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이 맞닿는 선
지리시간에 배운 것이 우리나라는 전국토에서 산이 65%를 차지할 정도로 산지형 국가라는 것이다. 어느 마을마다 산이 포근하든 위압적이든 동네를 감싸고 있다. 해는 산등선이 너머에서 뜨고 산너머로 해가 진다.
산은 우리 삶에 가까이 있고 멀리 있는 것은 가린다. 그래서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득하다', '막막하다' 란 이미지는 머릿속에서 쉽게 구현이 안된다. 공간은 시간과 맞닿는다. 바쁘게 살다 보면 긴 시간이 얼마만큼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루, 이틀? 몇 주? 아니면 몇 달?
그래서,
우리 조만간 보게 될 거야.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긴 기다림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나는 지평선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바닷가에 가서 저 머리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수평선을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지평선도 위로 하늘은 같을 테고 대신 아래로 바다 대신 땅이 있을 테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바닷가에 서서 저 끝 수평선을 볼 때야 '정말 저 멀리 있다', '아득하다'라는 말을 몸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공간의 광활함을 보고서 시간의 무한함을 체감한다.
지평선이란 단어는 이국적이다. 하늘과 땅이 닿는 평평한 선은 정말 몽골 초원이나 호주의 사막에 가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지 산지형 국토인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지평선이 있다고 한다. 호남평야의 중심, 김제에.
김제는 가본 적이 없지만, 친숙한 명칭이다. 어릴 적 국사시간에 배운 우리나라 삼한시대에 만들어진 오래된 3대 저수지 명칭에 김제가 있다.
제천 의림지,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지금까지 머릿속에 남은 것을 보면 달달 외웠나 보다. 그런데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저수지 이름에 뜻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단어 외우기 급급했다. 이제야 3대 저수지 중 하나인 김제 벽골제를 간다.
그전에 벽골제 이름이 무엇인가 알아봤다. 벼의 고향이라는 뜻의 볏고을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김제는 우리나라 최대 평야인 호남평야의 중심으로 김제평야는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그만큼 김제는 우리나라 벼농사 중심의 곡창지대다. 어릴 적 벽골제 이름이 벼의 고을에 쌓은 제방이란 말을 들었어도 재미나게 배웠을 텐데, 주야장천 '김제 벽골제'만 그 뜻을 모르고 외워댔다.
배움에 있어서 즐거움을 빼앗는 것이야 말로 암기식 교육의 폐해다.
내친김에 제천의 의림지는 한자로 義林池를 쓰며, 의림은 샘물이 솟아나는 지역을 말한다. 제천이라는 이름도 둑 제(堤)와 내 천(川)을 써서 바로 의림지를 말한다.
밀양의 수산제는 한자로 守山堤로 쓴다. 물 水가 아닌 지킬 守자를 쓴다. 이는 낙동강 지류인 용진강 물 주기가 산으로부터 흘러들어 만들어진 제방을 관리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밀양 이름도 원래 변한의 부족국가였던 미리미동국에서 왔다. '미동'은 순우리말로 물둑 즉 제방이라는 뜻이다. 진작 국사를 이리 배웠으면 얼마나 재미났을까 싶다.
사적 11호 김제 벽골제에 당도하니 넓은 주차장이 눈에 띈다. 드넓은 평야를 자랑하더니 주차장도 호남평야를 닮아 초록 잔디가 벼인양 끝없이 펼쳐진다. 평일이라 사람은 눈에 띄지 않고 한가하다. 그래도 나름 축제를 하거나 주말이면 이 넓은 주차장도 차 댈곳 없이 붐빌 것이라 생각해 본다.
벽골제 농경사 주제관에 가려하니 담벼락에 박태기나무가 한그루 자랐다.
박태기나무는 꽃이 피기 전, 꽃봉오리가 마치 밥알을 닮아서 ‘밥풀떼기’ ‘밥티기’ 등으로 불리다가 이 단어들이 '박태기나무'가 되었다. 이 나무를 곡창지대 김제에서 보다니 매우 아이러니하다.
나는 박태기나무를 보니 슬프다. 주렁주렁 매달린 꽃이 처연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슬프다. 우리 선조는 산악지대에 살다 보니 대대로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래서 웬만한 나무들 이름은 먹고 싶은 밥을 빗대어 이름을 지었다. 큰 나무 위에 핀 하얀 꽃은 하얀 쌀을 닮았다고 이팝나무고, 작은 나뭇가지에 핀 하얀 꽃은 좁쌀을 닮았다고 조팝나무라고 한다.
일본인들이 조팝나무를 나무에 하얀 눈꽃이 피었다고 하여 '눈버들'이라 할 때 우리 선조들은 하얀 쌀을 연상했다. 무척 처량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김제, 이 드넓은 평야에서 수확한 쌀로 모두 넉넉하고 배부르게 먹을 터다. 그런데, 누군가 굶주리고 배고파한다는 것은 결국 분배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많이 생산된 쌀이 맛이 좋은 지 확인할 겸, 두 포대 구해서 상경한다.
쌀 이름이 좋다. 지평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