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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디맨 May 14. 2023

어른유감(遺憾)

끝끝내 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른'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아니, 어른을 싫어한다. 이 무슨 자가당착인가 할 것이다. 맞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그 무리에 속할만한 연배인 내가 어른이 싫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요,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아주 어릴 때는 어른을 혐오했다. 학교를 다닐 때는 존경할 만한 선생에 대한 기억을 가지지 못했다. - 불행하게도 말이다. 직딩시절에는 선배, 상사, 임원들과의 불화로 소위 '미운털'이 박혀서 종종 능력과 성과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연봉을 유지하며 장수(?)할 수 있었다면 과연 얼마만한 고생(?)을 했었겠는지 가늠이 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감정적으로만 느꼈던 듯 하다. 어느 정도의 연륜이 되고서야 비로소 내가 왜 '어른'을 싫어하는지 찬찬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바탕에는 비단 연륜 뿐만 아니라, 최근 10여 년의 나에 대한 다각적인 성찰, 퇴직 후부터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일과 사람들의 영향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싫어하는 '어른'들의 공통점은 권력을 휘두른다는 데에 있다. 나는 통제하기를 좋아하는 성향은 전혀 아니지만 통제받는 것은 끔찍히도 싫어한다. - 35년의 직장생활은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흔히들 어른이라 하면 나이가 많은 사람을 일컫는다. 물론 초딩의 기준에서는 20세 청년도 어른이지만 보통 나이가 지긋한 중년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이'는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다. 특히 유교적 전통의 뿌리가 깊은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어릴 때 자주 듣던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농업사회에서나 타당한 말이다. 변화가 거의 없는 시대에서는 삶의 경험이 오랜 사람이 지혜로울 수 밖에 없지만 과거의 모든 축적된 지식과 가장 최신의 정보를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습득할 수 있는 지금의 시대는 나이 어린 사람이 훨씬 지혜로울 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신의 성공 경험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어른들이 있다. 정말 존경할만 한 분들도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인 대다수의 어른이다. 중년의 나이를 넘어서면 나름대로 일종의 '성공감'을 만들어 낸다. 진위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러한 내적 합리화가 없으면 삶에 회의가 올 수 밖에 없는 연령대이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저학력에 평생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이어 오신 어떤 분 - 특정 직업의 비하하거나, 학력 차별을 논할 의도가 아니라 통상적인 관념으로 볼 때 '사회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례를 들고자 함이다. - 조차 자신만의 성공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단지 50여 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얻어진 자기검열 때문에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곳에서는 그런 얘길 꺼내지 않을 뿐이다. 자신의 말빨이 먹힐 만한 자녀나 혹은 일터의 신입노무자, 동생뻘 되는 동향의 누군가에게는 술 한잔 하면서 일장연설을 늘어 놓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 형님이 하는 말은 냐면 말야....." 하면서 말이다. 표면 상의 목적은 모두 '너를 위해서'이다. 나의 성공 경험을 들려줌으로써 너를 돕겠다는 선한 의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알량한 그 성공경험을 권력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지식도 권력이 된다. 학위가 있으니, 자격이 있으니, 전문분야이니, 먼저 또는 오래 그 일을 했으니 지식이 더 많다는 식이다. 결국 자기의 말을 따르라는 것이다. 또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바로 권력이다. 내가 돈을 낼테니 내 뜻대로 하라는 것이다. 최소한 쩐주의 심중을 헤아려 주거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정도는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사회가 아니던가? 조직에서의 계급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조직을 떠나지 않는 한 생사여탈권을 쥔 막강한 권력이 된다. 어른이란 바로 이러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기 바라는 사람이다. 물론 권력을 '휘두르거나', 대가를 바라지는 않았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권력은 속성상 통제와 지배를 수반할 수 밖에 없으며, 본인이 의식을 하건 혹은 하지 않건 간에 그의 권력에 상응하는 보상이 이루어지는 양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내가 심리적으로 반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런 '어른'들을 싫어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젠 나보다 나이가 적은 이들도 수두룩하지만 마찬가지다. '젊꼰'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그들이 권력을 가지게 된다면 아마도 내 또래의 꼰대보다는 훨씬 심각할 듯 하다.




한편 어른이 된 나는 어떠한가? 과연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 어른의 모습은 없는가? 자신있게 No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내 앞에서 말하지 않을 뿐, 누군가는 나에게서 똑같은 혐오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단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싫어한 만큼  누구보다 더 많이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다짐 뿐이다.



