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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김려령 소설

by Aaaaana

트렁크

김려령 지음, 창비, 2015년 초판 발행, 2024년 10월 25일 개정판 발행


2025년 9월에 읽음


넷플릭스에서 공유와 서현진 주연으로 드라마화된 소설이다. 드라마를 봐볼까 했다가 평이 그닥 좋은것 같지는 않아서 예전에 리디에서 사둔 소설 원작을 읽기 시작했다. 주말에 짬짬이 시간 내서 읽었더니 토,일 이틀만에 다 읽었다. 그만큼 술술 읽혀진다.


인상적이었던 건 주인공 '노인지'라는 인물의 말들이다. 특히 그녀의 마음의 소리.


소설은 주인공 노인지의 시점에서 1인칭으로 서술되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관점, 특히 사랑과 결혼, 계약 결혼 속 배우자 및 친구 등 타인에 대한 평가의 말들은 꽤나 신랄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캐릭터는 꽤 쿨해서 세상과 타인에 무관심해보이기까지 하는데, 그녀가 마음속으로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참 세상과 타인에 관심많고, 정말 많은 critic을 하고, 이새끼 저새끼 욕도 서슴치 않는, 거친 수다쟁이다. 그녀의 겉모습과 내면의 말 사이 간극이 계속 느껴져서 독자 입장에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녀의 행동과 (겉으로 하는) 말은 소설 속 인물인 노인지인데, 그녀의 내면의 말들은 작가 그 자체같달까.


김려령 작가의 [트렁크]는 사랑과 결혼을 ‘계약’이라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인간이 관계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복잡한 존재인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주인공 인지는 결혼정보업체 ‘웨딩라이프’ 산하의 비밀 자회사에서 일하며, 일정 기간 동안 VIP 고객과 ‘계약 결혼’을 맺는 일을 한다. 그녀는 지금까지 네 번의 계약 결혼을 경험했고, 다섯 번째 계약을 앞두고 있다.


그런 그녀 앞에 엄태성이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인지에게 진심을 내비치지만, 인지는 직업적 거리와 감정의 혼란 사이에서 갈등한다. 계약된 사랑과 진짜 감정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인지는 자신이 감춰왔던 감정의 트렁크를 열게 된다. 인지는 계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감정의 안전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 제한된 공간에서 진심이 깨어나는 아이러니를 겪는다. 등장인물 엄태성은 사랑과 집착의 경계를 오가는 복합적인 인물로, 그의 존재가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지하게 한다. 인지는 그를 통해 관계의 온도와 거리,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마주하게 된다.


제목인 "트렁크"는, 인지가 계약결혼을 시작할때마다 들고 다니는 짐으로 표현되지만 사랑의 감정이라는 짐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랑은 늘 가볍게 시작하지만, 언제나 가장 무거운 짐이 된다."


** 인상깊었던 구절을 옮겨본다 **


"처음 내 몸이 감지했던 두려움을 이제 알 것 같다. 자기 자장 속에 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저 막을 뚫지 못한다. 나의 심각한 거절이 그에게 먹히지 않는 이유다. 일인극처럼 자신이 한 말을 자신이 듣고 동의하며 행동한다. 내게 남편이 있는 것도 중요치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단순 관객이므로 그의 연극을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공감능력이 없어 매우 일방적이다. 철저한 자기 질서 속에서 행동하므로 무례라는 것을 모른다. 싸워서 될 일도 아니다. 이 정도면 싸이코다. 웃자고 할 때 쉽게 쓰던 말인데 실체를 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 p.81


"우리는 한 바구니에 담은 닭ㄹ과 오리알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비슷한 듯 다른. 나는 이 간극을 억지로 매우고 싶지 않다." - p.157


"오래전에 어머니는, 병도 자식 스케줄을 피해서 걸려야 한다고, 자식이 바쁠 때 걸리면 그냥 아프지 않은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누가 뭐라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 불편한 게 보여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그날 혜영의 어머니는 정말 많이 아파 보였다. 이승에서의 스케줄이 더는 없는 딸로 인해 맘껏 아픈 것 같았다." - p.161


"적응하기 힘든 것은 살림살이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피의 농도가 다른지 세포의 질이 다른지,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힘들었다. 그저 나와 현상이 흡사한 새로운 종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p.227


" "여보, 나는 왜 저 남자만 보면 화가 날까?", "당연하지. 먼저 일어나서 지송합니다. 시간이 안 되네요, 미안합니다. 죄송한데 나가주세요. 자꾸 사과하게 만들었잖아. 자기가 툭 쳐놓고 사과받는 사람이야. 사과와 거절이 얼마나 무거운 건데. 생큐, 오케이, 하고는 질이 달라. 사람을 푹 꺼지게 해. 진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대가 구질구질하게 사과할 상황을 만들면 안 돼." - p.231


"얼마나 이상한지 거울 좀 보여줬으면.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던 남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가 자주 경계를 넘는다. 전보다는 조금 더 나를 신뢰하는 것 같다. 그러나 너무 깊은 신뢰는 상대를 잡아당겨 한쪽으로 묶는다. 동등한 위치 따위는 없다. 먹거나 먹힐 뿐이다. 둘 중 누구의 아가리가 더 큰지는 자명하다. 줄까요, 말까요. 나는 저 엉성한 신뢰의 떡밥을 덥석 물 생각이 없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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