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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Mar 20. 2023

길 위에서 만난 붓다

남방불교 이야기 #1 미얀마 만달레이 

Part 1 꽃잎 위를 걷는 승려의 나라, 미얀마

 

  만달레이

 

Intro

 “부처상을 지키는 뱀 세마리?”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여행 가이드북의 글귀에 눈이 멈춘다. 내가 생각하는 그 징그러운 살아있는 뱀이 부처를 지키고 있다는 것일까? Snake Pagoda!, 현지어로 무에(뱀) 퍼야(파고다)로 불리는 이 사원은 1977년 종류를 알수 없는 세 마리의 뱀이  나타난 이후 그 뱀들은 24시간 부처상 곁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77년 이래로 3마리의 뱀 중 한 마리가 죽으면 그 다음날 아침 어디선가 다른 뱀이 나타나서 빈 자리를 채운다고 하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미얀마를 여행하면 거의 모든 가게와 차 안 곳곳에 부처상이나 파고다 사진이 보인다. 파고다 사진의 경우 보통은 미얀마의 상징인 쉐더공 파고다와 짜익티요의 산도싱 파고다가 대부분인데 특이하게도 커다란 뱀이 부처상을 휘감고 있는 사진이 있다. 미얀마 사람들은 이 커다란 뱀이 파고다를 지켜준다고 믿고 있는데 그 이야기의 시작이 바로 이 곳, 만델레이의 뱀 파고다인 것이다. 나는 이 믿기어려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아침일찍 호텔을 나와 뱀사원으로 향했다. 


매일 오전 11시에 이 파고다에서는 3마리의 뱀의 목욕의식이 거행된다.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다. 꽃잎을 띄운 큰 욕조에 뱀 세마리를 넣고 목욕을 시킨 후 미얀마의 우유를 뱀의 입 속으로 넣는 공양의식을 진행한다. 이 의식을 보러온 미얀마 사람들은 뱀을 실제로 만져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데 이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직접 뱀을 만지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아빠는 이 부처를 지키는 뱀에게 꽃을 올리고 여러 차례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꽃 목욕중인 뱀 


아빠는 고등학생 때 고향에서 단지 징그럽다는 이유로 길을 지나가던 뱀을 돌로 쳐 죽인 것을 참회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공격의사 전혀 없는 뱀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자체가 모두 아빠에게 업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빠는 그렇게 자신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은 뱀에게 절하며 사죄를 한 것이다. 뱀이라면 그림책에 나온 것조차 만지기 싫어하는 아빠가 45년 전 이유없이 자신이 죽인 뱀에게 사죄하고 심지어 부처상 위에 뱀을 만지는 모습이라니 도대체 이 광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스네이크 파고다(뱀사원)에서


뱀이 징그럽다는 것도 모두 인식이 만들어낸 허상이며 그 허상 안에서 무고한 생명을 죽인 자신의 죄를 참회해야한다고 말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 역시 뱀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수 많은 고정된‘상’이 떠올랐다. 성경에서 뱀은 하와를 꼬득여 선악과를 따먹게하는 악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무언가 가까이하면 인간에게 득보다 해를 끼칠 것 같은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다. 게다가 뱀의 외형적 모습이 가지는 징그러움은 아무리 그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해도 옆에 가기도 싫을 만큼의 ‘혐오’ 그 자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인식들은 사실 실체가 없다. 모두 내가 만들어낸 뱀에 대한 하나의 상일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변할 수도 있는것이다. 혐오스럽다는 인식도 아름답다는 인식도 모두 인간의 인식 틀 안에서 만들어진 의식작용일 뿐! 실체는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공’ 또는 공성(emptiness)이다. 이제 뱀 사원에서 아빠와 나눈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 


뱀과 함께 춤을

 

딸: 뱀을 만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그게 가능했어요. 무엇때문일까요? 아마도 우리가 미얀마를 여행하며 아빠와 나눈 불교이야기, 특히 ‘공’사상 때문이겠죠?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공성! 색즉시공, 공즉시색!