최근 젊은 친구들과 와인모임을 가지면서 다시금 내 모습을 돌아 본다. 나의 떠드는 이야기와 수고와 지불하는 비용과 연륜이 '권력'으로 비춰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 - 통상적인 협의의 친구가 아닌, 광의의 친구로 동등한 1:1 인간관계를 의미하는 말 - 로 이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외국에서는 흔하디 흔한 이런 관계가 사실, 우리나라에는 생소하기 그지없다. 대부분 모종의 상호권력의 관계에 있지 않을까 의심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는 유독 나이에 관심이 많다. 모르는 사람과 만나면 우선 나이로 위 아래를 정한다. 위계를 정해야 편안한가 보다. 서열이 비슷한 상황이라면 말을 놓는다. 반말을 해야만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출신을 따져서 공통 분모를 찾고, 개인적인 사항을 시시콜콜 캐묻는다. 그래야만 더 가까와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외국은 프라이버시를 캐묻지 않는다. 결혼을 했는지, 가족사항이 어떤지, 직업이나 출신, 심지어 성별조차 잘 묻지 않는다. 그저 Name 만으로 상대방을 인식한다. 지금 내가 만남을 가지는 상황과 조건에만 충실하다. 관계가 깊어지면 자연스레 알아 갈 사항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답게'의 문화가 존재한다. 남자답게, 어른답게, 학생답게 등등. 역할과 위계에 따라 관념화하고 강요하는 일종의 관료적인 문화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말이 '남자답게'였고, 학교다닐 때는 학생의 굴레에 갇혀 살았으며, S기업 다닐 때는 직급에 따른 이미지메이킹을 끊임없이 강요받았다. "회사에서 옷차림이 그게 뭐냐", "과장 중에 너처럼 머리에 무스바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냐"는 둥 요즘 같으면 말도 안되는 잔소리를 들으며 회사생활을 했다. 심지어 실력이나 고과는 충분히 좋은데도 얼굴이 너무 동안이라 그룹장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아 진급에 누락된 적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답게'는 '나답게' 하나면 충분한 것 같다. 가장 나다운 내가 어떤 권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동등한 인간관계를 이룰 수 있는 필요조건이라 생각한다. 권력은 위계를 만들어 '답게'를 강요한다.



기실, 요즘은 나이를 잊고 산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함께 일하는 분들도 가장 적게 차이나는 분이 12년이고 대부분 그 이상이다. 강의나 컨설팅 대상자들도 대학생, 취준생, 신입사원 등이 주를 이룬다(최근에는 고령자들도 많아졌지만). 나이가 무기가 되지 않으려 살아 온 세월도 이제 제법되는 것 같다. 단순히 교수자를 지식전달자로만 국한한다면 나의 지식은 권력화될 수 있다. 전달했으니 잘 듣고 받아들이는 것은 저희들 몫이라고 하기 보다, 그들이 어떠한 위화감도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고 배려하는 것까지가 교수자로서의 온전한 역할이라 생각한다. MZ세대 용어를 사용하고, 최신가요를 틈틈히 듣고, 트렌디한 패션을 따라가려는 노력이 내가 '세련된 늙은이' 또는 '신중년'처럼 멋진 어른임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 단어 속에는 '나이'라는 권력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그런 노력이 권력의 강화을 이루도록 해서는 안된다. 고급향수를 뿌리는 이유는 가령취가 조금이라도 희석되어 나이라는 권력을 인지하지 못하게 함이요, 개인의 신상을 밝힘에 조심스러운 것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될 위계를 막고자 함이다. 존댓말을 고수하는 이유도, 내가 더 육체적인 수고를 자처하는 이유도, 가급적 비용을 분담하려는 이유도 이미 지니고 있는 권력이 동등한 관계를 해치지 않을까하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코 완벽할 수는 없다. 부족한 점은 늘 남아 있을 것이다. 동등한 개인으로서 견해를 이야기하며,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고, 때론 갑론을박을 벌이겠지만 합리적 의사결정과 논리를 바탕으로 한 모색을 이루는 인간관계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울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오랜 동안 관계 맺어 진다면 이 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일은 없을 듯 하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난 그저 나일 뿐이고 나답게 살아가면 충분하리라! 그리하여 끝끝내 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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