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거짓말하지 말자'라는 말이 요즘 이 시대에는 참으로 우스운 말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7,80년대 우스개 소리로 회자되던 ‘차카게살자’ 만큼이나 말이다. 험상궂은 인상에 용문신을 한 남자의 어깨에 다소곳이 쓰인 '차카게살자'라는 문구에 웃음이 터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봐도 착하게 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말이기 때문이리라. 철자법도 맞지 않는 어설픈 언어로 하는 다짐(?)이기 때문이리라.
분명 ‘거짓말하지 않기’의 윤리적 가치가 없어진 것은 아닐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는 너무도 거짓말이 범람하고 있어 무감각해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대 놓고 거짓말을 하는 사회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법정에서의 위증죄 따위를 두려워하는 이가 없으며, 일단은 ‘모르쇠’ 요, 증거를 들이 밀면 그제야 마지못해 인정하면 그뿐이다. 일종의 매뉴얼처럼 굳어버린 ‘거짓말 사용법’은 이미 일반인들 모두가 습득한 지 오래다.
얼마 전 국민청원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었다가 불과 며칠 만에 여론의 대반전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지하철 성추행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동생을 대신해 억울함을 호소하던 글 말이다. 대반전이 일어난 핵심 원인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대 놓고 날조된 이야기를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진솔하게밝힌 후에 비로소 대중들에게 호소를 해야 마땅하나, 자신의 유불리를 가늠하여 취사선택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발단이 되었다. 어찌 보면 '악랄한 어떤 거짓말'을 한 것은 분명 아닌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분노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거짓말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대어 말을 함'이라고 되어 있다. 말을 하는 행위가 전제되는 것이다. 물론 의도는 명확하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고자 함이다. 그러나 비단 사전적인 의미로서의 '거짓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런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형태의 '기술'들이 존재한다.
언젠가 교회에서 스터디를 하던 중에 ‘거짓말’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영적인(?) 분위기 탓이었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극도로 예민한 감수성에 젖어들었었고 미처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그 '기술'들이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떠 올라 상세하게 메모를 해 놓았던 기억이 있다. 그 노트를 들여다보면 좀 더 생생하게 옮길 수 있을 텐데결국 노트를 찾지는 못했다. 아쉽긴 하지만 그냥 그 당시의 생각을 더듬어 재구성해 보기로 한다.
지금부터 서술하고자 하는 일련의 행위는 엄밀히 따져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때의 의도와 결과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거짓말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것을 적극적인 의미의 '거짓말'과 구분하여 '소극적인거짓말'이라고 하겠다.
1.모른 채 하기 (의도적인 침묵)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굳이 내 입으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얼마든지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누가 수상한 사람 지나가는 것 보지 못했니?”라고 학생들에게 물었을 때, 굳이 “네. 보았어요”라고 대답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거짓말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누군가 대답할 것을 기대했거나 번거로움을 떠안지 않기 위해서 혹은 내성적인 성격이라 선뜻 답을 못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선생님은 아무도 수상한 사람을 보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만약 그것이 나의 의도였다면 나는 소극적인 형태의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이 방법이 즐겨 사용되는 이유는 거짓말이 밝혀졌을 때 – 알고 있었는데 왜 그때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추궁당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 여러 가지 변명을 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저는 수상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적극적인 거짓말을 했다면 영락없는 위증죄가 성립되는 반면에 침묵은 매우 유리한 방편이 된다.
2.눈치 채이기 (암시)
이 역시도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대표적인 것은 표정으로 말하는 방법이다. “된장찌개 정말 맛있네”라고 말하고 있지만 표정에서나 말의 뉘앙스에서는 ‘정말 맛대가리가 하나도 없다’라고 생각하는구나 를 감지하게 만든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이 속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연기하면서 맛있다는 거짓말을 했다면 그것은 일종의 ‘하얀 거짓말’이 될 터이다. 하지만 이 눈치 채이기는 상대방에게 하여금 ‘맛없다’는 피드백을 던지고 싶은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단지, 내가 직접 그 말을 하지는 않음으로써 비난은 회피하고자 하는 나쁜 의도에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말의 범주로 보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상황을 설정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의 의도를 알아채게 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오늘은 피곤해서 설거지를 도와주기가 싫어’라고 말을 하면 부부싸움을 할 것이 뻔한 상황이라고 치자. 퇴근하여 들어오면서부터 “피곤해”를 연발하거나 회사에서 있었던 스트레스 상황을 떠벌리고 지하철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등의 행위를 통해 아내가 스스로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할게. 들어가 쉬어”라는 말을 유도하는 식이다. 몰래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엄마가 들어오니까 책을 펴 놓고 자는 체하는 것도 일종의 상황 설정이다. 말로 하는 거짓말은 아니지만 ‘나 공부하다가 잠들었어요’라고 설파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거짓말의 범주에 속한다.
