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지음, 문학동네, 2024년 8월 27일 발행
2025년 9월에 읽음
김애란은 누가 뭐래도 나의 최애 작가다.
아마도 내 또래라면, 왕년에 소설 좀 읽었다면, 김애란이 [달려라 아비]를 들고 문단에 등장하던 그즈음을 생생히 기억할 테다.
비슷한 취향과 감성을 공유하던 언니와 [달려라 아비]에 담긴 단편 하나하나의 장점만을 늘어놓으며 밤새 떠들 수 있었을 만큼, 그 시절의 나에게 김애란의 글은 충격적으로 좋았다.
위트와 감성이 느껴지는 짧고 경쾌한 문장들로 우리의 시대를 담아 온 김애란의 소설들을 이후로도 내내 즐겨 읽고 아껴 읽어왔다.
하지만 해외 살이를 시작한 이후 한글로 된 책을 접하기 어려워지기도 했고 글보다는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멍하니 보는 걸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김애란의 최신작들에서 멀어져 왔는데, 모처럼 이번 여름 한국에 다녀올 때 최신작 [안녕이라 그랬어]를 비롯해 작년에 발표된 [이중 하나는 거짓말], 그 외 오래된 그녀의 다른 소설들까지 종이책으로 잔뜩 구해왔다.
[안녕이라 그랬어],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에 대해서도 따로 정리해 볼 생각이지만,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으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는 순간이 즐겁다.'
그녀의 문장들이 고스란히 전해주는 사소한 삶의 발견들이 책을 읽는 순간순간을 귀하게 만든다.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그것을 담아낸 형식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 안에 웅크려있던 무언가를 그녀의 문장들이 표현해주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소설은 같은 고교, 같은 반에 재학 중인 지우, 소리, 채운이라는 세 인물 각각의 이야기와 세 인물이 교차하는 지점의 이야기가 얽혀있다.
그 반의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의 자기소개 시간에 조금 특별한 방식의 자기소개를 하도록 한다. 다섯 문장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되, 그중 네 개는 진실, 나머지 하나는 거짓을 포함하도록.
작년까지 축구를 하다 발을 다쳐 더 이상 축구를 못하게 된 채운이 지우와 소리의 반에 전학을 오고 채운의 ‘거짓 하나를 포함한 다섯 문장 자기소개'의 순간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지우는 ‘용식'이라는 도마뱀을 키우며 인터넷 그림카페에 만화를 연재하는 소년으로,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와 살고 있다. 아빠와 이혼하고 홀로 악착같이 지우를 키워내던 지우의 엄마 지연은 조금은 유약하고 그래도 강단 있는 화물차 운전사 선호와 살림을 합친 후 동네 돼지갈비 집에서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일하며 지우를 키워내지만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엄마의 죽음이 정말 사고사였는지 의심을 품은 지우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선호와 둘이 살기보다 독립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키우던 도마뱀 ‘용식'을 잠시 소리에게 맡기고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방학 동안 다른 도시에서 일용직으로 일한다.
소리는 몇 년 전 엄마를 잃고 아빠와 살아가는 소녀. 교실에서는 조용하고 조금 이상한 아이로 여겨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지만, 입시미술을 하며 그림을 놓지 않고 있다. 소리에게는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어떤 대상과 손을 잡으면 그 대상의 죽음을 감지할 수 있는 것 - 곧 죽을 대상이라면 손을 잡았을 때 그 대상이 갑자기 뿌옇고 흐리게 보인다 -. 이 능력으로 예전 담임 선생님, 채운이 키우던 개 뭉치와 채운의 아버지의 죽음을 감지한다. 그러나 정작 제 엄마의 죽음은 내다보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갖고 있는 아이. 지우가 맡긴 도마뱀 ‘용식'을 돌보면서 용식의 그림을 그려 지우에게 선물할 생각을 하며 조금씩 활기를 띤다.
채운은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했으나 작년에 발을 다쳐 더 이상 축구를 못하게 되어 지우와 소리네 학교로 전학 온다. 지우와는 같은 빌라에 살고 있지만 얼굴만 아는 정도. 언젠가부터 시작된 아빠의 가정 폭력으로 어느 밤 그 사건이 일어나고, 엄마는 감옥에 아빠는 병원에 있게 되면서 이모네 집에 '뭉치와 함께 얹혀살고 있다. 영어를 공부해 외국 어딘가로 떠나 새롭게 삶을 시작하고 싶지만 그것마저 막연하고, 그 밤의 사건으로, 본인 대신 감옥에 들어간 엄마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방황한다.
