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더 바쁜 날이다. 중이염에 걸린 아이를 병원 문 닫기 전에 데리고 가야 한다. 똑딱 애플리케이션에서 연신 알림이 울린다. 알았다고! 가고 있다고! 등줄기에 땀이 난다.
부모의 급한 마음과는 별개로, 아들의 입이 대빨(?) 나와 있다. 태권도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신나게 피구를 하며 놀던 녀석을 다짜고짜 나오라고 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야 인마, 엄빠는 더 힘들다고. 설상가상으로 의사 선생님은 며칠 더 경과를 지켜보잔다. 또 약을 챙겨 먹여야 한다는 사실에 뒷골이 땅긴다.
각자의 이유로 모두가 우울한 저녁이 시작되었다. 차에서도, 주차장에서도 아무 말이 없다. 저녁 뭐 먹을까 물어봐도 뾰로통한 표정뿐이다. 대뜸 화가 났다. 결국 입에서 서운한 말이 튀어나왔다.
"먹기 싫으면 아무것도 먹지 마!" (삐돌이 작렬…)
지하주차장 계단을 지나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득 공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지잉, 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코를 찌르는 구수한 냄새… 아니, 이것은…….
치킨이다.
그것도 방금 막 튀긴 후라이드의 진한 향기가 1층 공용 공간을 채우고 있다. 바로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삐돌이 3인방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1초에 백만 번을 깜빡거리며 울기 직전이었던 녀석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아이 컨택을 하자마자 입에서 '풉~!'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쳤다.
"우리도 치킨 먹자!!!!"
"앗싸~ 파리피플(party people)~~!"
"맨날 파리피플이래. 너네가 프랑스 사람이냐?"
"아빠, 재미없거든?"
"어이구, 이 삐돌이들. 내가 치킨 사줄 테니 기분들 푸세요. 네?"
"안 삐졌거든!!!"
치킨에게 이토록 고마웠던 날이 있었던가. 그래서 사람들이 치킨을 치느님이라고 부르나 보다. 아재력을 듬뿍 담아 외친다. 결론은 버킹검, 아니 치킨이라고.
손은 눈보다 빠르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열어 '쿠x배달식당'을 열고 녀석이 좋아하는 '60마리의 닭 가게'에서 '하하하 웃는 치킨'을 주문했다. 승강기 안쪽도 치킨 냄새로 가득했지만, 이제는 부럽지 않다. 나도 치킨을 시켰으니까. 너만 먹을 줄 알았지? 나도 먹을 거라고!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 30분 정도 지났나 보다.
'띵동~ 띵동~ 띵 댕대리도래리~'
(미도~ 미도~ 미 솔솔미도미레~)
드디어 왔다. 치킨!
인터폰 화면을 보니 바로 문 앞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수화기를 들었다가 제자리에 놓았는데 초인종 소리가 계속 울린다. 뭐지? 고장 났나? 일단 치킨부터 찾아 오자는 생각에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눈앞에 치킨 봉지가 보이길래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맞은편 X01호의 문이 휙 열리더니 (나와 똑 닮은) 시커먼 옷을 입은 남자가 뛰어나왔다.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앞집 아재의 등장보다 더 쇼킹했던 것은, 그 역시 문 앞에 놓인 치킨 봉지를 주섬주섬 집어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치킨 냄새에 이끌려 네펜데스(벌레잡이통풀)로 날아온...
배달의 민족이었던 것이다...
"앗, 안녕하세요."
"어이쿠, 안녕하세요."
"치킨 시키셨어요? ㅋㅋ"
"아 네... ㅋㅋㅋㅋ"
"맛있게 드세요 ㅎㅎㅎ"
"네네. 맛있게 드세요."
어색한 인사와 함께 들어가는 앞집 아재. 그의 손에 들린 치킨 봉지가 우리 것과 똑같다. 아하! 저 집도 '60마리의 닭 가게'에서 샀구나. 그래서 배달이 같이 왔구나. 안 꺼진 초인종은 저 집 소리였구나. 앞집도 '하하하 웃는 치킨을 샀을까?'
그야말로 하하하, 치킨으로 대동단결이다.
산책 나간 아내를 버리고(?) 아들 녀석과 오붓하게 치킨을 뜯는다. 매콤 달짝지근하니 맛있다. 맥주 대신 식혜를 후루룩 들이마신다.
문득 상념에 빠진다.
우리보다 먼저 치킨을 시킨 이웃 덕분에 1층과 엘리베이터에 고소한 치킨향이 퍼졌고, 그것이 다른 주민의 치킨욕(chicken-欲)을 자극했다. 결과적으로 최소 두 집이 치킨을 먹게 되었다…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
근데 이거 치킨만 그런 게 아니잖아?
삶의 많은 부분에도 비슷하게 적용되지 않을까?
먼저 치킨을 시킨 사람이 있다. 먼저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치킨 냄새를 풍긴다. 고소하다고.
가본 사람은 말한다. 이 길이 좋다고.
새로운 사람이 치킨을 주문한다. 새로운 사람이 그 길을 따라간다.
그도 말할 것이다. 먹길 잘했다고. 그도 말할 것이다. 오길 잘했다고.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많은 책과 강연, 사람을 통해 글쓰기를 알게 되었고, 6년이라는 시간을 꾸준히 써 오며, 이제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나보다 앞서 걸어가며 치킨을 주문해 준, 스승과도 같은 분들 덕분이다.
눈에도 보일 것 같은 치킨 냄새가 공용 공간에 배어 있듯, 먼저 글쓰기를 시작한 자는 그것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직접 먹어보지 않으면 치킨의 진정한 맛을 알 수 없다. 글도 그렇다. 써 봐야 안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을.
글을 쓰면 삶이 변한다는 믿기 힘든 말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치킨을 시킨다. 60마리까지는 안 되겠지만, 내가 주문한 치킨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코를 자극하는 트리거가 되기를 바란다. 꾸준히 쓰고, 쓰기의 좋은 점을 계속해서 전파하고, 쓰려는 사람이 실제로 글을 쓸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