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나무 1화. 프롤로그 -나무로 살아도 괜찮아, 근데 ..(1편)
나는 늦깎이 유학생이다. 30대에 유학 와서 13년을 보냈다. 얼마 전 대학원 석사논문을 마치고 한국으로 막 돌아가려는 참이다. 나의 느림보 이탈리아 유학 시절은 어려운 공부, 외로운 시간으로 채워졌다. 어느 순간 목적도 잃어버리며 버텼던 시간에 인생공부를 더 많이 한 것 같다.
나의 13년을 글로 정리하며 미처 알지 못한 소중한 시간들을 복원해 보고 싶다.
나의 이탈리아에게 한마디, 그동안 너무 감사했다고... !
나는 후진국 이탈리아에 유학 왔습니다. 유럽에 대한 우리들의 로망이 코로나로 무너져 내렸지요. 우리가 알던 선진국 유럽은 전염병의 확산을 막지 못한 무기력한 모습으로 여지없이 무너졌고 하루 600명의 확진자, 어느덧 3만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며 병원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매일 쌓이는 관을 처리하지 못해 군용 트럭이 동원되며 여러 공동 묘지로 옮겨지는 이탈리아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티비에 나올 때, 팬데믹 전염병만큼 유럽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아~ 내가 알던 유럽이 아니잖아..’
프랑스, 독일이 확진자 확산을 막지 못하고 영국의 총리가 전염병에 걸려 몸져 눕는 사태가 벌어지자 우리에게 유럽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빵꿀러~” 이태리 욕입니다.
“바떼네 비아” (꺼져!) 역시 욕이겠죠?
그렇습니다. 이탈리아는 조상들 잘 둔 덕에 그동안 편하게 입장료, 관광수입으로 먹고 살았던, 유명한 건축, 문화가 가득한 도시들이 즐비하지만, 실상은 후진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탈리아로 나는 13년 전 유학을 왔습니다. 이렇게 후진국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나무로 살지 마세요. 숲으로 사세요.
나는 13년 전에 이탈리아로 이사했습니다. 미술을 좋아해서, 평소 늘 꿈꾸던 미술과 가까이 살 수 있는 삶을 찾아 직장생활하며 모은 돈 3천만원을 들고 이탈리아를 왔습니다. 나는 단순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3년의 피렌체 그림 복원 학교를 마치고 기술사 자격증을 따고 복원 공방에 취직했습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살게 될 줄 알았습니다.
나는 결국 공부를 계속 합니다.
첫 달 월급 700유로, 다른 복원사 들보다도 많은 월급을 주며, 내가 오래 남아 주기를 선생님은 바랬습니다. 월급은 오르지 않을 것이고, 복원 공방의 일은 몇 년을 해도 늘 똑같을 거 같았습니다. 좀더 나은 직장을 찾고도 싶었지만, 한편으로 복원 공부를 해보니, 3년 공부는 기초에 불과해서, 나는 단순한 몇 가지 일만 할 수 있는 반쪽 짜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공부에 무모한 도전을 시작합니다.
로마의 대학에 입학해서 문화재 복원학과를 다니고, 고등학교 때도 안 하던 화학을 공부하고, 복원 이론 수업을 듣고 나무 종류에 대해 공부하고, 나무 벌레를 배우기 위해 생물의 세포를 배워야 했습니다.
대학교를 3년만에 졸업한 후에도 대학원 진학을 꿈꿉니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만 계속 나왔고, 시험을 통과하는 내가 신기하긴 했어도 공부가 머리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이탈리아어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친절하지 않은 만연체와 입체적인 구조를 가진 언어입니다. 비유법이 많고 다양한 표현 덕분에 나는 수업을 도통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상한(?) 것들을 필기하고 녹음하고 시험을 준비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려웠냐고요? 한국에서 철학과를 다닌 내가 이탈리아에서의 공부 중 화학이 가장 쉬웠다는 표현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배운 모든 공부 중 7개의 화학 과목이 가장 쉽고 명쾌했습니다.
늘 내가 이해를 못하는 것들을 시험치고 있는 내가 나도 이상 했으니요.
그리고 복원 대학원 시험을 치렀습니다. 20살의 풋풋한 학생들과 40대 초반의 내가 경쟁했습니다. 10명만 선발하기에 여러 대학에 걸쳐 시험을 도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나이를 숨기며 묵묵히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10명 안에 들었을 때, 같은 호텔에 묵었던 프란체스카라는 시칠리아 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기회를 내가 뺏은 것이었으니요.
