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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토 Jul 23. 2019

허파까지 축축해지는 불편함

미드소마(2019)를 보고

푸른 배경 앞에서 화관을 쓰고 울고 있는 흰 옷을 입은 여자. 포스터만 봐도 느껴지듯 미드소마(2019)는 평범한 공포 영화가 아니다. 백야 아래 초원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밝은 영상미를 자랑하지만 이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대비되어 축축하기 짝이 없는 불쾌함을 만든다. 장담컨대 미드소마(2019)는 모두가 좋아할 영화는 아니다. 템포는 느리기 짝이 없고 그렇게 만든 긴장 끝에 찾아오는 자극적인 장면은 보는 이에 따라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깜짝깜짝 놀라게만 하는 공포 영화에 질렸다면, 그리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쾌함을 이겨내고 장면과 장면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면 극장을 나서면서도 여운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읽지 마세요!



대낮의 공포

해가 지지 않는 드넓은 초원. 아기자기한 수가 박힌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춤추는 곳. 스웨덴의 하지 축제를 배경으로 하는 미드소마(2019)는 평화로워 보이는 공간에 소름 끼치는 불쾌함을 이식한다. 영화에서 백야는 주인공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감독이자 각본을 담당한 아리 애스터는 백야를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물어 현실감각을 망가뜨리는 존재로 해석한다. 일 년 중 한 달 동안 지속되는 백야는 비밀스러운 공동체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 같다. 아니, 모든 것의 기원인 것 같다. 한 달간 지지 않는 태양 아래서 잠을 자기 위해 암막을 만들어야만 하듯이 정다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주민들은 계속해서 비밀을 만들며, 향정신성 약물을 나누고 각종 범죄행위의 공범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누구보다 끈끈하게 결속한다.


백주대낮이 만드는 공포는 기만과 눈속임에서 오는 것이 아니오, 과정과 결과를 충실히 보여주는 데서 온다. 영화는 친절하게도 다가올 참극을 누차 경고해준다. 삽화와 대화는 한치의 어긋남 없이 복선으로 작용한다. 절벽 앞에 선 노인은 뛰어내리며 마을 처녀는 여행자를 유혹하고 곰은 불에 탄다. 심지어 공포영화의 클리셰마저 충실히 따른다. 도망치려 하거나 금기를 깬 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교과서적인 섹스신 사망 플러그도 있다. 하지만 미드소마(2019)가 만드는 공포는 예상하지 못해 생기는 공포가 아니라 다가올 걸 알기에 생기는 공포에 가깝다. 영화는 다른 공포 영화들이 효과음이나 과장된 리액션으로 돌려 표현했을 법한 장면마저 생생하게 재현하며, 관객은 영화 속 여행객들이 느꼈을 불쾌함을 오롯이 체험하게 된다.


중반부 절벽 시퀀스는 필연에서 비롯되는 대낮의 공포를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중요한 장면이다. 앞서 말했듯 영화는 반복적인 암시를 통해 무슨 일이 생길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숙소 배정으로 시작된 대화는 자연스럽게 칠십이 세가 된 마을 주민의 운명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며, 침대 맡에서 나눈 대화에서 튀어나온 절벽이라는 단어는 무시하려 해도 추락을 연상시킨다. 이윽고 낯선 이국적인 의식이 이어지고 의식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두 노인은 전날 주인공이 본 삽화처럼 손을 베어 비석에 피를 묻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절벽 끝에 선 노인이 뛰어내릴지 아니면 시늉만 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양자택일의 기로 앞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 복선들은 어찌 보면 너무 뻔해 뛰어내리지 않는 게 더 반전으로 다가올 것 같다.


그러나 기어코 노인은 뛰어내리고 영화는 카메라를 돌리지 않고 죽음의 장면을 직시한다. 롱 샷으로 도약부터 추락까지 고스란히 담은 카메라는 으깨진 노인의 머리를 의도적으로 클로즈업한다. 뒤이어 투신한 노인은 자살에 실패하는데, 카메라는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울부짖는 노인의 얼굴과 산산조각이 난 다리를 차례로 담는다. 이윽고 그의 머리를 나무망치로 세 번 내려치는 장면은 의사봉을 휘두르는 모습을 연상시키며, 영화는 절벽 시퀀스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것 같다: 관객의 역할은 다음 장면을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장면을 체험하는 것이다. 느리지만 묵직하게 진행되는 절벽 시퀀스가 주는 공포는 놀라움보단 불쾌함에 가깝다. 영화는 백야의 태양처럼 예정된 참극을 가감 없이 비추며 어느 것도 외면할 수 없는 대낮의 공포를 만든다.


