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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디맨 Mar 26. 2020

'찢청'이 어때서?

후반전에 달라지는 나의 패션 02

D-127

퇴직일이 다가오고 있다. 사실 확정된 것은 아니다. 그냥 스스로 정해 놓은 '데드라인' 같은 것이다.

작년 7월, 만 55세를 맞아 임금피크제에 돌입한 지 어언 1년이 다 되어 간다. 물론 법적으로는 만 60세까지의 정년이 보장되어 있지만 내가 몸 담은 회사에서는 대부분의 대상자들이 자연스럽게 명예퇴직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다. 얼마 남지 않은 이 기간을 지난 33년간의 회사생활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나의 라이프스타일은 최근 몇 년을 기점으로 180도 달라지고 있다. 오랜 직장생활 속에서 굳어져 버린 습관과 사고, 그리고 가치관들이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매우 고무적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 변화가 바람직한 방향이든 혹은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수많은 변화 중 하나는 '패션'이다.



주로 지방 사업장 (a.k.a 공장)에서 근무를 했었기 때문에 근무 시간 중에는 소위 '작업복'을 입게 된다. 별다른 옷이 없어도 일상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다. 굳이 출퇴근 시간의 짧은 연출(?)을 위해서 다양하고 멋진 옷을 장만하는 것은 왠지 불필요해 보였다. 주말이나 휴가가 있긴 하지만 한창 바쁘게 일할 시기에는 즐길 여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거의 옷을 사지 않는 편이었다. 꼭 필요한 몇 가지 아이템에 한해서 그것도 매우 저렴한 브랜드만을 고집했었다.


하긴 요즘은 트렌드가 많이 달라지긴 했다. 복장이 자유로와졌을 뿐만 아니라 '워라밸'이니 '소확행'이니 짬짬이 여가를 즐기며 자신을 꾸미고 가꾸는데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근무하는 이 공장에는 여전히 등산복을 입고 출근하는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 요즘은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하는 사람이 예전만큼 많이 있지는 않다.


주제에 벗어난 이야기지만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은 등산복을 좋아하는 것 같다. 국토의 70%가 산이라서 그런가 보다. 나는 등산도 싫어하지만 등산복도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 등산복이 편한 옷인지는 몰라도 '예쁘지 않아' 서이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예쁜 것은 불편하다. 편하면서도 예쁜 것은 없다.


33년 만에 내가 예쁜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고구마', '감자', '가지' - 동잠바, 춘추복 등의 회사의 계절별 작업복을 색깔 특성에 맞추어 만든 별칭 - 만 입고 다녀서 나의 패션 본능을 잊어버리고 있었나 보다.


오늘 아침은 젊은 애기 엄마인 C가 연신 히죽거리며 웃어댔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 옷 입은 스타일이 너무 맘에 들어서 그런다는 것이다. OMG! 환갑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이 무슨 찬사란 말인가! 내가 립서비스를 받을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또 C가 빈말을 일삼는 부류가 아닌 줄을 알기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 점심시간에 외식을 쏘기로 했다.


사실 나는 청바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입고 나갈 기회도 많지 않았거니와 빡빡한 질감의 옷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이다. 더구나 '찢청'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 당연히 내게는 일생 단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아이템인데 지금은 '찢청'만 수두룩 하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칭찬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 패션이고 내가 기분이 좋으면 남들도 좋게 본다는 사실을 발견한 요즘이다. 중년의 패션이라고 해서 따로 공식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중후한 멋'과 '댄디함'을 강조한 SNS의 조언도 물론 귀담아들을 필요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코디, 자신에게 맞는 연출을 통해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무조건 젊은이들의 유행을 따르거나, 파격적이고 튀는 복색을 선호하는 것 또한 본인의 취향이라면 존중하고 싶다. 본인의 철학이 확고하다면 그런 패션이 본인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패피'로 불릴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하나 씩 배워가는 즐거움과 나를 찾아가는 기쁨이 있다.

설사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괜찮다.

나는 '옷 입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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