아버지: 나도 뱀을 만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 그러나 ‘공성’을 이해하면 뱀과 미소 지을 수도, 뱀과 함께 춤출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 안거야.



딸: 아빠가 불상에 있는 뱀에게 절하며 다가가 뱀을 만지는 장면을 보고 놀랐어요. 그리고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걸 봤는데 무슨 일이 있던 건가요? 


아버지: 나는 고등학생때 길가의 뱀을 돌로 쳐 죽인 것을 참회했어. 그 뱀은 나에게 어떤 해를 가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단지 보기 싫다는 이유로 돌을 던져서 죽였거든. 그때 나의 행동을 참회하니 눈물이 나더라. 그리고 뱀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뱀을 만진 거야. 


딸: 사실 뱀은 정말 징그러워서 가까이 다가가기도 싫은 동물이예요. 저 역시 당연히 뱀을 만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구요. 그러나, 아빠가 뱀을 만지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을 바꿀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저 뱀은 징그러운 존재가 아니다. 단지 징그럽게 ‘보일 뿐’이다’라며 속으로 여러 번 생각하니까 만질 수 있더라구요. 이것이 다 붓다가 가르친 공성과 연결되는 것 아닌가요?   

 

오온개공 


아버지: 나는 네가 아버지 보다 더 훌륭한 인물임을 오늘 다시 보았다. 아빠는 너처럼 그렇게 뱀을 만지진 못했어. 그냥 뱀의 몸에 손가락을 살짝 대었을 뿐이지. 만지는 순간 뱀이 꿈틀 함을 느꼈는데 기분이 묘했어. 그런데 너는 아빠가 못한 것을 한 거야. 나는 그 순간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 아빠는 뱀에게 참회했는데, 너는 뱀을 죽인 적도 없지만, 다가가서 뱀을 만지며 미소를 지었지. 나는 딸이 아빠를 대신해 참회한 거라 여기며 얼마나 기뻤는지! 너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사실, 아빠는 불교를 이론으로 이해할 뿐이지. 그런데 너는 그 이론을 실천했지 않니! 바로 반야심경의 오온개공을 이해하고 실천한 거야. 

사실, 공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교의 대부분을 이해한다는 거야. 우리는 강릉에서 이미 <반야심경>을 공부했지? 공사상에 비춰볼 때 선도 악도 아름다움과 추함도 길고 짧음도 더러움과 깨끗함도 다 실체가 없는 허상임을 이론으로 공부했지. 그런데 오늘 이 뱀사원에서 아름답다, 추하다 이런 인간의 판단 또는 분별심이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허상이요, 바로 ‘탐.진.치’라는 마음의 뿌리에서 나오는 세가지 독소의 작용임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거야. 이러한 ‘공’의 지혜가 압축요약 되어있는 불교경전인 <반야심경>이야기를 해보자.  


딸: 270여자밖에 안되는 짧은 경전인 반야심경의 핵심은 “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죠. 그럼 무비스님의 우리말 번역<반야심경>의 핵심구절을 인용해볼까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떄, 오온(五蘊)이 모두 공함이 확연히 알고 온갖 고액에서 벗어났느리라. 


사리자여, 물질적 현상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곧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적 현상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적 현상이니라. 감각작용, 표상작용, 의지작용, 인식작용 또한 이와 같으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현상계의 본질적 차원에서는 생겨나는 일도 없고, 없어지는 일도 없으며, 더럽지도 않으며, 깨끗하지도 않은 것이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드는 일도 없느니라…”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 時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바로 이 구절에서 ‘더럽지도 깨끗한 것도 없다는 것’ 이것이 ‘공’인데 그렇다면 뱀을 보고 더럽다 징그럽다라는 느낌 또한 ‘공’으로 바라보면 텅 비어있는 것이죠. 


