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해석에 대한 소심한 접근법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재개관했다.
작년 2020년 11월 5일, 코로나로 피렌체는 보건 관리 최고 단계인 레드존에 속하게 되면서 결국 우피치 미술관도 문을 닫은 지 77일만에.
에이크 슈미트 우피치 미술관장은 2020년 많은 우려속에서도 우피치 미술관 문을 닫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정했었지만,
매일 3~4만명의 코로나 확진자가 생기는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모든 박물관은 코로나로 결국 굳게 문을 닫았고 박물관과 미술관의 모든 소장품들도 긴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2021년 1월 19일, 우피치 미술관을 비롯하여 피렌체의 몇몇 미술관, 성당은 닫혔던 문을 열었다.
반갑기 그지 없는 일이다.
이탈리아에서 우피치 미술관의 재오픈은 다양한 의도에서 의미깊다.
1월 21일 아침, 우피치 미술관장과 토스카나 주지사, 이탈리아 교육부 장관이 우피치 미술관 재개관을 축하하러 모였을 정도이니 말이다.
한적했던 우피치 미술관 정원을 자주 거닐던 나도, 재오픈 첫날의 반가움에 아침 일찍 달려갔고, 운이 좋게도 재오픈 축하식을 보게 되었다.
많은 기자들이 우피치 복도로 들어오는 세 사람을 취재하며 분주했고, 그들은 흥분과 즐거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자들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앞에서 사진을 찍던 그들의 모습이 여전히 슬퍼보이는 느낌을 받았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기념비적인 미술관을 재오픈 한다고 마냥 들뜰 일은 아니라는 사실,
서점가에서 불고 있는 단테의 <신곡> 열풍처럼,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 사태에 있고,
이탈리아도 겪은 많은 죽음과 앞으로의 고난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 세 사람의 얼굴에 여전히 드리워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젋디 젊은 교육부 장관 루치아 아졸리나의 얼굴은 누구보다도 굳어 있었다.
30대의 여성 교육부 장관이라는 이슈가 어울리는 듯한 단호한 인상, 우리에게는 좀 이색적인 광경이었던 것도 있었지만
나에게 드는 또하나의 의문은.. 도대체 왜 교육부 장관이 온 거냐는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 재오픈을 기념하고 싶다면 응당 문화부장관이 와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이탈리아의 미술관에 대한 철학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미술관 박물관의 가장 큰 목적이 물론 역사적으로 중요한 다양한 작품들과 소장품을 보존 전시하는 것이지만,
미술관의 존재 이유가 교육에 있다고 강조하는 이탈리아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교육을 위해 인간 세상에 필요한 곳이다.
이것은 르네상스를 일으킨 피렌체의 정신, 이탈리아가 말하는 인문학의 정신이다.
미술이 어떤 교육을 한다는 것인가...?
많은 아이들, 청소년, 학생들이 미술관 견학을 필수 체험 교육으로 한다. 그러나 단지 학생들을 위한 것이기만 하다면
우리에게 과연 미술관이 그토록 매력적인 곳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이탈리아 미술관 작품들에게 빠져서 내 삶을 온통 이곳에서 서성이며 보낸 나에게는
미술관이 교육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학생들에게만 아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미술관은 우리 모두를 위한 교육현장이다.
우피치 미술관장님과의 인터뷰에서, Conoscenza라는 말을 하셨다.
미술관은 우리의 Conoscenza에 대한 의무를 가지기에 미술관을 오래도록 닫아둘 수 없다고.....
사전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일반적인 지식, 상식, 정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림을 통해 어떤 것을 ‘앎’ 이라는 의미라면, 그 어떤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나에게 미술관은 우리 삶에 대한 모든 감정, 혼자 떠올리는 생각들, 각자의 욕망과 우리가 갖고 있는 표현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과거 사람들의 생각이나
미처 깨달지 못했던 나의 욕망과 내면에 담긴 갈등, 심리적인 불안이나 흥분, 철학적으로만 알고있는 이상세계에 대한 형상화이다.
그것을 그림이라는 도구로 만들어 놓았기에
우리는 미술관에 있는 그림을 통해 나를 다시 보는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의 대표작품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인간의 대한 희망과 믿음에 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영혼과 이성이 지성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인들이 가진 확신이 비너스로 탄생되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나는 미술관 개관에 문화부 장관대신 들어온 교육부 장관의 중요성처럼,
미술관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 필요한 인생 교육을 하는 그림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우리는 그림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가장 많이 궁금해하고 묻는 질문이다.
당신은 그림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림을 해석하는 자의 의무가 그만큼 중요한 것일까?
그림은 누가 해석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미술에 대한 감상과 해석은 다양한 이론과 의견 속에서 명확함없이 땜질되어 왔다.
다양한 수준을 가진 감상자와 미술사학자에서부터 도슨트까지 다양한 해석자들이 활용하는 지식때문에
우리는 미술관에 있는 그림들을 올바르게 보고 있는지 기준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른 채 그림 앞에 선다.