외부인과 내부인

여행자들은 공통적으로 이방인의 시선으로 공동체를 바라보지만 그 관점은 상이하다. 인류학을 전공한 크리스티안(잭 레이너 분)과 그의 친구들은 밝은 초원 위 공동체가 축조한 암막 속 비밀을 파헤치는데 몰두한다. 문화상대주의를 견지하는 조시(윌리엄 잭슨 하퍼 분)부터 소위 말하는 어글리 아메리칸에 가까운 마크(윌 폴터 분)까지 양상은 다양하지만, 근친상간 유무를 캐묻는 전자의 인터뷰나 조상을 기리는 나무에 오줌을 싸고도 뻔뻔하게 반문하는 후자의 행위는 공동체의 입장에서 별 다를 게 없는 행위다. 계획적인 인구 조절이나 맹신에 가까운 종교적 규율은 백야 아래 소규모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그림자이며, 이런 필연성에 질문을 던지는 이들은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반면 대니(플로렌스 퓨 분)는 초원 위에서 춤추는 공동체의 밝은 면에 주목한다. 그는 관계의 상실을 떠올리게 하는 어둠을 두려워한다. 불안감이 맴돌던 밤은 기어코 그의 가족을 앗아갔고 뉴욕의 어두운 아파트에서 연인과의 불안정한 관계를 확인해야만 했다. 결국 기댈 곳 없이 혼자 남겨진 그는 감정을 숨기고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연명한다. 그런 대니가 우연히 만난 하지 축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노동부터 감정까지 모든 것을 공유하는 유토피아적 공동체에서 대니 유대감 깊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또한 공동체 역시 대니를 필요로 한다. 그는 절실하게 관계의 회복을 갈구할 뿐만 아니라 마을에 오래도록 기여할 수 있는 젊은 백인 여성이라는 인구학적 특성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동체와 대니는 서로를 향한 구애의 춤을 추며 카메라는 동적인 클로즈 샷으로 융화의 과정을 담아낸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 공동체의 밝은 면만 보는 대니는 필연성에 저항하지 않고 체험한다. 마을에 도착하기 전 초원에서 버섯차를 마시고 환각을 보던 대니는 펠레(빌헬름 블롬그렌 분)가 꺼낸 가족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낀다. 대니에게 공동체는 아직 낯선 존재이며 방황하던 그는 어두운 건물과 숲 속을 헤매며 죽은 가족의 환상을 본다. 그러나 축제가 진행될수록 대니는 점점 내부인에 가까워지며 5월의 여왕을 가리는 춤을 추며 변화는 절정에 다다른다. 기둥을 돌며 춤을 추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참가자들과 같은 동작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공동체를 호흡을 같이하며 5월의 여왕이 된 대니는 그토록 갈구하던 가족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다.


이 시점에서 줄곧 대니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잠시 크리스티안의 시점을 차용한다. 대니와 달리 여전히 외부인으로 남아있는 그에게 공동체는 배타적이며 괴이하기 짝이 없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야(이자벨 그린 분)와 성관계를 맺는 동안 그들을 둘러싼 나체의 여성들은 마야의 성적 쾌감마저 공유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에게 그는 유전적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성관계가 끝난 후 크리스티안은 나체로 남겨진다. 이윽고 축제의 정체가 밝혀지고 인신공양의 제물로 그를 지목한 대니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외부인이 아니다.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니는 개인보다는 집단의 일부에 가까운 모습으로 존재하며 마을 주민과 같은 모습으로 오열하며 감정을 공유한다.



미드소마(2019)는 감상자의 시각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달라지는 재밌는 텍스트이다. 예를 들어 다른 마을 주민의 죽음을 보며 방언하듯이 오열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모든 것은 유토피아를 가장한 광기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 결정에 감정적으로나마 솔직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2019년 오늘의 시대 상황에 비춰 읽더라도 연상되는 것이 많다. 공동체의 폐쇄성에 주목하여 브랑코 밀라노비치(2017)가 지적한 시민권 지대 문제와 그로 인해 발생한 난민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고, 인종 구성을 보고 단일 민족 사회와 다인종 사회의 충돌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각자의 주안점이 어딨는 가에 따라 더 흥미로운 주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메시지를 상징과 미장센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아리 애스터 감독의 공이 크다. 그가 직접 쓴 각본은 '말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영화라는 텍스트의 정수를 보여준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긴장감은 스웨덴의 아름다운 자연과 대비되어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자연스럽게 관객을 화면 속 세상으로 끌어들인다. 작년에 주목받았던 유전(2018)에 이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감독의 다음 행보에 눈길이 간다.


참고문헌


브랑코 밀라노비치. 2017.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30년 세계화가 남긴 빛과 그림자. 21세기 북스.


영화

아리 애스터(감독 및 각본). 2019. 미드소마(Midsommar). B-Reel Films, Square Peg(공동제작).

아리 애스터(감독 및 각본). 2018. 유전(Hereditary). A24, Palmstar Media(공동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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