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류진 지음, 2021년 4월 15일 발행
2025년 10월에 읽음
[일의 기쁨과 슬픔], [연수]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로서 소설가 장류진의 또 다른 이야기에 설레는 기대를 안고, [달까지 가자]를 펼쳤다. 이 소설은 장류진의 첫 장편으로 e-book 기준으로 전체 415 페이지에 이르지만, 이틀만에 틈틈이 다 읽어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구성과 빠른 호흡으로 이루어져있다.
소설은, 꽤나 보수적이고 꽤나 박봉으로 알려진 제과업계에서 그래도 나름 대기업이라는 '마론제과'에 다니는 흙수저 여성 청년 직장인 3인방이 '이더리움'이라는 가상화폐 투자를 통해 '달까지 가자'를 외치며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대한민국에 코인 광풍이 불던 2017년에서 2018년초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현실감을 더했으며 일확천금 말고는 탈출구가 안보이는, 가진 것 없고 빽도 없는 청년 직장인들의 현실묘사가 탁월해, 읽다보면 그들의 코인투자가 망하지 않기를, 떡락하지 않기를 응원하게끔 만드는 소설이다.
주인공 다해와 직장 동료 은상, 지송, 이 3인방은 부모의 지원없이 스스로 앞길을 헤쳐나가야하는 비슷한 처지로, 학자금 등 각종 빚을 안고 사회생활을 시작해 각각 5,6,9평 원룸에 살며 박봉인 월급을 쪼개고 나누어 다음 월급날까지 버텨내고 있는, 소위 흙수저 직장인이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더라도 모두의 시작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나와 비슷한 처지이기에 편한, 일주일에 한번 같이 점심을 먹으며 회사 흉, 상사 흉, 동료 흉을 보는, 회사에서 만난 친구같은 관계다.
돈에 밝은, 돈을 좋아하는 구매팀 은상은 늘 돈을 모으고 돈을 굴리고 싶어해 회사 내에서 치약, 스타킹, 밴드 등을 파는 '강은상회'를 연 이력이 있을 정도로 돈에 집착하는데, 그래서인지 코인의 광풍이 불던 2017년, 셋 중 가장 먼저 '이더리움'에 투자해 떡상을 경험한 후 이를 다해와 지송에게 권한다. 이들에게 쥐꼬리만한 월급만으로는 5,6,9평 원룸에서 탈출할 기회도, 자력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진 빚을 다 청산할 힘도, 부모를 부양할 여력도, 그 가능성도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해가 먼저, 그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 현관과 방, 화장실과 방 사이에 턱이 있고 현관에서 침대가 보이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구조의 - 새 원룸을 보고 온 날, 은상의 도움을 받아 덜컥 '이더리움' 투자를 시작한다. 지송은 은상과 다해가 코인 투자하는 걸 탐탁치 않게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둘보다도 답이 없는 처지 - 무기계약직 신분, 결혼을 꿈꾸지만 현실은 외국(대만)에 사는 얼굴만 잘생긴 대학 신입생과 연애하는 처지 - 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 은상과 다해가 코인투자로 번 돈으로 셋이 떠난 제주여행에서의 사건들이 트리거가 되어 뒤늦게 코인 투자에 합류한다.
**** 아래부터는 스포일러 ****
코인은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지만 J 커브를 그리며 상승하고, 그 과정에서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하는 3인방. 그래도 코인투자를 시작한 순서대로 각각 약 30억, 3억, 2억 가량의 수익을 내고 엑시트한다. 은상은 회사를 그만두고 성수동에 꼬마빌딩을 사 임대사업자가 되고, 지송은 사업 준비를 하는 와중, 다해는 빚없이 전세집으로 옮길 희망을 품으며 그래도 회사는 일단 계속 다니기로, 미래를 계획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30억 넘게 번 은상은 논외로 하고 월급만으로는 꿈꿀 수 없지만 현실을 완전히 바꾸기엔 부족한 정도의 수익을 낸 다해와 지송의 결말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는데, 특히 주말에 일도 하고 에어컨 바람도 쐬고 커피도 마실 겸, 다이어리를 들고 회사로 가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는 다해의 마지막 모습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늘 그렇듯, 소설을 읽으며 공감했던 글귀들을 아래에 옮겨본다.
특히 회사생활과 관련한 묘사들에 마치 활자화된 내 이야기를 읽은 듯 격하게 공감했다.