‘오온개공’이란 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오온’이란 다섯 무더기란 뜻이죠. 붓다는 나라는 존재를 ‘다섯 무더기의 가합상태’로 보았어요. 나라는 존재는 몸과 마음의 이원적 구성인데 붓다는 이를 해체하여 마음을 느낌, 인식, 의지, 알음알이 이렇게 네 가지로 해체하여 보았어요. 이 같은 색수상행식의 다섯가지가 임시로 결합하여 존재하는 것이 ‘나’라는 거죠. 붓다는 오온의 비유를 마차에서 찾았어요. 마차는 수레바퀴, 축, 덮개 등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가합적 존재’이고 따라서 해체되면 마차라는 실체는 없는 것, 즉 공한 것이 되죠. 자동차 또한 수 만개의 부품이 결합되어 작동하는 가합적, 임시적 존재죠. 해체되면 자동차라는 실체는 분해되어 결국은 공성만 남는 것이죠. 좀더 쉬운 예를 들어 볼까요? 볼펜은 뚜껑, 심, 덮개 그리고 펜볼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해체되면 볼펜이라는 실체는 사라지는 것이죠. 물질 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실체가 없다는 것인데 느낌, 인식, 의지, 알음알이도 ‘알고보면’, 다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 뱀을 바라보고 느끼는 괴로운 느낌이나 명품을 바라보고 즐거움을 느끼는 감정이나 다 실체가 없다는 것이죠.  ‘생겨나는것도, 사라지는 것도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증가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다’는 이 구절은 깊은 사색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다섯무더기 공하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으면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나 추한 것에 대한 혐오가 모두 사라지고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괴로움의 바다를 건널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의 핵심 내용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아버지: 잘 이해하고 있구나. 훌륭하다! 이제 이 ‘오온 개공’ 이야기를 좀 더 이야기해보자. 네가 여고 1학년 때 티베트를 여행하며 티베트 불교를 보았지? 그때 아빠가 여고 1학년인 너에게 소개한 책이 바로 리카르도가 쓴 <승려와 철학자>란 책이었지. 이 책은 프랑스 유명한 철학자 아버지와 티베트 승려가 된 아들 마티유의 대화록이지. 이 책 속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어떻게 논의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 


 “어떤 대상을 바람직하다거나 혹은 바람직하지않다고 지각하는 것은, 대상 자체에서 비롯되는게 아니라 그것을 지각하는 방식에서 비롯됩니다. 정신에 이로운 내적 특성이 아름다운 대상 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정신에 해로운 내적 특성이 추한 대상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사라진다고 해서 현상 세계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각하는 그대로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들이 지각하는 ’세계들’은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접촉하는 대상은 모두 실체가 없다는 거지? 이러한 이해가 바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한 것인데 어려운 것 같으니 예를 한번 들어볼까? 사라장이나 정경화가 그 유명한 명곡 <시고그너 바이제>를 연주할때의 악기와 내가 켤 때의 악기를 한번 생각해봐봐. 아마도 내가 켜면 그 악기는 ‘고문기계’가 되지 않을까? 또 까페벽에 악기를 붙이면 이것은 장식품이 되지. 백남준이 악기를 줄에 메어 3시간 동안 뉴욕시에서 끌고 다녔다는데 이것은 개의 형상이야. 그렇다면 악기란 실체가 있는걸까? 이렇게 보면 ‘악기’란 하나의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공’인 것이지. 또한 물컵에 물이 반잔 들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물은 반잔이나 남은것일까? 아니면 반 밖에 안남은 것일까?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반잔 밖에’에 될수도 있고 ‘반잔씩이나’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 네 할머니가 늘 해주신 이런 이야기가 있어. 옛날에 소금장수와 우산장수를 둔 어머니가 있었대. 그런데 이 어머니는 날이 맑아도 날이 흐려도 걱정인거야. 비가 오면 우산장수 아들걱정, 해가 나면 소금장수 아들 걱정이었지. 그렇다면 ‘행복’과 ‘불행’은 어디 존재하는걸까? 바로 어머니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지. 



