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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Aug 08. 2019

[유월] 피하고 싶은 어느날, 나는 대형서점에 간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고, 이야기는 우리의 세계를 풍요롭게 한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러한 이유로 책이 있는 공간을 찾는다. 골목에 작게 자리한 아기자기한 독립서점들, 지나간 이들의 세월마저 간직한 중고서점들, 무한의 지식을 간직한 듯한 어느 동네의 도서관들까지 우리는 수많은 공간에서 이야기들을 마주할 수 있지만, 나는 문득 어떤 날이면 앞서 말한 모든 공간보다도 가장 가까운 곳의 대형서점을 찾는다. 아기자기함이란 찾아볼 수 없고, 세월의 흔적 또한 없으며 무한한 지식의 아우라보다는 오히려 자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곳 말이다. (겨울엔 빵빵한 히터가, 여름엔 닭살이 돋을 정도의 에어컨이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곳!)


사실, 대형서점은 나에게 이야기를 마주하는 공간보다는 일종의 ‘도피처’의 역할을 한다. ‘피할 수 없다면, 대형서점에 가라!’를 나의 작은 인생 모토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조심스레 밝힌다. 그래서인지 이 공간에서 나는 활자를 읽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 같은 디자이너가 제작한 듯한 책 표지들을 유심히 분류해보고, 어떤 신작이 나왔는지는 몰라도 서점 안 카페의 신메뉴는 모두 시도해본다. 몇 주째 베스트셀러에 선정된 책은 모르더라도 몇 달째 같은 공간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한 아저씨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나오지 않는 한 직원의 사정을 궁금해하며 말이다.


대형서점에선, 항상 누군가의 이야기가 넘쳐나지만 아무도 나에게 그 이야기들을 강요하지 않는다. 나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이야기들이, 또 누군가의 말들이 무겁고 나를 흔들어 놓을 때면 나는 가만히 이야기가 범람하는 그 넓은 광장에 들어앉는다. 익명의 이야기가 가득한, 또 익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형서점에 가만히 서있노라면 그 안을 채운 무수한 이야기들이 시끄러운 바깥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준다는 안정감을 얻는다. 마치 일종의 ‘방공호’처럼 말이다. 작고 아기자기한 분위기, 누군가의 세월, 때묻고 빛바랜 종이들은 줄 수 없는 의도된 고독감을 이곳에선 느낄 수 있다. 그러다가 문득 외로워지면 마치 하얀 눈이 오는 날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첫발을 내딛는 사람처럼, 깨끗하고 빳빳한, 가장 마음에 드는 책 표지를 펼친다. 그러면 내가 선택한, 오롯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이야기들이 나의 세계에 부드럽게 다가오는 것이다.


아래의 몇몇 공간은 실제로 나의 방공호이자 도피처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나는 나만의 아지트는 늘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품는 이기적인 사람이지만, 이 공간 또한 소중하게 여겨줄 몇몇 독자들을 위해 조심스럽게 이곳에 소개해보고자 한다.



교보문고 영등포점


멋지게 휴학을 선언하고, 나는 ‘교세권’(교보문고 세권)에 작은 방을 잡았다. 늦은 오후, 잠에서 깨면 세수를 하고 편한 옷을 입고, 가벼운 가방을 든 채 교보문고로 향했다. 무수한 이야기를 피해 학교를 떠나 정착한 어느 동네의 교보문고는 복작복작하고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영등포 타임스퀘어 안에 있었다.