과거에는 그림을 향유하는 세대가 적었다.
한정된 계층만이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을 보고 즐기며 학자들에게 묻고 또 천천히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한정된 계층이 본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때가 그림 감상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괴테가 그림에 대한 의견을 내어 놓는 것만 보아도
인간에 대한 통찰과 그림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즐기고 있고
색이 주는 느낌에 대해 본인의 그날 컨디션으로 매번 다르게 느껴진다고 고백하는 여유를 가지며 감상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그림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기 시작했다.
매번 유럽에서, 혹은 한국에서 대가들의 전시가 열리면 인산인해를 이루며 사람들이 큰 미술관으로 몰려들고 있다.
우리가 이제 그림을 미술을 향유하고 즐기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미술을 즐긴 역사가 짧다.
나는 이 점을 우리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의 인생도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한가지의 본질을 이해하고 전문가가 되거나 그것을 쉽게 하거나 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그것은 역사의 시간이다.
시간이 길어지면 다양한 의견과 경험에서 오는 시행착오를 통해 그것을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긴 역사를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의견이 많아 깊이를 가지고 있거나 경험을 통해 오는 시행착오로 이론적인 오류를 정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역사란 그냥 시간의 단위가 아니다.
서양 미술을 알고 감상하기 시작한지 채 100년이 안되었고,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일이 대중화 된지도 사실 20년도 안된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속에서 많은 것들을 듣고 읽고 하는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니
내가 그림을 아는 것 같긴 한데, 그림 앞에 서면 어떻게 해야할 지는 모르는 기이한 상황이 일어나 버리고 만다.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은 나에게,
그림을 해석하고 글로 쓰고 말로 들려주는 일은 많은 고민을 갖게 한다.
이탈리아는 적어도 1400년대 이후부터 그림을 감상하고 해석해 왔다.
그들의 해석방법을 배운다 해도 그것이 이제 막 그림 감상을 취미로 갖고 싶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출발점이 다르고, 관심의 촛점이 다르고 깊이가 다르다.
이것은 적어도 역사라는 시간의 차이에서 온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기한 것을 많이 배운 나로서는 많은 것을 빨리 해석하고 알리는 일에 몰두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탈리아에서 미술관 가이드일을 오래 하면서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현장에서는 의미없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었다.
문자의 알파벳을 이제 막 배우고 있는데, 돌체형식의 문체가 가진 의미와 그 수려한 세련미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그냥 잡담이 되어 버린다.
어느 순간, 그림을 해석하는 일도 시대에 맞춰야 하고 그림을 감상하는 일도 단계를 거쳐야 재미있어 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을 본다는 것, 감상자가 자신의 눈과 감정, 잠들어있는 자기 감성을 들여다보는 훈련이라는 자세로 보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그림을 해석한다는 것, 가장 소심하게, 신중하게 해나가야 한다.
너무 많은 지식을 담는 것이 좋은 해석일 수 없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림 해석은 감상자에게 맞춰지는 해석이 되어야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그림에 대한 다양한 연구 지식과 정보, 깊이있는 의미를 어떻게 적절히 배열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한 그림에 대한 많은 지식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림에 많은 지식이 들어가면 그것은 그림을 통한 정보가 되어 버린다.
자칫, 그림에 담긴 정서를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지식의 허영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생각과 내면의 욕망을 보는 것,
그것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인류가 가진 가장 세련된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림은 지성이나 미적 감각이라는 인간만의 독특한 능력이 만들어내는 창조물로 나를 알아가는 훌륭한 교육이다.
그림은 사치스러워 보이는 것이나 실상은 인간이 가진 생각의 형상화이다.
그래서 과거의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모습, 내면의 심리를 알아가는 도구인 그림을 해석하는 일은 깊은 배려심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탈리아는 농부 아저씨의 취미가 미술관 가기이거나, 퇴근 후에 아이와 손 잡고 오는 아버지가 즐겁게 그림 앞에서 대화하는 일이 일상이다.
그림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말이 그들에게 친근하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림을 보며 느끼는 감성을 즐기는 것이 취미가 된다면, 혼자 있는 시간도 즐길 줄 알고, 그동안 방치해 둔 자신과의 대화를 비로소 시작하게 되지 않을까.
그림 해석의 과제가 그림 감상을 취미로 가질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라면,
소심하고 신중하고 배려심있게 써내려가야 한다.
적어도 미술학자들이 연구하는 것은 또 다른 길위에 있다.
그림을 취미로 보는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림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솔직히
내가 하는 그림 해석이 과연 해도 되는 것인가. 매번 돌아보게 된다.
내가 하는 그림 해석이 과연 맞는 것인가가 아닌, 내가 하는 그림 해석이 과연 해도 되는가,
그림감상을 취미로 삼을 기회를 놓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