딸: 맞아요. 법륜스님이 ‘공’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드는 예가 있어요. 똥은 유익한 것인가 무익한 것인가? 다들 무익하고 더럽다고 생각하죠. 물론 똥이 방안에 있으면 오물이죠. 하지만 밭에 있을 때는 똥이 비료라 되잖아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어요. 나는 부모님께는 딸이지만 학교에 가면 선생이고, 가계에 가면 손님이고 버스를 타면 승객이고 관광지에 가면 관광객이 되는데 그럼 나의 실체는 ‘이것이다’라고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표상과 심상


아버지: 응. 좋은 예시구나. 그럼 욕망하는 마음을 통해, ‘공’사상을 좀더 현실에서 적용시켜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여성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게 뭐지? 


딸 : 프라다 가방? 로렉스 시계? 아니면 루이비똥? 아마도 소위 ‘명품’을 갖고 싶은게 평범한 여성들의 로망 아닐까요? 명품백 이야기를 하니까 한 친구가 저한테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자기는 백화점에서 명품 가방을 보면 탐이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친구를 보면 부럽고, 멋있고 능력있는 남자를 보면 현재 남자친구가 비교하게 된다면서 불평을 한 적이 있어요. 불교를 잘 모를때는 그냥 막연히 ‘명품이라고 뭐 별거없어. 값싸고 질좋은 물건도 많잖아. 별남자 없으니까 만족해야지뭐.’ 라고만 적당히 대답하고 말았는데…불교를 공부하고 있는 지금은 그 질문에 전혀 다른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 그 친구의 걱정과 불만은 거의 모든 인간이 가지는 마음이겠지. 그래 만약, 지금 네 강의를 듣고있는 학생이 너에게 찾아와서 똑 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떤 대답을 하겠니? 


딸: 일단, ‘불만족스럽다’라는 마음의 실체를 보라고 할 것 같아요. 지금 너의 마음이 괴로운 이유가 ‘명품가방 자체’에서 있는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네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냐를 보라고 할 것 같아요. 만약 즐거움이나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그 대상 자체에 있다면 그토록 원하는 명품을 손에 넣으면 더 이상 이와 관련한 괴로움은 없어져야 할꺼예요. 하지만 실상은 원하는 물건을 가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새로운 물건이 보이는거죠. 그렇다면 명품가방이 없기 때문에 고통스러운게 아니라, 명품가방이 없어서 생기는 내 마음이 고통의 원인인거죠. 그러니까 뱀을 보고 징그럽다는 생각, 명품백을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은 모두 뱀이나 명품백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에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 그렇지. 그것이 바로 ‘표상’에서 오는 ‘앎의 착각’이기도 해. ‘루이비똥’은 이름이지. 그 이름에 담긴 의미는 부자, 특권층, 인정, 남들의 부러움일지도 몰라. 나를 멋있게 보이도록 해준다는 거지. 루이비똥 백을 매면 내가 빛나는 것 같고 더 예뻐보이는데 반대로 이름없는 값싼 백을 들었다면 초라하고 촌스러워 보이는거야. 이런 감정 상태가 더 커져서 명품백에 대한 로망이 심해지면 훔쳐서라도 갖고 싶어하겠지. 하지만 이름과 그 이름에 붙여진 의미에 의문을 갖으면 어떻게 될까? 이 물건은 정말 명품인가? 이름만큼 그 물건이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라고 말이야.


딸: 만약 어떤 물건이 보편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명품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은 세월과 공간의 변화와 무관하게 항상 변하지 않는 동일한 가치를 가져야해요. 그런데 명품백의 가치는 ‘항상’하는게 아니죠. 그러니까 ‘항상하지 않는 가르침’ 그게 바로 ‘무상’인거죠?!     