"기가 막혔다. 3년 11개월 전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냥 "네네" 대답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네네"만 반복하며 살다가는 뜨거운 증기를 머금은 밀폐용기처럼 위험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열기가 비집고 나갈 숨구멍 같은 게 필요하단느 것을, 지난 3년 11개월간의 "네네" 끝에 스스로 깨우쳤다. " - p.14
"일년 중에 하루, 그런 날이 있다. 겉보기엔 평소와 딱히 다를 바가 없는데도 사무실에 흐르는 공기가 미묘하게 뒤틀려 있는 날. 각자의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어쩐지 붕 떠 있는 날.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에 날 선 긴장이 느껴진느 날. 별다른 소란이 있는 게 아닌데도, 오히려 평소보다 조용한데도 모두에게서 내적인 웅성거림이 느껴진느 날. 속이 시끄러운 날." - p.21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채가 아닌 경로로 입사한 소수의 신입들은 알게 모르게 '근본 없는 애'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p.23
"심지어 나는 은상 언니와 지송이를 어릴 때부터 오래 알고 지내던 친구들보다 더 가깝게 느꼈다. 오히려 '원래 친구들'보다 할 이야기도 훨씬 많고 잘 통하는 면이 있었고 가끔 그런 사실을 곱씹어보면서 신기해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럴 만도 했다. 우리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고 있었고 그래서 내게 벌어지는 일들ㅇ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회사 일' 이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웃기는 일도, 화나는 일도, 통쾌한 일도, 기가 막힌 일도. 은상 언니, 지송이와 그런 일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주요인물과 선행 사건들을 공유하고 있어서 배경 설명을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 p.33
"나는 알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다. 그뒤에 내게 찾아올 욕망이 조금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 p.58
"이럴 줄 알았다. 만약 내가 경쾌하게 말하지 않고 기죽어서 대답했으면 이렇게 2절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였다. 그에게는 내가 점심시간을 3분 더 썼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랫사람인 내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자신의 나이와 경력과 그로 인한 권위를 세워주지 않는 것이 못마땅한 거였다." - p.65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다른 대리나 과장들은 팀장이 일을 아무리 못해도, 그야말로 이름만 팀장인 허수아비인 것을 알아도, 뒤에서 매일 욕해도, 적어도 앞에서는 최소한의 기를 세워줬다. 팀장 대접을 해줬다. 싫은 소리는 돌려 했고 이상한 지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다음 알아서 처리했다. 어차피 팀장은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일이 잘 굴러갔다. 그게 5년 차 이상 대리들, 10년 차 이상 과장들의 존경할 만한 기술이었다." -p.66
"은상 언니는 내 친구 중 가장 돈을 밝히는 사람이다. 밝힌다는 표현이 좀...... 그런가? 돈독이 올랐다고 한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 좀 다른 말로 바꿔봐야겠다. 은상 언니는 경제적인 인ㄱ나이다. 이윤욕이 강하다. 다시 말해 이익을 추구한다. 매사에 금전적으로 유리한 선택을 하고 싶어한다...... 뭔가 부족하게 여겨진다. 그래, 어쩌면 이 말이 가장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은상 언니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p.84
"그제야 비로서 알아차렸다. 내가 깊이 바라왔던 게 있다는 것을. J. 이거였다.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 그래서 내가 기다려왔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런 모양, 이런 곡선이었단느 진실을 그 순간 섬광처럼 깨달았다. 나는 매일매일 모래알처럼 작고 약한 걸 그러모아 알알이 쌓아올리고 있었지만 그걸 쌓고 쌓아서 어딘가에 도달하리라는 기대도 희망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냥 그 행위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위안삼으며 그런 동작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태껏 쌓은 건 지나가는 누군가의 콧김 같은 것에도 쉽게 부스러져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구태여 직시하지 않을 뿐 이미 잘 알고 있었다." -p.106
"은상 언니, 지송이, 그리고 나. 우리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암묵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몇년간 깨닫게 된 것 중에 하나는 같은 회사에 다녀도, 비슷한 월급을 받아도, 결코 같은 세계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이에는 투명한 선과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엇다." -p.114
"지긋지긋했다. 아직 대리도 못 단 주제에 이런 말 하는 게 웃긴다는 건 알지만, 벌써 신물이 났다. 보수적인 조직, 멍청한 리더, 짜디짠 박봉, 밀어주고 끌어주는 인맥의 부재, 배움 없이 발전 없이 개인기로 그때그때 업무 쳐내기, 별다른 혁신도 자극도 없이 평생 이 상태로 근근이 유지만 할 것 같은 정체된 업계...... 여기에서는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p.136
"우리, 같은, 애들. 난 은상 언니가 '우리 같은 애들'이라는 세 어절을 말할 때, 이상하게 마음이 쓰리면서도 좋았다. 내 몸에 멍든 곳을 괜히 한번 꾹 눌러볼 때랑 비슷한 마음이었다. 아리지만 묘하게 시원한 마음. 못됐는데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만 못된 마음. 그래서 다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 -p.216
"참 이상했다. 실제로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실제로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은상 언니가 사표를 내긴 했지만 우린 아직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올해 평가에서도 나란히 '무난' 등급을 받았고, 여전히 5평, 6평, 9평 원룸에 살고 있었다. 구내식당 밥을 먹었고, 이따금씩 전주식 콩나물국밥이나 우동이 곁들여 나오는 돈가스 정식, 라면사리가 무제한인 김치찌개 같은 걸 먹었고, 가끔은 조각 케이크를 사 먹거나 핫도그를 성탕에 굴려 먹었다. 그런데 2018년 1월 8일 이후, 우리가 사는 세계가 통째로 달라진 것 같았다. 그건 몇마디로 설명 불가능한, 실로 거대한 변화였다. 우리 세 사람의 얼굴에 빗스하게 고여 있는 정체 모를 윤광만큼이나." -p.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