨질 그 memory
이쯤에서 그만하면
꺼버리면 모든 게 다 편해질까
괜찮지만 괜찮지 않아
익숙하다고 혼잣말했지만
늘 처음인 것처럼 아파


의외겠지만, 내가 올해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은 방탄소년단의 <Map the soul: Persona>였다. 처음으로 좋아한 아이돌 가수의 음반이자, 오랜만에 만난 '모든 수록곡이 빠짐없이 좋은' 음반이었다.


'Jamais Vu'는 처음 들을 때 왠지 넬의 음악이 떠올랐다. 앨범 안에서 특히 서정적인 곡이어서일까. 큰 기대 없이 들은 앨범에서 완벽한 취향의 곡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을 오랜만에 경험한 순간이었다.


4. 그늘은 그림자로, 검정치마



나를 따라다니던 그늘이 짙던 날
잠든 너를 보며 나는 밤새 울었어
이제 우리 다시 나란히 누울 순 없겠지
혼자 있기 두려운 난 너의 집에 남아있었지
오 사랑은 상처만 남기고
이제 우리 다시 나란히 누울 순 없겠지


검정치마의 모든 사랑 노래를 사랑한다. 사랑의 모든 유별난 순간들을 가장 단순하면서도 적확한 언어로 옮기기 때문이다. 검정치마는 지난 두 앨범에 걸쳐서 사랑의 생로병사를 그려왔다. 전작 'TEAM BABY'가 사랑의 생생한 현현을 노래했다면, 신보 'THIRSTY'는 사랑이 끝나갈 때의 비겁함과 고독을 노래한다. 전작의 화자에게 '너'는 '매일 다른 이유로 더 사랑했었'(한시 오분)던 사람이자 '날 위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나랑 아니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화자는 '아마도 우린 오래 아주 오래 함께 할 거야'라고 믿어버리고, '사랑이 전부인 거야'(Love is All)라며 현재를 찬미한다. 전작이 'EVERYTHING'으로 끝났던 건 당연한 일이다. 그 곡은 사랑의 가장 찬란한 순간, 나의 빛나는 연인에 대한 노래니까.


넌 내 모든 거야
내 여름이고
내 꿈이야
넌 내 모든 거야
나 있는 그대로
받아줄게요
<EVERYTHING 마지막 가사>


'그늘은 그림자로'에서 '그대로 내 옆에 남을 걸 알았'(폭죽과 풍선들)던 너는 떠나간다. 모든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던 '나'가 결국 비겁한 연인이 되었다는 것. (어떤 종류의 비겁함인지는 '빨간 나를'과 '맑고 묽게'를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사랑이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것일까. 익숙하면서도 씁쓸한 이 상황을 지켜보다 보면, 김금희의 소설 속 어떤 여자의 대사가 떠오른다. 지금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던. 애초에 우리는 하루치의 사랑만 약속해야 하는 것일까. 'THIRSTY'의 화자는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담담히 말한다. '흑백 영화처럼 사랑하던' 우리는 이제 다시 나란히 누울 순 없을 거라고. '방안에 마주 누워 모든 게 우리의 것'임을 느끼던 순간은 앞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5. Wake Up Alone, Amy Winehouse



It's okay in the day, I'm staying busy
Tied up enough so I don't have to wonder where is he
(...)
Soaked in soul,
he swims in my eyes by the bed
Pour myself over him, moon spilling in
And I wake up alone
And I wake up alone


이렇게 쓸쓸할 수 있다니. 노래를 처음 들은 순간 생각했다. 나는 혼자 깨어난 순간의 고독으로 끝나는 이 곡을,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모든 음악을 통틀어 가장 좋아한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곡은 'Love Is A Losing Game'. 'Valerie'를 가장 많이 듣던 시기도 있었지만, 어느새 취향이 변해버렸다. 지금의 나는 밝고 신나는 펑크보다, 단촐한 구성의 잔잔한 연주 위에 얹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6. End Of A Love Affair, Billie Holiday



So I smoke a little too much,
and I drink a little too much
And the tunes I request 
are not always the best
But the ones where the trumpets blare!
So I go at a maddening pace,
and I pretend that it's taking your place
But what else can you do, 
at the end of a love affair


아직도 잊지 못한다. 카페 한 구석에 앉아 몇 시간이고 책장을 넘기다 기어코 마지막 장을 넘기던 순간을. 그 순간 흐르던 곡이 빌리 홀리데이의 'End of A Love Affair'이었다.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사람의 사랑에 대한 그 긴 소설의 정서는, 이 곡 하나로 요약된다.


너무 빨리 걷거나, 운전하거나, 너무 많이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시거나, 그저 무모해져버리는 것 외에 사랑의 끝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이 곡은 <Lady in Satin> 앨범의 마지막 곡이기도 하다. 당신을 원하는 바보가 되었으니(I'm A Fool To Want You) 우리 함께 사랑에 빠지자고(For Heaven's Sake) 말하던 화자는 결국 변해버린 상대를 발견한다(You've Changed). 그러나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은 어느 순간이든 결코 처절한 법이 없다. 어떤 이야기든 유려하고 부드러운 선율에 담아 전하는 것이, 재즈 가수로서 그녀의 미덕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곡으로 내 앨범을 끝맺고 싶다. 어떤 삶이든, 어떤 감정이든, 어설프게 투박하기보다는 세련되고 아름답게 전하고 싶어서.




확신할 수 없다. 이 음악들이 언제까지 내 취향으로 남아있을 지는. 그럼에도 내가 이 음악들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은,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들이 결국 지금 나의 전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금 어떤 음악을 듣고 있을까? 당신이 취향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든다면, 거기엔 어떤 곡들이 들어갈까? 이제, 당신이 선택한 음악들을 들려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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