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월의 끝에서, 영화 <퍼스트맨>을 보았다. <위플래쉬>와 <라라랜드>를 감독했던 데이미언 셔젤의 네 번째 작품이었다. '달에 발을 딛은 인류 최초의 인간' 닐 암스트롱을 다루는 영화의 방식을 보면서, 그에 대한 모종의 작가론을 쓰고 싶어졌다. 그가 꿈의 이면에 천착하는 사람임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플래쉬>에서 <라라랜드>, <퍼스트맨>으로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요소는 다름아닌 '재즈'다. <위플래쉬>에서 재즈가 성공에 대한 청년과 선생의 일그러진 욕망의 투사였다면, <라라랜드>에서 재즈는 연인을 맺어주는 도구이자 한 남자의 꿈 자체로 그려진다.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의 전기영화 <퍼스트맨>에서도 재즈는 그 존재감을 은은하게 드러낸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도착하기에 앞서 아폴로 11호에서 듣는 Dr. Samuel Hoffman의 'Lunar Rhapsody'는, 그가 아내와 연애시절에 들으며 춤을 추던 곡이기도 하다. 달에 도착한 후 광막한 어둠을 채우는 것은 왈츠의 선율이다. 영화 내내 재즈는 한 우주비행사의 고독한 내면과 우주의 정서를 내밀하게 드러낸다.
주목할 것은 '재즈'가 영화의 주제의식과 결합되는 방식이다. 데이미언 셔젤의 영화들은 장르와 서사를 달리하며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의 영화는 늘 '성취된 꿈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그 꿈은 무지한 타인의 시선에서 기쁨과 환희로 묘사되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황폐와 상실이 도사리고 있다. 일련의 작품들에서 재즈는 꿈 혹은 그 이면의 상징으로서, 이 처연한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매개물로 작동한다.
<위플래쉬> 속 인물들에게 재즈는 삶의 유일한 목적과도 같다. 일류 재즈 드러머를 꿈꾸는 청년 앤드류와 선생 플렛쳐의 광기 어린 갈등을 다룬 이 영화의 제목은 '채찍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플렛쳐는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두 단어가 '그만하면 잘했어(Good Job)'"라며 앤드류에게 극한의 노력을 요구하고, 이 과정에서 폭언과 구타도 서슴지 않는다.플렛쳐는 잔혹하고 폭력적인 교수 방식으로 제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전적이 있는 사람이다. 앤드류는 그런 플렛쳐에게 인정받기 위해 미친듯이 연습하며 드럼에만 몰두한다. 그는 피가 낭자할 때까지 드럼을 치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몰아세운다.
<위플래쉬>의 관객들이 종종 망각하는 것은, 플렛쳐와 앤드류의 꿈이 그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플렛쳐가 일류에 대한 독선적 열망으로 변태(變態)한 괴물임은 그가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자명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플렛쳐를 만난 후 앤드류의 내면이 붕괴되는 과정을 빠른 템포로 보여준다. 그는 재즈를 하대하는 가족들에게 독설을 내뱉고,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며 여자 친구와 헤어진다. 교통사고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공연장으로 달려가는 그의 눈에 형형한 것은 다름아닌 광기다. 영화는 앤드류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드럼 연주로 막을 내린다. 'Caravan'의 휘몰아치는 드럼 솔로에서 우리는 무아(無我)의 경지에 오른 한 예술가의 정점을 본다. 동시에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절망에 빠진 눈빛을 본다. 요컨대 그의 성취는, 한 인간이 건강을 저버리고 관계를 파괴한 끝에 얻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플래쉬> 개봉 당시 한국 사회가 보였던 반응은 의미심장하다. 상당수의 관객들이 이 영화를 '인간 승리의 드라마' 내지는 '자기 계발의 자극제'로서 수용했기 때문이다. 일등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이 한국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인간 실격의 드라마'로 읽힌다. 그것은 영화가 꿈의 이면에 숨겨진 파괴된 삶을 들춰 보이기 때문이다.
