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금명죽이 자라는
<<구루메·고라산 코스>> 8.6km / 난이도: 중상
JR구루메대학역 --> 부부신과 사랑의 아기동백꽃 (1.5km) --> 맹종금명죽림(2.1km) --> 오쿠미야--> 구루메 삼림 철쭉 공원 (5.2km) --> 고리타이샤 (6.4km) --> 묘켄신사 (7.0km) --> JR미이역(8.6km)
이틀 간의 다케오, 우레시노 일정을 끝내고 오늘은 구루메(Kurume) 시로 이동한다. 후쿠오카에서 JR 열차로 불과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구루메시는 인구 50만 명의 공업 도시다. 다케오시에 비해 인구가 10배라 확연히 다른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케오온센역에서 표를 살 때 직원에게 얘기를 듣고 탑승장에서 기다렸지만, 지나가는 기차가 여러 종류라 정확히 어느 기차를 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기차표가 두 장인데, '다케오온센-도스, 도스-구루메'로 적혀 있지 않고, 다케오온센-도스, 다케오온센-구루메라고 적혀 있어 헷갈렸다. 기차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 도스역으로 간다는 기차를 일단 탔다. 도스역에서 환승해서 구루메역에 내렸는데 구글 지도의 올레 출발지와는 다르다. 구루메역이 아니라 <구루메대학앞역>이 구루메·고라산 코스의 출발지인데 잘못 알고 내렸다. 사무실로 찾아가 역무원에게 물으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내가 가진 표는 가져가고 다른 표를 끊어준다. 요금 더 내라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더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자유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데, 사실 이런 게 자유여행의 묘미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고 헤쳐나가는 재미. 그래서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일과 먼 미래를 계획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여행이다.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잠을 잘지, 그곳까지는 어떻게 이동할지 등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행 중에 어려움이 생겨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문제조차 여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버스요금뿐만 아니라 열차 요금도 너무 비싸다. 다케오온센역에서 도스역까지 30분 정도 타고 오는데 1,000엔은 그나마 이해를 하겠는데, 도스역에서 구루메역까지 서울지하철 1호선 느낌의 열차 두 코스 이동하는데 1,510엔은 해도 너무하다.
이곳 사람들은 듣던 대로 친절이 몸에 배었다. 역무원은 말할 것도 없고, 기차를 타며 아이 둘 데리고 여행하는 젊은 부부에게 타는 기차가 맞는지, 어떻게 환승하는지 물었는데 어설픈 영어로 참 열심히 알려준다. 열차에 탄 뒤에도 자기 자리로 바로가지 않고 통로에 서서 어쨌든 도움을 주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은 감동마저 불러일으킨다. 도스역에서 갈아 탄 열차에서는 아내와 같이 둘이 나란히 앉으라며 자리를 양보한다. 건너편은 햇볕이 들어 불편할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시골길을 걷다 횡단보도 근처에 서면 모든 차가 멈춘다. 횡단보도 선을 물고 서는 법이 없다. 미안하리만치 저만치 떨어져 멈춘다. 몸에 밴 그들의 친절과 배려는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부모와 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것이다. 그런 교육 때문에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말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꼭 가져야 할 소중한 품성과 견줄 바는 아니다. 경제가 예전만 못한다지만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고 배려하고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풍족한 것보다 훨씬 잘 사는 것이다.
구루메대학 앞역까지 오는데 헤매느라 배가 고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우선 밥부터 먹고 가자', 기차에서 내린 학생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대학교 앞에는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이 있기 마련이다. 분식점에 들어가 카레밥과 계란우동을 주문했다. 이 사람들은 단무지 하나 없이 이런 걸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다. 미리 준비해 간 봉지김치를 하나 꺼내어 주인에게 물었다. "기무치 타베마스 이이데스카?" "하이, 이이데스" 먹어도 된단다. 주인에게 일본어로 물어보는 걸 보고는 아내가 깜짝 놀란다. 벼락치기 일본어 공부가 효과가 있긴 있는 모양이라며 "스고이~". 번역기나 영어로 소통을 해도 되지만 현지어를 좀 알면 여행이 좀 저 재밌어진다.