아버지: 그렇지. 결국 명품, 명문귀족, 명문대 이런 모든 ‘이름’들이 다 언어로 개념화시켜 범주화된것에 불과한거야. 불교는 이런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견에서 벗어나 바른 견해인 정견을 가지라는거지.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표상’이지. 표상은 나의 의식이 ‘대상’에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야. 예를 들어, ‘순결한 백합, 화려한 장미, 외로운 달’이라는 표현을 보자구. 백합이 순결하다, 장미가 화려하다는 그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일 뿐이잖아? 그러니까 명품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이 물건에 대상에 투영되어 생기는 현상인거야. 좀더 예를 들어볼까? 황금보다 더 귀한게 다이아몬드겠지? 그런데 그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태평양을 건너 라스베가스로 가던 배가 표류하여 무인도에 상륙했다고 하자. 이때 그 다이암노드 덩어리는 감자한덩어리나 물한병의가치만도 못하는 존재가 되는거 아니냐! 다이아몬드에 부여한 가치는 그 대상을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된 것에 불과한거야. 그러니까 괴로움이다 행복이다라는 마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속에 있는것이지. 


딸: 그게 바로 ‘유식론’이죠. 서광스님의 <치유하는 유식읽기>란 책은 이 ‘유식론’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잘 설명하고 있어요. 아빠가 말한 가치의 상대성이나 공성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원효가 마신 해골물이겠죠? 전날 밤, 동굴에서 너무도 시원하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깨달음을 얻어,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얘기 말이예요. 똑같은 물이 어제 밤과 오늘 아침 전혀 다르게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원효의 마음작용이겠죠?   


아버지: 그렇지. 참 재미있지 않니? 뱀은 혐오하면서도 뱀가죽으로 만든 명품백은 다 가지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 말이야. 징그럽다, 아름답다라는 생각들이 뱀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뱀을 보는 나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 뱀사원에서의 경험이 좀 이해가 되지? 

 

도덕경 2장과 불교  


딸: 네. 그러네요. 사실 프라다 가방, 로렉스 시계, 루이비똥, 사랑, 정의와 같이 이름 붙여진 모든 것들은 사물 자체와는 무관하죠. 그 사물들은 그저 ‘이름’이 붙은 꼬리표를 달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꼬리표를 보고 판단해요. ‘프라다’라고 이름 붙인 꼬리표를 보고 ‘아름답다’ 라고 인식하는 것인데 그것을 원래 그 ‘대상’이 본질이 아름다운 것이다라고라고 착각하게 되는거죠. 그리고 일단 그렇게 이름 붙여진 대상에 ‘부유함, 특별함, 고귀한 지위’ 등의 의미를 부여되면 그 다음엔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되는 거예요. 반대로 ‘추하다’라는 생각이 들어 ‘천박함, 촌스러움, 초라함’의 의미가 부여되면 싫다고 밀어내게 되겠죠. 그렇다면 대체 ‘아름답다’ 또는 ‘추하다’라는 판단의 본질은 뭘까요? 


아버지: 이런 궁극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동양의 또 다른 현인은 없을까? 아마도 반지성주의 현인, 노자(老子)선생이겠지. 네가 이해하는 노자를 가지고 그 질문에 답할 수 있겠니? 


딸: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이야기가 도덕경 2장에 나와요.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추한 것이다.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이 선하다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

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



저도 처음에 이 문장을 한자로 보고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아름다움(美)의 상대어로 추(醜)를 사용하지 않고 오(惡)를 쓰고 있고, 착함(善)의 반의어로 악(惡)을 쓰지 않고 착하지 않음(不善)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죠. 안그래도 그 이유가 궁금하던 차에 왕필이 달은 주를 보니 이렇게 써있더군요. 왕필은 “아름다움(美)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나아가 즐기는 바의 것이요, 오(惡)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바의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언어로 명명된 개념들은 그 반대의 개념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형성된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아름다움에 대해서 독립적인 추함(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추하게 느껴지는”. 우리가 “싫다고 느끼는” 것으로부터 ‘오(惡)’라는 개념이 형성된다는 거죠. ‘선’도 마찬가지로 선에 대한 대립적 개념인 ‘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마음으로부터 ‘선하지 않음(不善)’이라는 개념이 나오는것이죠. 그렇게 본다면 ‘선’과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악’이나 ‘추’라는 개념에 대립하는 어떤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 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돼요.  