핫트랙스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 영등포점은 널찍하고 깔끔한 구조다. 한눈에 파악되는 깔끔한 구조의 서가들은 하얗고 밝은 조명 아래 이야기들을 떠받치고 있다. 돌아다니며 책을 여기저기 들춰보다가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발견하면 중앙에 위치한 책을 읽는 공간(정말 방공호처럼 생겼다)에 들어가 조금 더 깊이 이야기를 탐독했다. 가끔 돈을 주고 이야기를 구입하는 날이면, 가장자리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하지만 처음 의도와 달리 밖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모두 쏟곤 했는데, 이는 영등포의 작은 방을 떠나온 지금 순간에도 자꾸만 그리워진다. 어느 비가 오는 날엔, 꼭 사랑하는 사람을 이곳에 초대해야지 생각할 만큼 사랑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


조금 로맨틱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전쟁 상황을 상상할 때면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꼭 잡고 방공호로 도망가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래서인지 난 대형서점 데이트를 즐긴다. 책 표지를 보며 내용은 모르지만 상상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겁고, 모르는 이야기에 둘러 쌓이니 더 잘 아는 서로의 이야기에 의지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 더욱 서로를 더 잘 알게 되는 것도 로맨틱하다는 생각이 든다.


광화문역 근방에 위치한 교보문고는 엄청엄청 넓다. 너무 넓어서 미로 같기도 하고,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어서인지 정말로 지하 벙커같은 느낌도 난다. 반면에 내부는 원목의 서가들에 붉은 조명이 가득해 따뜻한 느낌이 든다. 우리는 그 넓고 따뜻한 공간을 조잘조잘, 재잘재잘대며 신나게 산책한다. 하지만, 왜인지 이 공간은 이별의 순간에만 자꾸자꾸 들어오게 되었는데 우리를 분리시키려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욕망이었는지는 몰라도 항상 이 곳에서 데이트를 한 후에는 헤어짐이 기다리고 있었다.


휴가 마지막 날을 남긴 군인 남자친구나, 곧 먼 캐나다 땅으로 떠나는 나의 베스트 프렌드는 헤어지기 직전 나와 이 지하벙커에서 시간을 보냈다. 교보문고를 모두 둘러본 후에도 못내 아쉬워, 근처에 있는 폴바셋에서 커피를 마시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곳의 에그타르트는 너무나 맛있어서, 가끔 떠나보낸 이들이 그립다는 이유로 몇 번씩 찾아가 노랗고 고소한 그것을 한입씩 베어 물며 그들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 광화문 교보문고 안 카페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녀 정신이 없으므로, 조금만 나가서 폴바셋 에그타르트와 룽고를 꼭 맛보길 바란다.



영풍문고 홍대점


 한여름, 두 손에 짐을 가득 이고 땀을 줄줄 흘리며 홍대 거리를 걷다 보면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홍대입구역 근방에 있는 영풍문고는 그럴 때마다 나의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앞서 말한 두 공간과는 다르게, 작은 규모에 많은 책이 있진 않지만, 이 복잡한 거리 지하에 이만한 공간이라도 있다는 게 도리어 고맙기도 했다.


이곳은 책을 읽는 테이블도 적고, 읽고 싶은 책이 없을 수도 있지만 대신 바삭한 츄러스와 레몬 콜라가 있다. 레몬 반쪽을 잘라 통째로 넣은 차갑고 청량한 콜라를 홀짝 대면서 테이블에 앉아 판타지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새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바깥의 열기를 모두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물론 착각이겠지만).


서점 구석에는 가끔씩 버스킹을 하는 작은 무대와, 레몬콜라가 지겨운 날에 먹으면 좋을 쫀득한 젤라또 가게가 있다. 아기자기한 케이스를 파는 판매대와 책에 뿌리는 향수를 시향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있다. 영풍문고 홍대점은 작지만 실용적이고, 또 홍대 같지 않게 고요해서 정말로 나만의 아지트 같은 느낌이 든다. 혹시나 이 글을 보고 그곳에 찾아가 유월을 만나게 된다면 시원한 레몬 콜라 한잔을 꼭 얻어먹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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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조용하고 행복해서 자꾸만 앉아 있고 싶은 이 공간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츄러스의 마지막 한 입을 입에 넣고 손에 남은 설탕을 탈탈 털고 나면, 다시 온갖 이야기가 가득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오늘 당신의 이야기가 너무나 버겁다면 그래서 조금은 이야기를 막아줄 방공호가 필요하다면 한번 주변의 대형서점에 찾아가보자. 레몬콜라와 츄러스, 노오란 에그타르트, 혹은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함께라면 더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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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유월 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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