3.꼬리 자르기 (부분적인 실토)
좀 더 고차원적인 방법에는 일명 ‘꼬리 자르기’가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을 밝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더 큰 진실, 더 많은 진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일부분 또는 심각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어떤 사안 만을 선제적으로 실토하는 경우를 말한다. 만약 상대방이 계속 추궁하는 경우라면 결국 무위로 돌아갈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친밀한 사이에서 사용하므로 한 두 가지 사안의 실토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가끔 실토한 자체 만으로 오히려 호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상대방을 오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의도하고 사용한다면 매우 악의적인 거짓말이 된다. – 엄밀히 얘기하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부분적인 진실만을 말했을 뿐이고 나머지는 미처 얘기하지 못했을 뿐이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 사례는 아니지만 취사선택을 했다는 차원에서 보면 이번 지하철 성추행과 관련한 사건에서 가해자의 형이 사용했던 방법이 유사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4.흘리기 (여론조작)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상황에서는 잘 쓰이지 않지만 보다 교묘하고 체계적인 방법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사용될 수는 있다. 내가 직접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일부러 주변 사람들에게 혹은 제 3자에게 말을 흘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대방에게 오도된 말이 들어가게끔 하는 방법으로서 내 입으로 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목적한 대로 상대방이 인식하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이 방법 역시 거짓말을 추궁받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빠져나갈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말을 퍼뜨린 제3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면 된다. – 나중에 어르거나 달래면 된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닌데 오해가 있었다’ 거나 ‘OO가 잘못 이해한 것이다’라고 몰아 가면 임시방편으로 해결이 된다.
5.물타기 (왜곡하기)
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속이기를 할 경우에 사용된다.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나의 거짓 상황을 감추기 위해서 진실이었던 상황을 상대방에게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세뇌시키는 방법이다. 사실상 거짓말을 한 것은 없다. 진실된 상황을 강조했을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 발생할 수도 있는 거짓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게 할 의도로 미리 물타기를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사회생활의 요령이기도 하고 매우 훌륭한 처세술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장점을 어필하는 행위를 ‘거짓말’의 범주로 다루는 것은 오버센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 민감한 어떤 사안에서는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
바람피우는 남자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매일 거래처 접대하느라 술집을 간다고 하며 사진도 찍어 보내고 영상통화도 하지만 - 실제로 거래처 접대가 맞긴 맞다. – 그중에 어떤 한 번은 다른 여자를 만나 술을 마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상대방은 실제 접대 사례에 대한 무수한 경험적 기억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그러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 짓게 된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사실과 다르게 인식하게 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대개의 경우, 이런 복합적인 방법은 침묵하기나 부분적으로 말하기 등의 방법과 함께 사용된다.
필자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편에 속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표가 나서 능숙하게 잘하지 못한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진실하고 무결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 나 역시도 거짓말을 많이 했고, 또 앞으로도 어느 정도는 하게 될 것 같다. 거짓말하지 말고 '차카게살자'라고 주장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단지,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적극적인)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이 실제로는 '소극적인 거짓말'을 교묘히 사용함으로써 거짓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이익을 너무도 당연하게 아니 오히려 당당하게 취하는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싶을 뿐이다. '우아한 거짓말'이니 '착한(화이트) 거짓말'이니 하면서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교묘한 거짓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능히 그 유혹을 뿌리칠 만큼 의지가 강하거나 고매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당성을 부여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좀 더 민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욱더 우리의 죄성을 깨달아 알 필요가 있다. - 죄를 짓지 않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의 가까운 이웃, 나와 친밀함을 나누는 어떤 소수에게만큼은 아주 사소한(소극적) 거짓말조차도 하지 않는 일련의 경험들을 만들어보고 또 간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Honesty is such a lonely word. 솔직함이란 외로운 단어예요 Everyone is so untrue. 모든 사람들이 진실하지 못하죠 Honesty is hardly ever heard, 솔직하다는 말은 듣기 어렵죠 but mostly what I need from you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으로부터 필요한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