아버지: 그렇지. 어떤 것도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이것은 불교에서 ‘공’과 ‘무자성’이라는 개념과도 일치해. 그런 의미에서 노자 1장의 첫구절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이 개념들에 대한 총체적인 정리일 수 있어. 노자의 <도덕경> 첫 구절을 볼까?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 


이 말을 다시 이해해보자. 여기서 핵심은 ‘상도(常道)’ ‘상명(常名)’즉 ‘항상 그러한 도’를 말할 뿐 ‘불변’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거야. 불변하는 영원함의 개념이 아니라 ‘변화의 지속’을 말할 뿐이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거야. 서양에서 말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이라는 ‘불변’과 ‘영원’과 같은 개념이 동양철학에는 없지. 서양철학에서는 ‘고정된’ 존재(Being)를, 동양인들은 생성(Becoming)으로 본거야. 변하지 않는 ‘도’가 존재하지 않는데, 도를 ‘도’라고 ‘규정지어’ 버린다면 어떻게 이 ‘변화하는 도’의 본질을 말할 수 있겠니. 도가철학을 반주지주의로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야. 어떤 대상을 ‘언어’로 개념화하여, 범주속에 한정해 버리는 순간 그 대상이나 사물의 본질과는 멀어지는 이 아이러니를 노자는 알고 있었던 것이지. 



딸: 맞아요. 노자의 반주지주의(언어의 거부)가 동양에서 과학문명의 저해를 가져왔다는 설과 과학문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두 가지 설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어요. 과학의 입장에서 노자사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언어의 거부가 이성의 연역적 체계까지 거부함으로써 과학언어의 근원적 가능성을 봉쇄시켰다는 입장이죠. 반대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그릇된 선입견을 제거시키고 자연의 객관성을 있는 그대로 확보해주었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노자의 반주지주의는 본질적으로는 과학문명의 발전을 촉진시킬거라는 입장도 가능해요.     

근대과학문명의 한계에 직면해, 개발에서도 인간중심이 아니라 자연과의 공존을 강조하는 환경생태학적인 접근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노자야말로 이미 선견지명을 지닌 현인인 것이죠.  


아버지: 그렇지? 그러고 보면 도가철학과 불교는 비슷한 부분이 많아. 그래서 유교사상을 본류로 하는 중국에서도 바로 이 노자의 도가사상이 있어 외래문명인 불교가 쉽게 흡수될 수 있었겠지. 이렇게 도교와 결합된 중국만의 불교를 일러 ‘격의불교’(격의불교)라고 하지? 


딸: 인도불교의 중국화, 이것이 바로 격의 불교라고 이해하면 되는거죠? 


아버지: 그렇지. 자, 이제 그럼 미와 추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불교의 핵심이론인 ‘연기법’을 통해서 다시 한번 조명해볼까? 다훈, 붓다가 깨우친 불교의 핵심개념인 ‘연기법’을 통해서 이 뱀사원에서의 경험을 이해해 볼까? 


연기법적 사유 


딸: 연기법이란,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다시말해, 모든 결과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어떤 존재도 독자적 실체가 없다는 것이죠. 붓다의 궁극적 관심은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 즉, ‘생노병사’를 어떻게 극복하고, 괴로움에 벗어나 지극한 행복 상태인 ‘열반’으로 이르는가하는 것이죠.  그 괴로움의 발생원인과 소멸구조를 ‘12연기법’으로 이해하고 고통에서 해방되었어요. 이 12연기를 먼저 살펴보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띠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에 대하여 설하리라. 연기란 무엇인가.”