구루메·고라산 코스는 이 회색빛 공업 도시가 조심스레 품고 있는 고라(高良)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보석 같은 길이다. 올레길은 <JR구루메대학 앞역>에서 시작해 시내를 지나 고라산으로 향한다. 고라산은 해발 310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인데 울창한 삼나무와 단풍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 깊고 커다란 숲 그늘을 만들어 낸다. 역 앞에서 구루메 대학을 지나 도로를 따라 잠시 걸어가면 폭이 넓은 돌계단이 있는 곳에 서게 된다. 오른쪽으로는 아스팔트 도로이고 직진은 고라타이샤(절)로 올라가는 길인데 이 갈림길에 올레 안내 리본이나 방향 표시가 없어 조금 헷갈린다. 이틀 동안 걸어 본 바로는 인도 없는 찻길로는 올레길을 내지 않은 걸로 봐서는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맞다. 돌계단을 한참 올라가다 보니 역시나 반가운 올레 리본이 있다.
올레 표식을 따라 돌계단 오른편 샛길로 들어서자 <부부신> 나무가 있다. 두 그루 나무의 가지가 연결되어 손을 잡은 부부처럼 보여 부부의 사랑이 깊어지게 한다는 <부부신> 나무다. 우리나라에도 몇 군데 이런 부부나무, 연리지가 있는데, 이곳 부부신은 서로 마주 보며 손을 맞잡은 모습으로 절대로 떨어질 것 같지 않게 한 몸처럼 붙어 있다. 이 산에는 <부부신> 나무 외에도 마을 사람들이 심었다는 4,000그루의 수국이 있고, 단풍나무 6,000그루를 심었다는 기념비가 있고, 61,000그루에 달하는 철쭉이 있고, 초록색과 진하지 않은 황색이 번갈아 나타나는 금명죽이 있다. 일본 국내 네 곳에만 있다는 맹종죽이 자라는 <맹종금명죽림>은 국가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데, 두 색이 번갈아 나타나는 대나무의 자체는 실로 신비롭다. 맹종금명죽림을 지나면 고리타이샤로 바로 올라가는 돌계단과 우측 숲길로 가는 길이 갈린다. 아스팔트 도로와 주차장이 있는 걸로 봐서는 이곳까지 차로 올라올 수 있는 곳이다. 좌측 돌계단을 잠시 올라가면 고라타이샤에서 참배할 수 있다.
올레 리본은 숲길로 향한다. 나무와 흙과 풀 그렇게 숲이 만들어 내는 맑은 공기가 가득한 산속을 걸으면 이곳이 일본의 올레길인지 우리 동네 둘레길인지 알 수 없고, 좁은 산길에서 만난 노부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깝지만 먼 이웃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다만 이곳도 정겨운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산과 길에는 일본 사람, 한국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 있고, 일본말과 한국말이 따로 있지 않고 그저 반가운 대화가 있을 뿐이다. 인구가 많은 도시라 그럴까, 이 산에서는 걷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꽃 진 철쭉길을 지나 고라타이샤(高良大社)로 들어간다. 듣던 대로 신사 규모가 크다. 고리타이샤는 1625년 전, 400년 경에 건립된 규슈 최대 규모의 신사라고 한다. 본당은 채색을 따로 하지 않고 오래된 나무의 살결을 그대로 두고 있어 시간의 숙성을 간직하고 있다. 고라타이샤에서 구루메 시내를 내려다보다 산을 내려오는 길은 대나무 숲이다. 대나무가 얼마나 굵은지 대나무통밥 그릇 굵기 보다 더 굵다. 이곳 규슈의 산에는 삼나무와 편백나무, 대나무가 굵고 곱게 잘 자란다. 종착지 <JR미이역>은 마치 시골마을 버스정류장 같아 역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작다. 버스를 타고 <구루메시립미술관(이시바시 문화센터)>에서 내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미술관은 다음 전시 준비로 휴관이다. 미술관 주위는 온통 장미꽃밭이라 땀 젖은 옷에 장미향을 담으며 한참을 쉬었다. 거기서 숙소까지는 다시 걸었다.
<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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