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페루자에서 이탈리아어 연수, 밥을 하다 울음 터지다.
공원의 자스민 향기가 밤 발코니에 가득합니다.
하늘에는 각종 별들이 구름 사이에서 빛을 냅니다.
밤의 발코니에 앉아 가끔씩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는 한밤의 고요를 경험합니다. 공원의 자작 나무가 여름 바람에 스윽스윽하고 흔들립니다.
베네치아의 집, 발코니에 앉은 밤 풍경입니다.
문득, 어릴 적 엄마의 뜨개질 잡지책에서 보았던 예쁜 유럽의 발코니가 떠오릅니다.
나는 하얀 레이스천이 덮힌 둥근 탁자에 멋진 가죽 노트와 펜이 놓여있던 그 유럽의 발코니 사진을 보고 그런 곳에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습니다. 그리곤 그 꿈을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단순히, 좋아하는 미술을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싶은 마음으로 훌쩍 떠나온 이탈리아에서의 13년, 이제 너무나 그리운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막 짐을 싸고 있는 이즈음에 나는 그 꿈이 떠올랐고 지금 나도 모르게 그 꿈을 이루며 유럽의 밤 발코니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13년의 치열했던 삶의 끝에, 이런 날 며칠이 나에게 허락됩니다. 그런 며칠의 날들이 어쩌면 그래서 더 소중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논문을 끝내고, 좋아하는 글을 쓰며 그림 사진을 뒤적이다가 고요한 발코니에서의 밤 글 이라니요…
지난 시간들이 누군가의 상상처럼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했기에 이 짧은 자유와 성취감이 더 진하게 느껴지는 듯 합니다.
나는 13년의 이탈리아의 시간 동안, 약 3년의 복원 학교 공부를 마치면 취직을 하고 복원사로서 이탈리아에서 그냥 저냥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는 해외로 유학이나 이민을 가면, 그곳에서의 정착을 꿈꾸기도 하지요. 나 역시도 그랬습니다. 여기 어딘가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리라.. 하고 말이지요.
근데, 나는 이곳에서도 항상 여행자였습니다.
페루지아에서 1년, 피렌체에서 4년, 로마에서 3년, 다시 피렌체에서 3년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2년.. 이렇게 매번 그 도시에 익숙해 지면 또 떠나기를 결심하고 또 짐을 쌓습니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6개의 학교를 다녔습니다. 우르비노 복원 대학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과정을 마쳤고 3년 주기로 공부를 이어갔지요. 13년을 쉬지 않고 공부를 했으니, 이탈리아어만큼은 유창한 능통자로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름 유창하다는 소리를 듣긴 하지만, 이탈리아어 능통자는 아닙니다. 이탈리아어는 너무 어렵고 수많은 단어들은 늘 낯선 언어입니다. 친구에게 해주는 저의 충고는 이렇습니다.
“이탈리아어를 정복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 그냥 떠듬거려도 말만 통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라고! 무모한 도전은 너의 청춘을 낭비할 뿐이야.”
13년동안 다녔던 6개의 학교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나의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마땅히 다른 이야기가 없을 만큼 학교를 다닌 기억 외엔 없으니요.
첫번째 학교는 페루지아의 어학교 입니다. 페루지아 대학 부설 외국인 어학교,이탈리아는 페루지아와 시에나, 두 도시에 이런 학교가 있습니다. 나는 안정환 축구 선수가 홀대(?) 받았던 페루자 어학교를 9개월 다녔습니다. 한국에서 기본 문법을 마스터 하고 왔기에, 처음에는 무척 재밌었습니다. 아이들과 몇마디 나누는 것도 좋았고, 밤마다 열리는 파티에 초대도 받았고, 외국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습니다.
미국인 흑인 여성과 친구가 되고, 은퇴 후 3개월을 이탈리아에서 어학배우며 여행을 온 호주 부부 마르코와 앤도 만났습니다. 어학교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어리고 귀여운(헐..) 동양 여자이니, 나름 인기도 있어서 로맨스 따위도 있었지만 그건 추억으로 잠시 묻어두겠습니다. 혹시, 기분이 좋아지면 그 보따리를 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학원은 3단계로 A는 기초, B는 중급, C는 한국에서 외대 출신들이 다니는 수준입니다. 나는 B2단계까지 공부하는데 8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문법은 그저 문법일 뿐, 실제 수업이나 이탈리아 생활 깊숙이 들어가면 생활언어를 다시 배워야 합니다.
페루자는 초코렛과 재즈의 도시입니다. 원래는 중세 시대 교황의 두 번째 은신처로 알려진 곳으로, 광장엔 멋진 분수도 있고 미술관도 있습니다. 그 분수가 중세의 유명한 조각가 니콜라 피사노의 작품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교과서에서 보고 알았습니다. 중세의 미켈란젤로에 해당하는 피사노의 작품이 동네 우물처럼 광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게 이탈리아의 매력이기는 합니다. 박물관에 고이 보관되어야 할 작품들이 동네 수도꼭지로 사용되는 나라니까요.
광장에는 낮에 늘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11월 광장이라 불리는 그 곳에는 두오모 성당 옆 계단에 사람들은 일광욕을 하고 친구를 만나느라 늘 계단에 앉아 있었고, 근처엔 피자집과 슈퍼가 있어, 이태리 피자를 사 들고 맥주를 마시며 광장에서 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게 유럽의 삶이었습니다. 첫해의 꽃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도착한 1주일은 악몽이었습니다.
2007년에는 아직 인터넷이 많이 보급이 안되었기에, 월세를 얻은 집은 인터넷이 안되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노트북을 들고 창가에 바퀴벌레처럼 붙어 앉습니다. 옆집의 안테나를 훔쳐 쓰는 방법입니다.
그 때는 인터넷이 워낙 느려서 영화 한편을 다운 받으려면 하루가 걸렸습니다. 밤새 컴퓨터를 켜두고 운이 좋으면 다음날 영화 한편을 볼 수 있었으니요. TV를 켰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들려 얼른 다시 꼈습니다.
1주일을 벽만 쳐다보고 앉아 시간을 보내니, 감옥 같았습니다. 겨우 밥이란 걸 해야겠다 싶어 슈퍼에 갔더니 물이 왜 이리 종류가 많은지요?
사람들이 많이 사가는 물을 사고 집에 와서 밥통에 쌀을 넣고 물을 부었더니 세상에나… 물에서 치이익~하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게 가스물이라는 걸 그 때는 몰랐습니다. 기포가 올라오는 물에서 소리까지 나니, 나는 밥통이 폭발하는 건 아닌가 하고 겁을 먹고 물 붓기를 멈췄습니다.
“아니, 이런 불량물을 팔다니..”
나는 화가 나서 슈퍼에 다시 갔더니 세상에나… 문이 닫혀 있는 겁니다.
오후 1시인데 문을 닫다니… 그 때 처음 유럽에는 시에스타라는 게 있어서 점심 시간 약 3시간을 상점 문을 닫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모든 게 문화 충격이었고 나는 결국 집에 돌아와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내가 못 올 곳을 왔구나…’
그게, 늦깎이 유학 시절의 첫 1주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