대학원에서도 복원 이론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피렌체 학교, 로마 대학에서 복원 이론 수업을 들었지만, 대학원 복원 이론도 어려웠습니다.
나는 나의 한계를 탓했습니다. 언어의 장벽에 부딪치며 참고교재를 읽고 해석하고 읽고 해석하고, 이상한(?) 필기가 가득한 노트를 읽으며 나 혼자 피식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학교 앞 단골 바에 앉아서 바 주인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40대로 보이는 일라리아는 사실, 볼로냐 대학 복원학과를 나온 복원사였다고 합니다. 그도 일자리가 없어서 무료 봉사(?)를 몇 년 해주다가 바를 열었다고 합니다. 나도 그런 처지가 될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미술사보다는 과학에 더 치중하며 실습이 많았던 복원공부를 그만두었네요. 8년을 했으니, 시원섭섭했습니다. 머리가 좀 덜 아파 보자고 단순하게 하나만 공부하면 더 재미있고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미술사학으로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이탈리아는 대학원에 입학하려면 학부 때 관련 과목을 8개 이수해야 대학원 입학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학부 전공자가 아니면 실제로 대학원 입학은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학부로 다녔던 문화재 복원학과에는 미술사 과목이 6개, 복원 이론 과목 1개가 있었기에 나는 건축사 1과목을 치른 후에 미술사학과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느낀 전율은 피렌체의 집에서 학교까지 자전거로 15분이었다는 겁니다. 우르비노에 있던 복원 대학원은 기차로 4시간이 걸렸으니요.
나는 천국 같은 통학 시간에 쾌재를 부르며 학교를 콧노래를 부르며 다녔습니다. 자전거를 한 손으로 타거나,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와 기분이 좋은 날은 피렌체의 두오모 광장을 한 바퀴 돌아 학교로 가기도 했습니다.
수업은 최악이었습니다.
수업 내내 슬라이드가 가득했고 교수님은 3천장의 슬라이드에 끝도 없이 말을 했습니다. 대학원생이 되면 좀더 멋지고 능숙하게 공부를 하고 교재도 다 이해하고 강의도 다 알아듣고 할 줄 알았습니다.
내가 늦깎이 공부를 계속하며 자주 하던 말은 “너는 정말 미친 년이야!!” 입니다.
10시간씩 수업 녹음을 필기하고, 밤새 공부하고 외우고, 세시간 자고 시험치고 하는 생활을 하면서, 정작 저기 걸어오는 친구의 이름은 까먹고 살던 생활이었습니다.
교재는 없었고
교수님의 빠른 강의를 듣고 아이들은 모두 필기하기에 바빴고 대부분 녹음을 하였습니다.
몇 권의 책을 소개하셨지만, 교수님의 강의를 알아들어야 했으니, 필기 하면서도 나는 녹음을 하고, 집에서 2시간짜리 수업 내용을 다시 필기하고 읽고 외우기에 바빴습니다.
통학 거리는 천국인데 수업은 지옥이었다는 것을 천천히 느꼈지만 나는 최대한 낭만적인 생각을 하며 다니고 싶었습니다.
학기말이 되면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아이들은 한정적입니다.
대부분 두 과목 정도만 시험 준비가 가능했습니다. 한 학기에 한 과목도 통과 못한 적이 있지만 두 과목 이상 통과한 적이 없었습니다. 언어의 한계는 항상 느꼈습니다.
그런 내가 3년 만에 드디어 시험을 모두 통과하고 논문을 쓸 준비를 합니다.
막 논문작성을 시작 할 즈음에 전세계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졌습니다.
코로나로 전세계가 셧다운이 되자, 논문은 내 불안과 두려움을 잊게 해주는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는 뉴스를 보지 않았습니다. 뉴스를 보면 세상에 대한 걱정에 논문에 몰두할 힘을 자꾸 약하게 밀어 내었으니요.
처음에는 이태리어 문장을 만드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 보다 어려워 하루에 한 페이지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런 날은 잠을 더욱 설쳤고,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기도 하였습니다.
논문 일기를 함께 써 나갔습니다. 오늘 공부한 것, 자료 분석을 할 페이지 수를 세고, 오늘은 어디까지 분량이 나와야 한다고 매일의 논문 작성 계획을 세우고, 저녁엔 계획을 얼마나 달성했는지를 다시 평가하고 기록하였습니다.