 

①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형성이 있으며

②  형성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있으며

③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이름과 모양이 있으며

④  이름과 모양이 있기 때문에 여섯감각 기관이 있으며

⑤  여섯 감각 기관이 있기 때문에 접촉이 있으며

⑥  접촉이 있기 때문에 느낌이 있으며

⑦  느낌이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있으며

⑧  갈애가 있기 때문에 집착이 있으며

⑨  집착이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으며

⑩  존재가 있기 때문에 태어남이 있으며

⑪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⑫  늙음, 죽음, 슬픔, 한탄, 고통, 불쾌, 절망이 있다.

이와 같이 해서 괴로움의 전체 덩어리가 일어난다. 이것은 연기라 한다.

 

『상윳따 니까야』 12 니다나 상윳따 1

일아 역편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p. 211-212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갈애-취-유-생-노사 우비고뇌”이 12연기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 정말 어려워요. 아빠의 추천도서인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에서 이해한 것으로 다시 설명해볼께요. 각각을 제가 이해한 대로만 다시 풀어보면 질문의 시작은 간단해요. “늙음과 죽음, 우비고뇌(근심,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뇌)”은 어디에서 오는가? 늙음과 죽음은 태어남(생)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태어남’은 유(존재)에서 오죠. 여기서 ‘유’라는 존재는 수없이 반복하고 쌓여서 만들어지는 습관이라는 ‘업’을 가르킵니다. 그러니까 업이 있어서 태어남이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업은 어디서 오는가? 집착(취)에서 옵니다. 집착은 갈애에서오고, 갈애는 느낌에서 시작되죠. 느낌은 접촉에서 오는데 이 접촉은 우리의 6가지 감각기관에서 시작되죠. 이 6가지 감각기관은 이름과 모양(명색)에서 오고, 이름과 모양은 의식작용(식)에서 시작되죠. ‘행’ 또는 형성으로 번역되는 의식작용은 빨리어로 ‘상카라(Sankhara)’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지 무명에서 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무상,고,무아’라는 불교의 핵심 교리인 삼법인(삼특상)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이죠. 따라서 12연기에서 보는 고통의 발생원인은 바로 무지, 무명이고 그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기법적으로 사유한다면 뱀을 ‘징그럽다’라고 생각한 나의 지각작용은 여섯 감각작용을 통해 접촉하면서 느낌이 생기고 ‘혐오스럽다’는 갈애가 생기면서 취착된 결과로 볼 수 있겠죠. 그러나 12연기에서 보면 그 모든 결과는 결국 ‘무지’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붓다가 진리로 파악한 4가지 거룩한 진리인 ‘고집멸도’에서 붓다는 괴로움의 원인을 ‘집착’에서 보았는데 이것을 12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그때에 괴로움을 발생시키는 집착이란, 탐과 진(증오와 분노)를 다 포함하는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12연기에서 가장 핵심 개념인 갈애는 탐욕뿐만 아니라 증오도 포함되는 것이고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탐욕과 추한 것에 대한 혐오, 이 두가지 모두가 취착의 대상이고 업형성의 원인과 조건이란 것이죠. 따라서 뱀에 대한 혐오나 증오, 그리고 명품백에 대한 갈망 모두가 다 괴로움의 원인이고 따라서 탐욕과 분노 두가지를 극복하는 근본해법이 바로 이 12연기에서 풀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려운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생각을 폭을 좀더 넓혀보자. 붓다 당시 인도 땅에는 여섯개의 학파(6사외도)가 있었어. 이들의 종교관은 창조론, 우연론, 숙명론 등에 의존하였지. 그러나 붓다는 그에 대항하여 새로운 관점인 ‘연기법’을 이야기해. 1960년대 이후 ‘실존주의’철학도 6사외도에 대항한 붓다와 비슷한 면이 있어. 기존에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했던 ‘창조론’을 부정하고 인간실존을 이야기했거든. 기존의 진리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종교관, 진리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불교와 실존주의 철학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 동국대 김종욱교수가 ‘근현대 철학과 불교’라는 주제로 한 강의를 유투브를 통해 본 기억이 있지? 그렇다면 다훈, 네가 이해한 실존주의 철학과 불교를 연결시켜서 설명해 보렴. 


