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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Oct 15. 2023

제36화 젖은 숲의 명령

포르토마린(Portomarin)~팔라스 데 레이

#철이의_산티아고_순례길

 - 1차 순례: 2022.7.25~8.14, 493km, Saint-Jean~Léon

 - 2차 순례: 2023.10.3.~10.25, 329.5km, Léon~Santiago de Compostela)

#걷기 10일 차(30일 차)

#포르토마린(Portomarin)~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26.86km / 7시간 29분

- 누적 : km / 799km

#숙소 : Albergue Zendoira 2인실 45유로

- 샤워실은 별도, 싱글 침대 2개, 시설이 좋고 슈퍼마켓이 가까이 있음. 1인실은 벙크 형태


젖은 숲의 명령

늦잠을 자고 좀 늦은 출발, 8:30

알베르게를 나와 성요한 성당이 있는 광장 앞으로 간다. 벌써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다. 미국인 단체 순례자들도 있고, 동남아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어제 출발한 사리아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실감한다.

성당에서 아래로 길을 따라 쭉 내려간다. 포르토마린에서 나가는 길은 들어올 때 건넌 다리가 아닌 좀 더 서쪽에 있는 작은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서 우측으로 돌아 작은 길로 접어든다. 여기서 곤사르(Gonzar)까지는 8km가 조금 넘는다. 곤사르까지는 중간에 카페가 없기 때문에 포르토마린을 빠져나가기 전에 아침식사를 해결하던지 아니면 두 시간 이상을 걸어간 다음에야 가능하다.


길을 돌아서면 바로 숲길이다. 비에 젖은 숲에서 눅눅한 습기와 함떼 낮게 내려앉은 숲의 향기가 밀려온다. 아침의 찬 공기 속에 깊이 배어 있는 숲의 짙은 냄새는 몸속으로 파고들며 긴 행군을 할 채비를 하라고 내 몸의 신경을 자극한다. 신경의 명령에 따라 팔과 다리의 근육이 곤두선다. 허리도 반짝 긴장한다. 배낭을 다시 추켜 세우며 발과 무릎에 힘을 주어 땅을 힘차게 밟아 앞으로 나아간다.


배낭의 무게에 대한 쓸데없는 생각

순례를 먼저 다녀온 사람들에 의하면 배낭의 무게는 자기 몸무게의 10% 정도가 적당하다고 한다. 배낭에 7~8kg 정도까지 들어갈 것이 뭐가 있나 싶겠지만 짐을 싸다 보면 그 정도 무게는 금방 넘어가기 일쑤다. 순례를 시작하면 물과 간식도 준비해야 하니 무게가 더 나간다. 평소에 그 정도의 무게를 지고 트레킹이나 산행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순례길에서 배낭은 꼭 필요한 존재이면서 또한 큰 부담이다.


배낭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속옷, 양말, 등산복 여벌, 가벼운 일상복 겸 잠옷 한 벌, 슬리퍼, 손수건, 장갑, 플래시, 보조배터리, 침낭과 판초우의, 세면도구와 로션, 비상약, 글을 쓸 자판기와 수첩. 걷다가 힘들어지면 무엇 하나라도 덜어내고 싶지만 막상 버릴 게 없다. 물통에 물을 채우고, 사과 한 알과 빵 한쪽을 더 채워 넣는다. 배낭의 무게는 결국 내가 가진 욕심의 무게만큼 늘어날 뿐이다.

다행히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무거운 배낭의 무게도 몸이 받아들이게 된다. 무게감을 덜 느끼게 되는 시점이 오고, 그런 시간이 지나면 거의 무게감을 느끼지 못하는 무아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몸은 너무 힘이 들면 이겨내려 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편을 택한다. 엄청난 삶의 고통과 괴로움이 짓눌러 오면 벗어나려 애써다가 어느덧 받아들이고 견디며 사는 우리 삶처럼.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 무거운 짐도 어쩌면 지고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자기 합리화면 어떻고 어리석은 숙명론이면 또 어떤가.


일주일 동안 순례하는 고등학생들

너무 힘이 들면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기 마련이다. 저만치 카페가 보인다. 8.6km를 걸어와서 처음 만나는 카페(Hosteria de Gonzar)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바깥 빈 테이블은 찾기가 힘들다. 안쪽에도 테이블이 많아 들어가 앉는다. 주문하는 줄이 길어 20분 정도 기다려야 할 정도다. 커피, 오렌지 주스, 빵이 다 맛있다.  

11km~12km 오르막 길을 올라 고개를 넘어 다시 도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고등학생들 백여 명이 단체로 순례에 나섰다. 오늘(10.14)이 토요일인데 체험학습을 나왔을까 의아해했는데, 점심 먹고 있는 애들을 다시 만나 얘기를 나눴다. 카톨릭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고 하루만 체험학습을 나온 게 아니라 일주일 동안 걸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간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에는 자전거로 순례하는 학생들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을 데리고 일주일 동안 걷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은 잠시 손에서 책을 놓고 온전히 몸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교가 아이들을 위해 그런 계획을 세우고 추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오후에 도착한 알베르게에 이 학생들 중 50명이 들어왔다. 알베르게가 떠들썩하다.


저녁은 백숙

13km 지나 벤타스 데 나론(Ventas de Naron)의 숲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라메이로스다. 라메이로스와 다음 마을인 리곤데 사이에 17세기 라메이로스 십자가가 있다. 흔히 보이는 십자가 상인데 사람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는다. 나중에 찾아보니 십자가상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서려 있다.


오늘 순례길 중간에 만나는 마을 대부분에 카페가 있어 쉬엄쉬엄 쉬어가기 좋다. 한 시간 정도 걷다가 조금 쉬어가고 또 걷다가 쉬어가며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다. 리곤데(Ligonde) 마을에서는 치즈를 하나 샀다. 어느 주택의 창문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치즈를 사라고 부른다. 두부만 한 크기의 리코타 치즈 하나에 3유로다. 맛을 보니 담백한 맛이다. 야채샐러드를 해 먹으면 맛나겠다.

알베르게 가까운 곳에 큰 슈퍼마켓(Dia Supermarkedo)이 있다. 일단 알베르게에 들어오고 나면 다시 나가는 게 쉽지가 않다. 다리가 아프고 몸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에서 닭다리 두 개, 양파를 사고 남은 쌀을 넣어 백숙을 해 먹었다. 포도주 한 잔을 곁들이니 이런 성찬이 따로 없다.



#산티아고_길_위에_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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