<라라랜드>는 내게,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어디에선가 먼 먼 훗날 / 나는 한숨 쉬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 나는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했다고, /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영원한 궁금과 미련. 세바스찬이, 혹은 미아가, 흘러간 연인과의 미래를 부질없이 그려봤던 건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미아와 세바스찬의 사랑은 그들의 꿈과는 정반대의 곡선을 그린다. 그들의 사랑은 각자가 무명일 때 가장 타올랐다가 그들이 꿈에 다가설수록 서서히 꺼져 간다. 미아에게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라는 꿈이 있고, 세바스찬에게는 재즈바를 차려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하겠다는 꿈이 있다. 꿈으로 다가서는 동안 낭만과 황홀은 스러지고 갈등과 상처가 남는다. 계절의 끝에서, 미아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미아는 파리로 떠나고 세바스찬은 LA에 남는다. 그것은 꿈을 이루기 위해 각자가 선택한 길이다. 영화에 생략된 5년의 시간동안 그들의 인연이 어떻게 흘렀는지는 미지수다. 중요한 것은 5년 후 그들은 결별했고, 미아의 옆에는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미아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가 되고, 세바스찬은 재즈바의 사장이 된다. 내막을 모르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낭만적일 꿈의 성취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이 꿈을 선택하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상실했는가를 두 시간에 걸쳐 설명한다. (오히려 꿈을 어떻게 이루었는지 그 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한여름밤의 단꿈같은 낭만의 선사자에서 꿈을 응원하는 든든한 동맹자에 이르렀던 나의 연인. 꿈의 연대기에 함께 했던 사랑을 그들은 포기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는 들어설 수 없는 그 길에 대한 미련으로 점철된 상상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라라랜드>에서 재즈는 한 사람이 인생의 다른 길을 버리고 끝끝내 선택한 길이다. 전작에 이어 이 영화 또한 양가적인 함의를 내포한다. <라라랜드>는 누군가에게는 '꿈의 성공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실패담'으로 읽힌다. 꿈의 이면을 전면적으로 다룸으로써 성취한 이 복잡한 층위는, 그저 낭만적일 수 있었던 영화에 깊이를 더한다.
<퍼스트맨>에서 달의 빛과 그림자는 그 자체로 꿈과 이면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닐 암스트롱이 이룬 '위대한' 성취의 순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달에 성조기를 꽂는 장면이나, 달에서 무사 귀환한 닐 암스트롱에게 환호하는 장면이 생략된 것은 그 때문이다. 대신에 영화는 '달 탐사'라는 낭만적 꿈의 이면에 위치한 무수한 실패와 상실에 주목한다. 닐 암스트롱이 우주선 안에서 악전고투를 겪을 때, 영화는 라디오 하나에 기대어 노심초사하는 아내의 표정을 이어 붙인다. 동료 우주 비행사들이 갖가지 사고로 사망하고 남편이 훈련 중 부상을 입고 돌아와도, 아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매일 무력하고 불안하게 기다릴 뿐이다. 달로 떠나는 우주선을 타기 직전, 암스트롱에게 아내가 묻는 마지막 질문은 "못 돌아올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는 것이다. 가족이 다같이 모인 테이블에는 긴장과 불안, 원망이 뒤섞인 가운데 정적만이 흐른다. 이처럼 영화는 인류의 위대한 꿈을 이룬 환희의 순간보다, 한 가족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에 조명을 비춘다. 데이미언 셔젤이 <퍼스트맨>의 목표가 '달과 주방의 싱크대를 잇는 것'이라고 말한 건 이 때문이다.
영화에서 몽환적이고 달콤한 멜로디의 'Lunar Rhapsody'가 유독 애달프게 들리는 건 이 때문이다. 아내와 연애 시절의 추억이 담긴 이 곡은 영화에서 두 번 사용된다. 일과를 마치고 아내와 춤을 출 때, 그리고 달로 떠나는 우주선 안에서 카세프 테이프를 들을 때다. 후자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음악을 듣는 암스트롱의 표정을 오래 비춘다. 쓸쓸한 푸른 눈과 꾹 닫은 입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한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두 살배기 딸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암스트롱은 달에 도착해서야 스스로와 마주선다. 달에서 대의의 달성과 동시에 사적인 의식까지 치른(영화에서 가장 감정의 파고가 큰 장면이기도 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지구에 착륙하는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인류의 원대한 꿈을 성취하고 돌아온 닐 암스트롱의 남은 삶에 물음표를 던진다. 그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그는 달에 도착할 때까지 스스로를 얽어맸던 내면의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꿈에 골몰하느라 오랫동안 소홀하거나 외면해왔던 개인의 삶을 회복할 수 있을까. 꿈과 이면의 아이러니를 탐색하던 데이미언 셔젤은 <퍼스트맨>에 이르러, 꿈을 성취한 후 남은 나날들에 시선을 던진다. 거기에는 잿더미가 가득하다. 하나의 주제에 깊이를 더해가는 그의 다음 영화는 어떤 질문을 던지게 될까.
2018년 11월의 초입에서,
영원한 애정을 예감하며
몽상 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