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이아 레지던시 작가들의 작업 세계 들여다보기
가장 순수한 나의 형태는 어떤 모양일까? 사회 속에서 특정 역할과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나는 점점 나의 의지보다는 다른 의지를 받아들이게 된다. 가족 안에서, 직장에서, 지역주민으로서 나는 그에 맞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습관적으로 정해져 있는 사회적 행동 속에 질문을 던진다. 무엇에 어울리는 행동이라는 게 있을까? 그런 역할 속에서 여전히 나는 순수한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김진아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역할 속에서 자아가 느끼는 무기력함을 작업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무기력함이 느껴질 때, 이런 감정이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질문하고 실험하는 과정이 작업의 프로세스가 된다.
기능하지 않은 존재에 대한 작가적 관점은 ‘대명마을(2021)’ 프로젝트에서 먼저 보인다. 한센병(나병) 환자들의 거주 공간에 대한 리서치 작업으로 거주지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 작업과 그곳에서 재배되고 있는 들깨를 수확하고 또 기름을 짜내어 전시 공간으로 들여왔다. 들깨를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만들어 낸다. 들깨는 한국 어디에서나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다. 특히 들기름 냄새는 한국인이라면 너무나도 친숙한 김밥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로서 전시 공간은 그 형태와 위치에 상관없이 친숙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경험된다. 고립되고 접근이 기피되는 공간을 반대로 너무나도 익숙한 기억으로 환기시키는 작가는 사회라는 경계 밖에 있는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일상적인 존재로 바라보기를 제안하고 있다.
이후 작가의 작물은 처음부터 전시장에서 길러지기도 한다. 식물이 살아 있는 데에 필요한 양분, 물, 빛의 조건을 갖춘 수경재배 모듈 안에서 작가의 작물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2019년의 개인전, Ground, Up, Ready) 공중정원처럼, 혹은 공중그네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수경재배 모듈 아래에서 사람들은 풍요를 기원하는 사물놀이, 굿 등의 주술적인 행위들을 벌인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다 갖춰진, 하지만 동시에 생명 유지에 필요 없는 것들은 모두 제거된 수경재배 모듈에서의 생명은 무생물처럼 보인다. 이런 재배 환경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역설적인 퍼포먼스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작가는 수경재배로 작물을 키우는 모습이 요즘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수단과 목적으로서 존재가 입증되는 현대인에 대한 문제 인식은 작가의 다른 작업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작가의 첫 개인전 ‘무용의 레이어(2018)’에서도 작물이 자라난다. 그리고 관객의 역할은 전시장에 놓인 전체의 작물(예: 잎, 줄기, 흙, 잔뿌리 등을 포함한 감자 전체)에서 부분을 수확하는 것. 관객은 자신의 노동과 작물을 교환하는데, ‘필요한 부분을’ 가져가고 남은 부분이 전시장에 설치된다. 나는 ‘필요한’이라는 표현에서 작가가 내려야 하는 결론, 선택의 어려움이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만큼’이라고 하기에 당신은 어쩌면 우리는 너무 친절하고 이타적 인지도 모른다. 각자의 필요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필요한 만큼의 노동을 할 수 있는 곳은 예술 안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예술이 자본시장의 논리와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이지만 동시에 예술가의 노동은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한다.
마트에서 본, 다듬어진 채소와 과일에서 "분명히 전체가 있을 텐데(나 또한 그 전체를 인식하고 있는지)"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어요. 먹을 수 있는 혹은 예쁜? 의미 있는 다른 부분도 있는데 유통과정에 견딜 수 있는 부분만이 보여지고 제공되는 것. 그에 이어서 탈락된 부분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사라진(삭제된) 노동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었어요 _ 김진아
여성, 엄마, 밥이라는 단어의 연상은 서로 한 몸처럼 인식될 것이다. 왜냐하면 옛날부터 그래왔으니까? 이에 대한 새로운 ‘고정관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작가는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이러한 질문을 갖게 되었고, 타인에서 밥을 해주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엄마가 해준 밥’, ‘여성이 해준 밥’이 아닌 ‘남’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하고 있다. ‘남이 해준 밥’ 퍼포먼스를 통해 밥을 하는 주체, 여성, 엄마의 노동이 자연이 부여한 천부적인 행위인지, 필요한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행위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무엇보다 작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업으로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에 사실 삶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은 거 같다.
