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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Dec 08. 2022

네? 보결전담교사가 뭐에요?

알려드리죠. 

 고상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교원의 3일 이상 1개월 미만의 연가, 병가, 공가, 특별휴가, 출장에 의한 보결 수업을 지원합니다.]


 교사가 부득이하게 수업을 못할 경우 대신 들어가 수업을 하고 학생들의 학습공백을 메꾸는 일이다. 한마디로 계약직 땜빵 교사이다. 코로나를 예언하듯 우리 지역에는 이러한 보결전담교사를 코로나 유행 전부터 이미 시행하고 있었다. 운 좋게 2학기 때 그만둔 선생님을 대신하여 8:1이라는 계약직 치고는 꽤 높은 경쟁률로. 그것도 학교와 집과의 거리가 먼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초임 같은 눈빛으로 세상 밖을 향해 날갯짓을 하려는 아줌마의 열정이 교감선생님의 마음에 들었나보다. 나는 면접에 통과하자마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 너무 기뻐. 글쎄 7명이나 제치고 내가 이 학군 좋은 학교 보결 교사가 됐다니까. 일 년 계약도 처음이고 그동안은 월급도 따박따박 나오고 명절 상여금, 성과급, 퇴직금까지. 내 교사자격증이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응? 축하해. 근데 보결 교사가 대체 뭐야?"


 루틴은 이렇다. 보결 교사 전용 탭에서 나의 스케줄을 확인한 다음 해당 학교 교무실로 전화해 담당 선생님과의 연결을 부탁드리고 수업내용과 유의사항을 간단히 전달받는다. 다음날 아침 긴장된 마음으로 기상해 내비게이션에 도착지를 찍는다. 도착지가 어디든 고속도로, 터널 산아래 마다하지 않는다. 출근시간 훨씬 전에 도착해 빈 교실의 분위기와 시간표를 확인, 수업내용을 한번 더 점검한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하고 의문의 눈빛으로 바라보면 '담임선생님은 출장 가셨단다. 그동안 선생님이랑 공부하면서 함께 지낼 거야'라고 녹음기처럼 재생한다. 담임 선생님의 부재로 인해 아이들은 호시탐탐 갈등과 일탈의 기회를 노리므로 하루면 하루 정해진 기간만큼 수업 대체자로서 텐션을 유지해야 한다. 마지막 날에는 첫날 같은 원상복귀. 내가 있는 동안 큰 변화를 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복귀하실 선생님을 위해 그동안의 일과 흔적은 확실히 기록한다.

 

 어느 도시의 외곽 2학년 교실이었다. H는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 같았다.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찢고 색칠이라도 하려면 온통 검은색으로 낙서를 했다. 혼이라도 낼라 하면 선생님, 잘못했어요를 영혼 없이 남발하며 나를 가지고 노는 듯했다. 나의 레이더망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어디로 튈지 몰랐다. 타이르는 말투, 단호한 지시, 협박. 이 모두는 30초 안에 물거품이 되었다. 급기야 나도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며칠만 더 버티면 되는데.. 내 안의 악마와 마주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물론 손을 대거나 한 것은 아니다. 교사라는 권위로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하교 후 월급통장에 돈이 꽂힌 걸 확인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나는 정신의 노동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노동자였지'. 이것 또한 견뎌내야 하는 일인 것을. 마지막 날 그 아이에게 약속했던 토끼 스티커를 담임선생님께 전해주며 나는 나의 임무를 다했다며 죄책감 또한 덜어냈다. 나중에 그 아이가 다른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학폭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아이의 홀 엄마는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할머니의 보살핌을 겨우 받고 있었다. 그 아이와도 전쟁도 그렇게 끝은 있었다. 



  이번엔 1학년 교실. 코로나와 담임교사의 오랜 부재로 흐트러진 교실이었다. S는 작은 체구지만 신사답고 꽤나 총기 있는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맨 앞자리에서 바른 수업태도와 활동을 주어지면 집중력이 상당히 뛰어난 아이 었다. 잠잠하던 일과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이는 실내화 한 짝을 잃어버리고는 흔들리고 말았다. 나는 차분하게 한 번 더 찾아보고 없으면 마치고 같이 찾아보자라고 말했다. 수업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는 하교 후 돌변했다. 아무리 찾아도 실내화는 없었다. 그 화살이 나에게로 왔다. 

“선생님이 가져갔죠? 선생님이 범인이죠?” 무슨 개떡 같은 소리인가. 이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며칠 후, S는 지난 시간에 했던 활동카드를 분실했다. 나는 숨죽여 긴장했다. 급기야 교실을 뛰쳐나가고 만 것이다. 그리고는 내가 또 훔쳐간 것 아니냐며 나를 또 범인으로 몰았다.     


“선생님이 가져갔죠? 선생님, 죽여버릴 거예요” 

그러고는 신발을 잽싸게 챙겨서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나는 미꾸라지처럼 도망가는 아이를 쩔쩔매듯이 따라갔다. 이 아이를 놓치면 안 되었다. 저학년은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건데. 이아이가 뛰쳐나가 혹여나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책임을 묻게 될 것인가.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아이를 잡아끌고 가고 싶었지만 그때 나는 그 상황을 초월했나 보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이에게 "그래. 00 하고 싶은 대로 해, 선생님은 여기서 기다릴게." 하고 놓아주었다.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나에게 와주었다. 이 아이가 원한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밀당을 하고 나서야 아이는 내편이 되어주었다. 아기처럼 다가와 안기며 사랑한다고도 말해주었으니 말이다. 나도 엄마처럼 그 아이를 품어주었다. 그렇게 또 담임 선생님이 돌아오시고 나는 사라졌다.  

 



  코로나가 심해질수록 나의 보결수업 일정도 요동쳤다. 하루 단위 아니 시간 단위로 투입되었다. 마치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되는 부품 같았다. 담임교사에서 영어교사가 되었다가 체육교사로 둔갑했다. 하루 만에 과학교사가 되었다 담임교사가 되기도 했다. 나에게 리허설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면 곧장 아무개반 아무개 수업을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수업을 대충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즉흥적인 무대가 창의성과 노련함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드디어 내 적성을 찾은 듯했다. 


 하지만 점점 이 자리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몇 해를 통틀어 자그마치 수천 명의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다정하게 이름 외우며 불러주던 아이들은 아무개들이 되어갔고 열정을 다하기보다  내가 있는 동안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생활지도를 하고 있었다.  나를 웃고 울게 하는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은 길어봤자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게 원래 이 자리의 충실한 임무였는지도 모른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교실 내에서 접근 명령이 내려진 두 아이들을 반나절 내내 감시 아닌 감시를 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긴 했지만. 퇴근하고 돌아와 한숨 청하려 했을 때. 갑자기 숨 쉬는 것이 버거웠다. 믿기지 않아 정수기 물을 한잔 들이켰다. 그러고는 나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듯 숨쉬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으니 귀에서 삑사리가 들려왔다. 이게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 뒤로는 내 기억은 작동하지 않는다. 


버티면 버틸수록 강해진다 믿었다.

나는 괜찮은 걸까?

처음으로 이 일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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