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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생각 53_국경

by 배정철 Mar 15. 2025

싱가포르 일정을 마치고 말레이시아로 넘어간다.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로 올라가기 전, 오랜 역사의 도시 말라카(Melaka)에서 이틀간 머문다. 시내 몇 군데의 버스 터미널 중, 벤쿨렌에서 가까운 퀸즈 스트리트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말라카까지 4시간이 걸린다. 퀸즈 버스터미널은 싱가포르라는 선진국에 어울리지 않게 시골 버스정류장 모습이다. 건물이라고는 작은 매표소와 화장실이 붙은 단층 건물 하나다. 매표소 직원에게 미리 예약한 내용을 보여주자 버스 번호판과 좌석 번호를 볼펜으로  작은 쪽지를 준다. 요즘 시골에서도 하지 않는 오리지널 아날로그다. 종이에 적힌 버스 번호판을 확인하고 버스에 탔다. 우리의 우등버스처럼 넓고 편안하다. 버스는 출발 시간이 되었는데도 출발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다 늦게 온 손님까지 다 태우고 출발한다. 버스 기사는 국경에 도착할 때까지 쉴 새 없이 전화로 얘기 중이다. 


시내에서 말레이시아 국경인 조호르바루(Johor Bahru)까지는 30km, 4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잇는 두 번째 다리(Second Link Bridge)를 건너면 말레이시아다. 두 나라를 잇는 다른 교량은 싱가포르 북쪽 한가운데 우드랜드 지역에 있는 조호르 코즈웨이(Johor-Singapore Causeway)다. 다리를 건너자 버스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여권 심사대를 통과하고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오른다. 잠시 달리다 다시 하차, 이번에는 짐까지 들고서 검색대를 통과한 후, 버스를 타면 국경을 넘어선 것이다. 국경을 넘어가는 것이 버스에서 두 번을 내리는 것은 번거롭기는 해도 고속도로 휴게소에 잠시 쉬었다 가는 느낌 정도다. 두 나라 사이를 오가는 사람이 많고 별다른 사건이 없어서인지 검색하는 사람도 설렁설렁 형식적이다. 


그나마 여긴 여권과 수하물 검사라도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갈 때나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갈 때는 국경이 있는 줄도 모른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길 출발지인 프랑스 생장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땅 론세스바예스로 넘어갈 때 그 어디에도 검문소가 없다. 지난해 가을,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 하나인 포르투갈 해안길을 걸을 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 카민야(Caminha)에서 미뉴강을 넘어갈 때는 5유로 요금을 내고 작은 보트택시를 타고 건넜다. 강의 이쪽과 저쪽 어디에도 국경임을 표시하거나 검문을 위해 눈을 부라리는 군인이나 경찰을 볼 수 없다. 작은 보트에 조심스럽게 앉아 안개 자욱한 강을 건너며 영화에서 본 밀항의 두근거림을 느낀 건 아마도 나 혼자였을 테다.  

이 보다는 훨씬 오래전, 이집트 카이로에서 파견 근무를 할 때다. 2004년 여름 동유럽 여행을 갔는데, 체코 프라하 공항에 예약한 차량은 다행히 여권만으로 렌트할 수 있었지만, 국제운전면허증 없이 남의 나라에서 운전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지인에게 부탁해 카이로 집에 두고 온 국제운전면허증을 다음 목적지인 헝가리 부다페스트 호텔로 보내달라고 하고서 조마조마하며 체코로 이동할 때다. 갑자기 나타난 톨게이트, 통행료를 내는 곳인가 했는데 여권을 보여달란다. 열린 창문으로 차량에 탄 사람 쓱 한 번 확인하고는 통과. 지나고 나서야 그곳이 국경 검문소라는 걸 알았다. 무면허 문제가 생길까 봐 엄청 마음을 졸였는데, 괜스레 걱정했구나 싶어 허무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합에서의 분리를 원치 않았다고 한다.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에 가면, 리콴유 초대 총리가 인터뷰를 하며 울먹이는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후, 말레이시아와 한 국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당시의 정치, 경제, 그리고 민족 문제로 결국 한 몸이 되지 못하고 갈라져 나와 작은 섬나라 싱가포르로 남게 되었을 때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인터뷰 도중 슬픔을 억누르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그때의 아픔이 지금의 국경선이 되었지만, 현재 두 나라 사이의 벽은 리관유의 눈물만큼이나 아파 보이지는 않는다.  


해외여행을 다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국경’을 몸으로 느끼는 것은 38선, 휴전선, 철책선, 판문점이라는 물리적 국경선이 너무도 선명한 내 나라의 현실 때문이다. 내 나라의 국경은 버스나 자동차로 오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먼 땅, 다른 나라에서 더욱 절감하기 때문이다. 

말라카에 도착해 늦은 점심으로 호텔 옆 쇼핑몰에 있는 한국분식점에서 라볶이와 양념 치킨을 먹고, 저녁 식사는 호텔 건너 한국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손님 없는 분식점의 현지 직원들은 한국 노래에 맞춰 아이돌 춤연습에 열심이고, 한국식당 종업원은 다들 한국말을 곧잘 한다. 삼겹살, 김치찌개와 소주를 즐기는 현지인과 외국인들의 모습이 낯선 풍경이 아닌 지 오래다. 음식, 언어, 노래와 춤에는 국경이 없다. 말레이시아의 작은 도시 말라카에는 여러 나라의 국경을 거침없이 넘어와 뿌리를 내리는 내 나라의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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