바람결에 날아온 어떤 씨앗처럼 제주섬에 이주하게 된 작가는 현재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적응 중이다. 새로운 정착지, 새로운 연결망, 새로운 풍요의 터전으로 상징되는 ‘프로젝트 밭’은 작가의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프로젝트 밭’은 제주 원도심에 위치한 예술공간이아 레지던시 입주 결과 발표 작업이면서 동시에 울산에서 기후 위기를 주제로 기획된 전시에서 발표한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계속해서 이동식 텃밭을 만들고 일구는데, 예상치 못한 사건들 속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의 연결을 경험한다. 이아 레지던시에서는 공간에 들르는 다양한 주민, 입주작가, 공간관계자들이 함께 텃밭을 돌보며 작가의 부재를 대신하였고, 울산에서는 바다에 밭을 띄우는 프로젝트에서 밭 구조물이 침수되었지만 근방에서 낚시하던 주민에 의해 작품이 구조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의 밭은 삼각형으로 반듯하게 모양 지어져 있고, 펼쳐지기도 하고 뭉쳐지기도 하는 평면-입체-다면체의 밭이다. 지도 위에 그려진 직선으로 구획을 나눈 듯한 모습이, 작가에게는 땅이 침범할 수 없는, 경계 지어진 공간으로 인식된 것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제주에 와서 ‘제주 사람이세요?’라는 질문을 많이 듣게 되었고 이 역시 처음에는 경계의 담벼락을 세우는 말로 느껴졌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젝트 밭’과 연결된 여러 관계들, 그리고 제주의 생활에서 경험한 공동경작, 새로운 네트워크는 밭-땅을 공유공간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작업에서는 확장된 감각으로서의 땅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이어 나갈 예정이다.
작가님의 발표가 끝나고 열띤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작업의 이해를 돕는 내용 위주로 정리하여 적어보았다.
Q. 작가님은 무기력함이 느껴질 때 작업을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무기력에 대한 설명을 더 듣고 싶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지, 고립된 상태인지? 작가님의 초반 작업에서는 확실히 무기력함이 표현되고 있는 거 같다. 하지만 최근 작업에서는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거 같다. 무기력함이 피곤하고 지쳐있는 상태를 생각하게 되는데 작가님의 작업은 오히려 그걸 뛰어넘는 에너지가 있는 거 같다. 적극성이 보인다.
김진아. 무기력함에 대한 작업이라기보다는 나는 왜 이런 감각을 느끼는지 질문하고,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실험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내 작업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무기력이라는 단어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에게 바로 무기력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작품의 의도와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할 때 그제야 무기력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하지만 작품에서 무기력이 직접적으로 어디에 표현하였는지 찾아 봐주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Q. 보통 어떤 상황을 불편하게 느낄 때 그렇게 만든 문제에 대해 말한다. 예를 들어 무력함을 만든 게 사회적인 폭력에 있다던가, 차별에 있다던가. 하지만 작가님은 밖에서 원인을 찾지 않고 자신의 감정인 무기력에 대해 표현하는데, 그 지점이 독특하다.
김진아. 기본적으로 모든 감정은 나에게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냥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무기력’보다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은 것 같다. 나는 나의 내면을 관찰하는 행위에서 해답을 찾는 거 같다. 그래서 뿌리, 원형, 근원에 대해 생각하는 거 같다. 모든 의미와 가치, 관계를 벗어난 원형, 순수한 형태를 찾고 있는 거 같다.
Q. 초반 작업에서는 무기력한 ‘감각 자체’에 대한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이후의 작업은 무기력한 ‘태도’에 대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감각에 연결되어 있지만, 감각과 행동이 연결되면 ‘지각’이 된다. 감각은 감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어 감각하면서 동시에 감정을 일으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느껴지는 감정이 Passion이라면 감정이 일정하게 유지되면 Mood라고 표현한다.
'수경재배(2019)' 이후의 작업은 감정, 감각 다음 단계의 문제, 즉, 그런 감정에서 그다음에 내가 취하는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작업에서 감각적인 동시에 사고적인 면에 함께 등장하는데, 지금의 작업은 무기력한 감각이 무의식의 단계로 내려가 무기력한 의식이 되어 있는 거 같다. 그리고 작업에서 무기력한 의식은 ‘노동’의 문제로 나타난다.
노동은 자본으로 교환되는 문제로 나타나지만, 예술은 그 직전에 위치한다. 작가님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노동은 자본으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직전에 예술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작품에서의 기하학적인 형태는 노동에 결부될 수 있는 의미가 원형적,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인 거 같다.
<작가 읽기>는 매달 한번 씩 '문화공간 양'에서 진행됩니다. 참석을 희망하는 시는 분은 댓글 달아주시면 일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김진아작가님을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여기로! -> @kimjina.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