<로렌조 로토라는 화가의 피에타 작품의 시대적 연구> 라는 주제는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가장 단순한 주제였습니다. 주제를 찾는데 나는 4개월을 보냈습니다. 라파엘로와의 작업, 그가 일하던 도시의 상황, 복잡한 문제들과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던 삶에서 느낀 다양한 감정들, 그의 타고난 본성에 대한 이해를 변화된 작품세계와 연결 시키는 작업은 재미있으면서도, 이태리어 문장을 만드는 어려움에 늘 피곤해졌습니다.
한달 반이 지나니, 문장을 쓰는 것이 어느 날부터 편해지고 속도가 붙어 서너 장을 쓰기 시작합니다.
아침부터 미리 문장을 쓰기 위해 책상 머리에 앉아 어제 읽었던 논문을 읽고 나서 또 문장을 쓰기 시작하면, 머리에 윤활유가 매끈하게 돌기 시작합니다.
4월 중순이 되자, 80페이지를 넘어서고 110페이지의 목표가 이제 조금 윤곽을 드러냅니다. 나는 나에게 응원합니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무너지지 말라고.
4월 25일! 드디어 98페이지의 본문을 마치고 결론을 쓰기 시작합니다.
나는 기쁜 마음에 교수님께 3쳅터 파일을 보내며, 본문을 쓰는 데 오래 걸렸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메일을 보냈습니다. 지금 결론을 쓰고 참고목록을 정리하고 그림 목록을 정리한 파일을 이번 주 안으로 보내드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말과, 코로나에 대해 조심하시길 건강을 기원 드리며 send를 누릅니다.
교수님은 내가 베네치아에 갇혀 있지만 이탈리아 전국이 다 코로나로 어려우니, 힘내라고 너에게 뜨거운 응원의 포옹을 보낸다고 전하십니다. 다정한 교수님이지만 나와 친숙하진 않기에, 동지애와 자비의 마음들이 느껴져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힙니다.
한편으론, 나의 논문이 끝나고 내가 이 논문 감옥에서 해방 될 날이 얼마 안 남았음에 느낀 설렘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생각처럼 2~3일에 써지지 않았습니다. 글이라는 건 살아 있는 게 분명합니다. 글이라는 놈은 감정이 있어서, 머리만으로 써지지 않고 내 마음이 함께 공감해줄 때 문장이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고지를 바로 앞에 두고 나는 3일을 헤매고 잠시 멈춘 후에 4월 29일, 겨우 4페이지의 결론이 완성됩니다.
나는 결론을 보내고, 단 하루, 4월 30일에 아무것도 안하고 푹 잠을 잤습니다. 일어나 한 시간 동안 정성스레 떡볶이와 불고기를 만들고 시원한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 발코니로 나왔습니다.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몰아보며, 발코니 앞에 펼쳐진 이탈리아의 작은 하늘을 바라보며 내가 믿는 신께 감사하고, 나의 유학 생활의 마침표를 찍게 된 하루를 자축합니다.
띵동~!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교수님의 메일입니다. 나의 논문을 잘 보았고 수고했다고 하셨습니다. 문장을 좀 고쳐야 하는데, 7월 졸업이 가능하다고 살짝 웃으십니다. 그 메일이 내 13년 유학 생활을 말해줍니다. 왜, 여기서 그렇게 살았는지를…
나는 발코니를 걸으며,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의 느린 발걸음을 봅니다.
더 이상, 다음 시험을 걱정하고, 녹음한 수업을 필기하기 위해 밤을 새는 일도, 논문에 대한 부담감에 잠 못 드는 일 없이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내 시간을 계획할 수 있는 삶을 얻은 것 같습니다.
나는 천천히 맥주를 마십니다.
혼자 있는 고요함을 느끼고, 요즘 유행하는 뽕짝을 듣고, 낭만적인 90년대 가요를 들으며 흥얼거리다,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피아노 소리를 듣습니다. 다 나름의 즐거움이 물결처럼 흐릅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나의 유학생활은 나무로 살았던 삶입니다. 나는 숲을 보아야 했습니다.
나는 나의 유학생활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무로 살았기에, 나무로 사는 삶과 숲으로 사는 삶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었습니다.
후회스런 유학 생활이지만, 언제나 실패는 아닌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의 삶을 숲으로 살고 싶습니다.
나무로 사는 삶과 숲으로 사는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 (2편)에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