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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와 규슈올레

규슈올레 1차 트레킹(5박 6일)

by 배정철

<책의 이끌림, 북랩, 2019>에도 썼지만 하나의 책은 무수한 가지를 뻗어 다른 책으로 이끈다. 지식, 새로운 정보, 앎에 대한 기쁨을 이끌어 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곳에 대한 동경 즉 여행을 이끌기도 한다. <죽기 전에 꼭 걸어야 할 세계 10대 트레일, 이영철, 꿈의지도>은 그런 책이다. 선정 기준이 딱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세계 10대' 트레킹 코스, 그것도 죽기 전에 꼭 걸어야 한다는 책 제목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열 군데 모두 가 보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 하더라도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가 뽑은 10대 트레일은 1. 안나푸르나 서킷 2. 산티아고 순례길 3. 밀포드 트랙 4. 규슈 올레 5. 영국횡단 CTC 6. 파타고니아 트레일 7. 잉카 트레일 8. 몽블랑 둘레길 9. 위클로 웨이 10. 차마고도 호도협 등이다.


이 중에 '산티아고 순례길'은 세 번 다녀왔고, '몽블랑 둘레길'은 오는 7월에 떠날 계획이다. 규슈 올레는 한국에서 가까운 곳이라 연휴나 주말에도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규슈 올레, 손민호, 중앙books>에는 모두 15개 코스 정보가 있고, 규슈 올레 홈페이지(https://kyushuolle.welcomekyushu.jp/ko/)에는 모두 18개가 소개되어 있다. 그중에 <가라쓰 코스>는 2017년에 폐쇄되어, 2025년 현재는 모두 17개 코스다.

규슈는 일본의 큰 섬 4개 중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 비행시간이 제주도 가는 것만큼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규슈는 후쿠오카, 사가,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이타, 미야자키, 가고시마 등 7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국의 대표적인 트레일인 제주올레를 벤치마킹하여 2012년 2월 4개 코스를 시작으로 코스를 점점 늘려가고 있다. 자매길이라 새로운 규슈 올레를 심사할 때 제주올레 관계자들이 참석해서 심사한다고 한다. 이름도 '올레'를 쓰고, 제주올레의 상징인 간세(조랑말)와 리본을 길 안내 표식으로 사용한다. 안내판에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도 안내가 잘 되어 있다. 심지어 코스 중간 중간에 맷돼지 조심, 긴급 상황시 연락처 등도 한글로 안내되어 있어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규슈올레를 걸으면 이곳이 제주인지 규슈인지 알 수 없고, 한국의 어느 산길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제주올레 재단을 설립한 서명숙씨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영감을 얻어 재단을 설립하고 제주올레를 만들었고, 제주올레를 따라 규슈올레를 만들었으니,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올레, 규슈올레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규슈올레는 제주올레를 모델로 만들어 제주올레의 모습을 닮았지만 다른 점도 몇 가지 있다. 안내 리본색으로 제주울레는 파랑(정방향)/빨강(역방향), 규슈올레는 파랑)/다홍을 쓴다. 제일 큰 차이는 올레 코스 간의 연결성이다. 제주올레는 몇 개의 섬 코스를 제외하고는 1코스 출발지 시흥에서 21코스 종점인 종달바위까지가 끊어짐 없이 이어져 있는 반면, 규슈올레는 코스별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독립적이다. 코스가 이어져 있는 제주올레는 걷다가 쉬는 지점에서 다음날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규슈 올레는 코스가 뚝뚝 떨어져 있어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코스 간 거리가 제일 가까운 다케오 코스와 우레시노 코스는 20km 정도 거리에 있어 자동차로는 30분, 버스로는 1시간 정도 걸린다. 코스가 이어져 있는 제주올레는 1코스, 2코스, 3코스 등 숫자로 코스를 구분하고, 규슈올레는 다케오 코스, 야메코스, 구루메·고라산 코스 등 지역 이름으로 구분하는 것도 두 올레의 차이점이다. 제주올레는 출발지로 되돌아오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어서 백패커 트레킹을 하기에 좋지만, 규슈올레는 한 지점에서 숙박하며 매일 왔다 갔다 하거나 하나의 코스를 트레킹 한 뒤에 다음 코스로 이동해서 숙박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래서 여러 날 트레킹을 하려면 이동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제주시와 서귀포에 제주올레 여행자 센터에서는 숙식도 되고 트레킹 여행자 간의 정보 교환도 가능하다. 반면에 규슈올레는 올레가 있는 행정구역이 각각 다르고, 코스도 이어지지 않는 형태라 여행자 센터를 운영하기도 쉽지는 않겠다. 실제로 5개 코스를 걷는 동안 올레 안내소, 올레 관계자, 올레지킴이 자원봉사자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아름다운 경치와 일본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규슈올레 코스의 장점을 살려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아쉬웠다. 올레 관계자뿐만 아니라 트레킹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계절인 5월임에도 불구하고 트레킹을 즐기는 일본인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다는 점이 의아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일본과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비를 세워 놓은 곳이 있는 걸 보면 한동안은 일본인도 순례 여행을 많이 했을 듯한데, 최근 몇 년 사이 일본인 순례 여행자는 거의 없다고 한다. 어려운 경제 여건 때문인지,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즐기는 오타쿠 문화 탓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이번 1차 규슈 올레 트레킹에서는 규슈올레 중 처음 개장한 사가현의 다케오 코스, 우레시노 코스와 후쿠오카현의 구루메·고라산 코스, 야메 코스, 미야마·기요미즈야마 코스 등 다섯 개 코스를 걸었다. 다섯 코스 모두 산을 넘어가는 구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 다케오 코스는 사가현립 우주과학관 뒤쪽 산이 구간은 짧지만 오르고 내리는 구간의 경사가 가팔라 제일 난이도가 높은 코스다. 우레시노 코스는 도자기 마을에서 22세기 아시아 숲으로 넘어가는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길은 이번 다섯 코스 중 최고로 꼽을만하다. 미야마·기요미즈마야 코스 초입의 대나무길도 환상적이다. 그에 비해 야메 코스는 비 내리는 녹차밭 풍경이 환상적이었지만 녹색 차밭 외에는 특별한 풍광이 없어 다소 밋밋했다.

일본의 교통비가 비싸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다. 특히 버스 요금이 그러한데 택시 미터기 마냥 210엔을 기본으로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요금이 올라가는 상황을 운전석 옆 모니터로 실시간 확인하는 경험은 신기하고 놀라웠다. 대신 음식값은 한국에 비해 다소 싼 편이고,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는 초밥은 싸고 맛 좋은 가성비 최고의 아이템이다. 스타벅스 커피는 특유의 고소한 쓴 맛을 뺀 밋밋한 맛이라 실망스러웠고, 오히려 편의점 커피가 싸고 맛이 더 좋았다.

무엇보다도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밴 그들이 낯선 이를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길을 걷다 말을 걸면 대화가 고픈 사람 마냥 그렇게 수다스러울 수가 없다. 이 사람들이 평화로운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죄 없는 젊은이들을 징용이며 정신대로 끌고 가고, 생체 실험을 하며 잔인하게 죽이던 그들의 후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길은 국적에 관계없이 그저 걷는 사람의 것이고, 길에는 정치도 갈등도 미움도 없는 것이지만, 가까운 이웃 나라로 인한 내 나라의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저 고맙고 감사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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