이야기는 세 인물이 겪는 각각의 사건, 특히 부모와 얽힌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가며, 세상이 말하는 ‘평범한 스토리’가 있는 삶을 살아내기조차 어려운 그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낸다. 동시에 세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며 만들어 내는 접점들이 그들의 삶에 작은 동력이 되어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삶이, 이야기가 계속되게 한다.
각자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의 결말을 모르기에 우리는 지금 평온할 수 없다. 종국엔 그 이야기가 대단한 발견과 성장의 스토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뚜벅뚜벅 그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고 그래도 된다고, 작가는 이야기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밑줄 긋게 만든 문장들을 기록해 본다.
“지우에게 책을 읽어주던 어른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다정했다. 그건 이미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 이들의 평온함,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얼마나 남폭하든 또는 얼마나 위험하든 주인공도 또 자신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것임을 아는 이들의 온화함이었다. 죽음을 자꾸 경험하고, 죽음을 반복할 때마다 번번이 살아 돌아온 이의 자신감 혹은 너그러움” - p.9
“- 그럼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중략)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요. 끝내 살아남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 누구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야기요. 상상 속 어른은 잠시 침묵하다 ‘그런 일이 생길 순 있어도 그런 이야기는 남기는 어렵다'고 했다. ‘뭔가 겪은 사람만 있고 그걸 전할 사람이 없다면, 다른 이들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겠냐'면서. (중략) - 그러니 적어도 한 사람은 남겨두어야 해, 한 사람은. 그 말에 지우는 왠지 반발심이 들어, ‘생존’에 비위가 상해 뭐라 대꾸하려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에 다시 귀 기울였다.” - p.10
“소리는 가끔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꿈과 깨끗이 작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그저 다음 단계로 간 것뿐'이라며, ‘작별한 건 맞지만 깨끗이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의 어른이 그렇게 사는데 그건 꼭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라면서.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요즘에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재능은 있되 그게 압도적인 재능은 아님을 깨달아서였다. 사실 그걸 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당장 학원 친구들의 그림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소리는 궁금했다. 무언가를 시작하고 계속하는 데 필요한 재능은 얼마만큼인지. 그 힘은 언제까지 필요하고 어떻게 이어지는지.” - p.130
“어쩌면 누군가 그걸 원해서, 산산조각난 유릿조각 앞에서 자신이 통곡하는 모습을 그토록 생생히 그릴 정도로 바라서. 간절히 꿈귀서, 자기가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중략) -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리 없는 저열함 같은게.” - p.140
“채운은 저때가 자기 삶에서 최고의 날까지는 아니어도 꽤 좋은 날'이었음을 인정했다. 작은 몸에서 기쁨과 신뢰의 분수가 터져나오던 때. 저 아래서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마음놓고 내려와도 된다'며 고개를 끄덕여주어 그 사람에게 정말 마음껏 안겼던 그날이.” - p.162
“재작년 축구 훈련중 채운은 일부러 부상을 유도했다. 그러고 담당의로부터 더이상 운동선수로 살기 어려울 거란 진단을 받은 뒤 남몰래 안도했다. ‘적어도 내가 그만둔 게 아니니까. 내가 의지가 약해서, 실력이 안 돼서 못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겉으로는 모든 걸 잃은 양 어두운 표정을 짓고 다녔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좀더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 삶에는 또 얼마나 많은 기만이 있을까’ “
“그런데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 채운아. 나도 그럴게. 그게 지금 내 간절한 소망이야.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 채운아. 한 번은 네가, 또 한번은 내가 서로를 번갈아 구해준 것뿐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 - p.182
“여름이면 수박 끝을 자신에게 겨누며 장난을 걸고, 가게 일이 힘든 와중에도 자신을 자주 웃겨주던 아내였다. 그러다 종내에는 자신만의 매력과 미덕을 잃고 오직 ‘덜 아픈 상태'만을 바라며 갖고을 괴롭히고 지치게 했던 여자.” - p.193
“사실 이전에도 지우는 종종 반 친구들의 SNS 계정을 보며 자신이 아무리 이야기를 지어낸들 ‘진짜 삶'을 사는 이들은 따로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건 생활이 윤택한 집 아이들, 말 그대로 영화나 만화 주인공들에게나 주어지는 삶 같다고. 떠나고, 모험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인물들에게. 세상의 주인공들에게. 지우는 그렇게 ‘자기 선'을 가진 아이들이 내심 부러웠다. (중략) 자신은 지상에 박힌 압정처럼 하나의 점으로 가까스로 존재하는데, ‘서사 그래프'에 나오는 그 약동하는 선을 가진 이들이 부러웠다.” - p.215 - p.216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더.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