현대 심리학과 불교  


딸: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자들이 유럽에 던진 이 폭탄선언은 지금 우리가 토론하고 있는 불교적 관점과도 연관성이 있어요. 대체 왜 저 말이 폭탄선언이었는가는 실존주의자들 이전의 인식을 알 필요가 있어요. 실존주의자들의 주장 이전에는 인간을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규정했죠. 그렇다면, ‘본질’과 ‘실존’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볼까요? 가위와 냉장고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가위의 본질은 무엇을 자르는데 있고, 냉장고의 본질은 어떤 식료품의 부패를 막는 역할에 있죠. 이것은 가위나 냉장고를 만은 창조자에 의해 부여된 본질이예요.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은 ‘신’이라는 창조자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니, 신의 뜻대로 순종하고 살아가야하는 것이 본질이 되는 것이죠. 1960년대 실존주의자들인 알버트 까뮈, 장폴 사르트르, 앙드레 말로, 프란츠 카프카 등등이 제기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은 바로, 기존의 ‘신’에 의한 피조물로써의 인간관을 완전히 뒤집는 혁명적인 외침이었던 거예요.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는 실존주의자들의 제1원칙은 다시 말해, ‘나의 자유의지가 신에 앞선다’는 말로 환원할 수 있어요. 인간은 창조자의 의한 피조물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반항’하고 선택하는 의지를 가진 ‘열정’적 존재인 것이죠. 이러한 실존주의자들의 생각을 잘보여주는 것이 바로 카뮈의 <시지프 신화>라는 책이예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기존의 그리스로마 신화 ‘시지프 신화’에 대한 그의 철학적 생각을 담은 에세이집으로 부제로 ‘부조리에 관한 시론’을 달고 있어요. 역시 실존주의를 잘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 <이방인>과 함께 1942년 발표 되었죠. 카뮈는 이 책의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 이야기를 통해 부조리한 영웅의 끊임없는 투쟁을 그려내요. 시지프는 신의 노여움을 사 크고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인물이죠. 그가 신의 노여움을 받은 것은 신의 ‘부조리 함’에 ‘폭로’에 있어요. 물론 그것은 시지프의 자유의지였고 신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신에 대한 반항’이었겠죠. 단지 신의 부조리함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그는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버리는 끝없는 형벌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까뮈는 이 끝없는 시지프의 고통으로부터 신의 부조리함에 ‘반항’하고 기꺼이 형벌을 ‘선택’한 인간의 실존 모습을 찾아내요.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가는 시지프를 통해 신이 부여한 ‘운명’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인간의 ‘의지’가 곧 실존임을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실존주의자들에게 ‘가치’란 신이 부여한 ‘절대성’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대성’의 개념인거예요. 이와 같은 윤리상대주의의 입장에서 가치는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틀리다’ 또는 ‘이것은 불변하는 진리다’라고 절대적으로 말할 수가 없죠. 불교에서 ‘불변하는 진리가 없다’라는 공사상과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예요. 


아버지: 그래, 잘 설명했구나. 지금까지 우리는 뱀파고다의 경험을 불교의 공사상, 연기법, 노자의 도가사상, 현대철학에서 실존주의를 통해 이해해보았지? 

복잡해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초기불경인 니까야엔 아주 이해하고 쉽고 평범한 글들이 많아. 그것만이라도 하나 하나 이해해 가다 보면, 붓다의 사상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꺼야. 그런 의미에서 좋은 구절하나를 소개해볼께. 


 

까르마로 인해 세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 신 그리고 악마 이 세 감각을 지닌 생명체들은 

한잔의 물을 다르게 본다. 

까르마적 요소로 인해 인간은 그것을 물로 보게하고, 

신은 그것은 신의 음료로, 악마는 피로 보게 만든다.

 

Dalai Lama, <The little book of Buddhism>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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